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27화
제23장 사기꾼(2)
그 날 저녁, 신경외과 병동은 고요했다.
밤 10시가 되면서 병실의 불이 하나둘 꺼졌다.
환한 전등 대신 은은한 수면등이 달빛처럼 병실을 밝혔다.
환자와 보호자가 없는 병동 복도는 쓸쓸하고 황량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당직 근무를 맡은 준후는 당직실에 있었다.
입원 환자들의 EEG(Electroencephalography. 뇌전도 또는 뇌파검사) 영상을 공부하고 있었다.
흉부외과에 심전도가 있다면.
신경외과에는 뇌전도가 있었다.
뇌전도는 두통, 뇌졸중, 뇌종양, 뇌염 등의 진단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레지던트 1년 차는 수술 중 뇌전도를 감시할 줄 알아야 했다.
마취의가 수술 중 바이탈을 책임지긴 하지만 뇌전도까지 봐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준후는 뇌전도를 30분 가까이 공부했다.
뇌파의 주파수와 주기.
진폭과 반응성, 변화성 들을 면밀하게 암기했다.
뇌전도는 최대한 다양한 케이스를 암기하는 것이 포인트였다.
암기한 케이스를 실전에서 즉각 적용하는 것이 포인트였다.
주식 차트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파동을 준후는 어렵지 않게 외웠다.
시각 정보를 처리를 담당하는 시각피질.
이 부위를 점혈법으로 자극했던 것이다.
그러자 다 똑같아 보이던 파동이 다르게 보였다.
파동 간의 세밀한 차이가 한눈에 들어왔다.
뇌에 영역별 점혈 자극.
그 덕분에 준후의 학습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공부에 필요한 뇌 영역을 활성화할 수 있었으니까.
“선배. 공부하세요?”
그러던 중 병동 잡을 마친 은하가 당직실로 들어왔다.
은하도 당직인 듯했다.
“어, 뇌전도 보고 있어.”
“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지렁이가 춤을 추는 것 같은데요?”
준후 곁에 다가온 은하가 모니터에 떠오른 뇌전도 판독지를 보고 혀를 찼다.
“내 눈에도 그렇게 보여. 이 친구는 특히 댄스가 격렬한데?”
준후가 농담을 받아주자 은하가 쿡쿡 웃었다.
“아 참, 선배. 저 선배한테 특강 받고 ABGA 5전 5승이에요.”
“거봐. 내가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했지?”
“다 선배 덕분이죠. 채혈 잘하니까 경수 선배도 꼼짝을 못하더라고요.”
“당연히 그래야지. 자기도 양심이 있으면.”
들뜬 은하의 보고를 듣고 준후는 빙그레 웃었다.
은하가 활기찬 모습을 되찾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경수 선배 생각만큼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너한테 막말했던 거 잊었어?”
“아까 먼저 사과를 하더라고요. 퉁명스럽긴 했지만 확실히 했어요.”
“그래? 녀석답지 않은데…….”
준후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어쩌면 은하의 말대로 일지 몰랐다.
경수는 준후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쁜 녀석은 아닐지도 몰랐다.
악인과 성격이 괴팍한 이는 같은 부류가 아니니까.
그리고 상대가 악인만 아니라면 준후는 언제든 보듬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나저나 선배.”
“응. 왜?”
“혹시 나중에 다른 술기도 가르쳐주실 수 있으세요?”
“물론이지. 지금도 가능해. 나잘 튜브(비위관 삽관, 콧줄) 꼽는 것도 어려운데 가르쳐줄까?”
“오늘은…… 쉴게요. 벌써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은하는 ABGA 특강이 고마웠다며 준후의 등 뒤에 서서 어깨를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악력이 약해서 별로 시원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후배에게 안마를 받는 느낌은 좋았다.
준후는 동료와 선후배들의 피로를 추궁과혈로 풀어주었지만.
정작 다른 사람에게 안마를 받은 적은 많지 않았다.
“선배. 저 또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넌 정말 호기심 천국이구나.”
“그런 소리 자주 들어요. 근데 선배랑 아영 선배는 무슨 관계세요?”
“그게 왜 궁금해?”
