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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126화 (125/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126화

제23장 사기꾼(1)

준후의 성가신 참견에 경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은하에게 머물렀던 시선을 준후에게로 돌렸다.

그 눈빛이 곱지 않았다.

“넌 왜 끼어드는데? 제3자는 빠져.”

“의국에 관련된 일인데 내가 왜 제3자인지 모르겠군.”

준후 역시 경수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은하가 인턴이라고 말 함부로 하지 마. 업무 지시할 권한은 있어도 폭언할 권리는 없으니까.”

“네가 끔찍하게 아끼는 환자의 손목을 아작 냈는데? 최은하가?”

경수가 팔짱을 낀 채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일 처리가 허접한 은하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뭣도 모르고 은하를 두둔하는 준후도 고까웠다.

설마 자기가 정의의 사도라 착각하는 건가.

그것이야말로 오만의 극치였다.

“인턴 근무한 지 일주일도 안 됐어. 그런 점도 고려해야지. 넌 처음부터 ABGA 잘했어?”

“난 처음부터 잘했지.”

“모든 사람이 너 같은 건 아니야. 그리고 논점을 흐리는데.”

“…….”

“제일 큰 문제는 네 싸가지 없는 말투랑 화법이라고. 한 번만 더 은하를 깔보고 무시해 봐. 내가 박살 내버릴 테니까.”

준후의 목소리에 뜨거운 분노가 배어 있었다.

그 때문일까.

경수의 머릿속에서 경고 알림 울렸다.

준후를 한 번 더 자극하면.

진짜 대참사가 벌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경수는 뒤로 한발 물러났다.

“그럼 일이나 똑바로 하든가. 애초에 ABGA 성공했으면 내가 이렇게 유난 떨 필요도 없었잖아?”

“은하는 금방 적응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그래. 의대 선후배끼리 잘들 해보세요.”

“은하야. 잠깐 나 좀 보자.”

“……네. 선배.”

준후와 은하가 자리를 비우면서.

당직실은 고요함을 되찾았다.

와그작!

경수는 책상에 놓여 있던 아몬드 사탕을 씹었다.

준후를 대신해서 씹는 것이었다.

준후는 너무 물렀다.

원래 인턴은 빡세게 굴려야 실력이 빨리 느는 법이었다.

준후처럼 오냐오냐 감싸고 돌면 긴장을 풀고 해이해진 정신머리를 갖기 마련이었다.

근데, 순두부 같은 놈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불같이 화를 낼 줄도 알잖아?

사탕을 씹으며 경수는 놀란 마음을 추슬렀다.

환자와 보호자는 늘 미소로 대하고 선배들에게는 늘 싹싹하게 구는 준후였다.

그래서 내심 만만하게 봤다.

싫은 소리 못하는 호구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부딪쳐보고서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준후에겐 의외로 불도저 같은 성깔도 있었다.

뭐, 그래 봤자지.

나도 너 같은 부류, 많이 겪어봤어.

착하고 좋은 일만 하려다가 제 살을 깎아 먹는 부류 말이야.

그리고 그 끝은 보통 베드 엔딩이기 마련이지.

경수는 속으로 준후의 사고방식을 얕잡아보았다.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고.

착하게 살면 손해를 면치 못한다.

이것은 경수의 좌우명이자 그동안 살면서 얻은 깨달음의 정수였다.

드르르륵.

때마침 2년 차 민경이 당직실로 들어왔다.

“준후랑 무슨 일 있었어? 방금 마주쳤는데 표정이 심각하던걸?”

“글쎄요. 전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업무는 어때? 할 만해?”

“네. 별문제 없어요.”

이후로도 민경은 경수에게 업무에 관한 것을 꼬치꼬치 물었다.

타 대학 출신이라고 신경 써주는 모양인데.

경수는 민경의 관심이 성가셨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못 미더웠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적당히 친해진 후, 일을 떠넘길지 누구 알겠는가.

친절과 호의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경수는 민경과 적당히 거리를 둔 채 설렁설렁 대답했다.

“원래 그렇게 말이 짧아? 아니면 아직 낯을 가리는 거야?”

민경이 입술을 뾰족 내밀며 물었다.

경수의 미지근한 태도가 답답하다는 눈치였다.

“아쉽게도 원래 성격이 이러네요.”

“휴. 성격이 그렇다니 할 수 없네. 어쨌거나 힘들거나 어려운 점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하고.”

“네.”

타다다닥.

민경이 떠난 후 경수는 차트 업무를 재개했다.

바쁘게 키보드를 두들겼다.

-제일 큰 문제는 네 싸가지 없는 말투랑 화법이라고. 한 번만 더 은하를 깔보고 무시해 봐. 내가 박살 내버릴 테니까.

업무를 보는 동안.

경수는 이상하게 준후의 말이 자꾸 거슬렸다.

준후는 확실히 ‘그 사람’과 닮은꼴이었다.

* * *

신경외과 컨퍼런스 룸.

준후는 원형 탁자에 앉아 은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은하가 경수에게 폭언을 듣게 된 자세한 경위를 듣고 있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ABGA를 연거푸 4번이나 실패했으니까요. 중간에 동기나 선배한테 도움을 청했으면 좋았을 텐데.”

“…….”

“환자랑 보호자가 스테이션에서 컴플레인 걸고 난리도 아니었거든요.”

사연을 털어놓는 은하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인간 비타민처럼 활기차던 은하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환자와 보호자의 입장도 이해하지만 난 너도 이해해.”

“저를…… 요?”

“실수를 네 손으로 만회하고 싶었던 거잖아. 그렇지?”

준후는 은하에게 따스한 위로를 건넸다.

비록 과정과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은하의 마음만큼은 충분히 공감하고 남았다.

누구든 이런 경험이 없을까.

자신의 실수를 되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그 결과가 또 다른 실수로 이어지는 갑갑한 경험 말이다.

준후도 무림에서 그런 경험이 있었다.

“네. 맞아요. 정확해요. 어쩜 제 맘을 이렇게 잘 아세요.”

은하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까 말이에요. 제 손으로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게 들었거든요.”

“괜찮아. 누구나 그러니까.”

“선배도요?”

“당연하지. 나는 사람 아니고 괴물이니?”

준후의 농담에 은하가 피식 웃었다.

은하의 마음이 조금씩 풀리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자책감과 죄책감.

이 두 가지만큼 사람을 갉아먹는 감정이 또 있을까.

“지금은 하나씩 배우는 단계니까 너무 스스로를 몰아붙일 필요 없어. 실수도 경험이야.”

“네. 선배.”

은하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아까는 진짜 감사했어요. 선배가 제 편을 들어주셔서 상처를 덜 받았거든요.”

“후배가 부당한 일을 당하는데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지.”

“멋져요. 선배.”

“알면 됐어. 그럼 지금부터 경수한테 복수를 해볼까?”

“복수요? 무슨 복수요?”

뜻밖에 단어에 은하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일단 스테이션에서 가서 주사기랑 알콜솜, 토니켓(팔목을 묶는 고무줄) 좀 가져다줄래?”

“네.”

잠시 후 은하가 필요한 도구를 챙겨 준후와 마주 앉았다.

은하는 아직도 준후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지금부터 ABGA 특훈시켜줄게. ABGA를 완벽하게 마스터해서 경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주자고.”

“…….”

“무릇 최고의 복수는 성공이야.”

준후가 야심 차게 계획을 발표했지만 은하의 낯은 어두웠다.

“저는 자신이 없어요. 선배. 아까도 환자 혈관 다 망쳐놨는데…….”

“나만 믿고 따라와. 그래서 가르쳐주겠다는 거니까.”

“…….”

“일단 환자한테 했던 것처럼 나한테 ABGA 해볼래?”

“아프실 텐데…….”

“괜찮아. 그 정도는 끄떡없어.”

“그럼…….”

머뭇거리던 은하가 준후의 오른쪽 팔목에 고무줄을 묶고 주사기를 찔러 넣었다.

푹!

결과는 실패.

주사가 혈관을 한참 벗어났다.

순간 은하의 얼굴에 밀려드는 먹구름.

“죄송해요, 선배. 역시 하는 게 아니었는데…….”

“실패를 무서워하지 마. 그럼 아무것도 못 해.”

준후는 은하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곧바로 설명에 들어갔다.

ABGA 채혈은 인턴들의 무덤이라고 불렸지만 준후의 요령대로라면 문제없었다.

인턴 시절 준후는 ABGA 채혈을 초식화해 놓았다.

쉽게 비유하자면 요리 레시피로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

레시피를 잘 따른다면 요리에 실패하기 어려운 것처럼.

ABGA도 준후의 가르침을 따르면 실패하기 어려웠다.

준후는 한 때 무림맹 무공 교관을 맡았었는데.

덕분에 본인이 배우는 것만큼이나 가르침에도 소질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므로.

은하는 30분 내로 ABGA를 마스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경수도 다시는 ABGA로 은하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 * *

한 시간 후.

신경외과 병동 휴게실.

은하는 짝턴인 태준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폭풍처럼 밀어닥친 오더를 처리하고 한숨 돌리는 중이었다.

“아까 컨퍼런스 룸에서 뭐야? 준후 선배랑 단둘이 있던데. 아주 깨가 쏟아졌겠어?”

태준이 놀리듯이 물었다.

은하가 준후 바라기라는 걸 태준은 알고 있었다.

“좋기는 좋았는데 조금 다른 의미로 좋았어.”

“뭔 소리야?”

“선배가 나한테 ABGA를 알려줬거든. 막 알콩달콩하고 그랬던 건 아니야.”

“아…… 아까 깨진 것 때문에 그랬구나. 준후 선배가 잘 가르쳐주시긴 하디?”

“엄청 꼼꼼하게 가르쳐주던데?”

교육을 받던 당시를 떠올리며 은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무슨 수학 공식을 배우는 것 같았다.

환자와 자신의 몸의 위치.

팔의 각도.

주삿바늘의 각도.

힘을 조절하는 방법 등등.

ABGA를 준후처럼 가르쳐주는 사람을 은하는 처음 봤다.

“그래서 도움은 됐고?”

“선배가 가르쳐준 대로만 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나저나 태준이 너 부럽다. 넌 ABGA 잘하잖아.”

은하가 태준을 부러워하며 말했다.

태준은 ABGA를 퍽 잘하는 편이었다. 보통은 두 번 안에 성공하곤 했다.

“난 뽀록이었던 것 같아.”

“엥? 그게 무슨 소리야?”

“쓰으읍. 저녁에는 다 실패해서 윤석이한테 대타 뛰어달라고 했다”

태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더니. 그 말이 딱이네. 진짜.”

“ABGA 빨리 익숙해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환자한테도 욕 안 먹고 레지던트 선배들한테도 욕 안 먹지.”

지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콜폰.

번호를 확인하니 병동 스테이션이었다.

“네. 선생님.”

-…….

“네. 지금 갈게요.”

“뭔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ABGA 오더 났대. 그것도 경수 선배 환자한테.”

은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잊고 있었던 트라우마가 생생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길길이 날뛰며 자신을 향해 삿대질하던 보호자.

폭언을 퍼부었던 경수.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동 환자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쥐구멍에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오 마이 갓. 명복을 빈다. 전우여.”

“응.”

은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테이션에서 처치 도구를 챙겨 병실로 이동했다.

그런데 웬걸?

예상치 못한 복병이 병실에 하나 더 존재했다.

바로 경수였다.

경수를 마주한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선배님이 왜 여기에…….”

“혼나고 나서 정신 차렸는지 확인해야지. 내가 이래 봬도 꽤 집요한 편이거든.”

경수가 독사처럼 웃었다.

쿵. 쿵. 쿵.

요동치는 심장을 느끼며.

은하는 환자가 누운 침상으로 다가갔다.

요골동맥의 상태를 확인하는 알렌 테스트를 진행하고.

환자의 팔목에 고무줄을 묶었다.

스으윽. 스으윽.

알콜솜으로 환자의 손목을 소독했다.

침착하자.

준후 선배가 특강까지 해줬는데 그걸 헛되게 만들 순 없어.

심호흡하며 은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준후의 ABGA 요령을 되새김질했다.

-우선 환자의 팔과 네 몸을 수직으로 만들어. 환자랑 비스듬하게 서 있으니까 바늘도 비스듬하게 들어가지.

척!

은하는 환자의 팔과 자신의 몸을 수직으로 만들었다.

-손가락으로 맥박을 촉진해. 맥박이 가장 강한 곳을 찾고 그곳에 가상의 점을 찍어.

은하는 준후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준후가 곁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주사가 들어갈 자리, 아랫부분을 검지로 눌러서 고정해 줘.

-주사기는 연필 쥐듯이 쥐고 45도 각도로 바늘 침을 찔러 넣는 거야. 45도 각도를 맞추는 법은 간단해.

-의사 명찰, 가장 윗부분에 손을 올려. 그 상태에서 손목을 최대한 뒤로 당기면 돼.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바늘을 혈관에 찔러 넣는 일만 남았다.

“뭐야? 제법 자세를 잡는데? 공부 좀 했나 보지?”

경수가 한마디 했지만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은하는 그만큼 채혈에 집중하고 있었다.

-준비가 됐으면 찔러. 혈관이 톡 하고 뚫리는 느낌이 들 때까지.

저 갑니다! 준후 선배.

은하는 두려움을 몰아내고 바늘을 전진시켰다.

바늘이 살갗과 혈관을 차례대로 통과했다.

이윽고 준후가 말한 것처럼.

톡 하고 무언가가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상태에서 밀대를 당기자 혈액이 주사기 몸통으로 우르르 밀려들었다.

실습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ABGA를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은하는 충분히 혈액을 확보한 후 주사기를 수거했다.

바늘이 들어간 환자의 손목을 알콜솜으로 지그시 눌렀다.

환자 팔뚝에 감긴 고무줄도 풀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ABGA에 성공했다는 짜릿한 쾌감과 감격이 몰려왔다.

“문지르지 말고 5분 정도 누르고 계세요.”

“네. 고생하셨습니다. 선생님.”

채혈을 무사히 끝내고 은하는 경수와 병실을 나왔다.

경수가 은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역시 갈구니까 잘하네. 진작 이렇게 할 것이지.”

경수가 은하를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최은하.”

“네. 선배.”

“아까 내가 했던 말, 아직도 신경 쓰이냐?”

“네. 조금.”

“생각해 보니 나도 조금 과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무뚝뚝하고 차갑기로 소문난 경수가 먼저 사과를 하다니…….

은하는 살짝 충격마저 받았다.

“먼저 간다.”

경수가 먼저 등을 보인 채 당직실로 향했고.

은하는 그런 경수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준후 선배.

저, 선배 요령 듣고 ABGA 한 번에 성공했어요!

선배는 ABGA 1타 강사인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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