예상치 못한 질문에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궁금해서요. 의대 시절부터 항상 붙어 다니셨잖아요.”
“아주 친한 사이지. 지금은 내가 믿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고.”
대답하면서 준후는 왼쪽 손목에 착용한 팔찌를 응시했다.
문득 칼에 베인 듯 가슴이 아렸다.
소중한 사람 두 명 중 한 명은 이미 하늘의 별이 되어 있었다.
“연인 관계는 아니신 거죠? 둘이 사귄다는 소문도 파다했는데.”
“그런 건 아니야. 나랑 아영이는 서로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렇구나. 알겠습니다.”
은하의 목소리가 어쩐지 한층 더 밝아졌다.
띠리링~
때마침 울리는 당직실 전화기.
전화에 손을 뻗으며 준후는 생각했다.
제발 수술 환자.
또는 응급환자 콜이었으면 좋겠다고.
남들이 피곤해하고 힘들어하고.
꺼리는 수술을 준후는 미치도록 원하고 있었다.
수술에 더 많이 들어갈수록.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뛰어난 외과의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수술 욕심만큼은 이미 세계 제일인 준후였다.
* * *
다음 날 오후.
5시간짜리 뇌종양 수술 어시스트가 끝났다.
교수와 희준은 곧바로 다음 수술방으로 이동했고 준후는 수술실을 나왔다.
터벅. 터벅.
4층 복도를 거닐며 방금 끝난 수술을 복기했다.
복기가 중요한 건 체스와 장기뿐만이 아니었다.
수술도 마찬가지였다.
수술이란 환자가 앓고 있는 질환과 의사가 승패를 가리는 일이었으니까.
준후는 수술을 2번 복기했다.
초식으로 정형화한 집도의의 술기.
초식으로 정형화한 제1어시스트의 술기를.
인턴 때부터 해왔던 일이라.
아니, 무림에서부터 해왔던 일이라 어렵지 않았다.
비록 몸은 복도를 걷고 있지만.
준후의 머릿속은 이미 수술방이었다. 긴장 넘치는 집도를 한 번 더 재현하고 있었다.
복기하며 도착한 곳은 지하 1층 편의점이었다.
준후는 각종 아이스크림을 서른 개 가까이 구입했다.
슬슬 날씨가 더워지고 있었다.
병동 스태프들에게 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나눠주고 싶었다.
묵직해진 비닐 봉투를 들고.
준후는 병동으로 복귀했다.
우선 스테이션 간호사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돌렸다.
“와. 선생님. 잘 먹을게요. 의국에서 쏘는 건가요?”
윤희가 아이스크림을 집으며 물었다.
“아뇨. 제 사비예요. 다들 고생하시잖아요.”
“역시 준후 쌤, 마음씨 넓은 건 알아줘야 해.”
“준후 쌤. 최고.”
“준후 쌤 없으면 진짜 무슨 낙으로 병동 일 한담.”
간호사들의 잇따른 간증(?)에 준후는 쑥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회생활을 하는 직장인들이 동료에게 바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아주 사소한 관심과 배려일 뿐이라고.
아이스크림 하나로.
스테이션 분위기가 이렇게 살아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드르르륵.
“아이스크림 드시면서 일하세요.”
준후가 당직실에 들어가서 외치자 스태프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준후에게 감사를 표시하며 맛깔나게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역시 10만 뉴튜버는 통이 커. 사비로 아이스크림도 다 사고.”
민경이 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말했다.
“돈을 잘 번다고 꼭 나누는 건 아니지 않을까요? 준후 선배가 착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은하가 쭈쭈바를 먹으며 말했다.
음식 취향만큼이나 아이스크림 취향도 각기 갈렸는데.
준후는 ‘진짜 보석바’라는 하드를 먹고 있었다.
단단한 촉감의 아이스크림을 준후는 좋아했다.
“바바박은 왜 사 왔어? 요즘도 바바박 먹는 사람 있어?”
콘 아이스크림을 뚝딱 해치운 민경이 탁자에 놓은 봉투를 살피며 물었다.
팥 아이스크림 바바박이 눈에 띈 모양이었다.
“이건 어르신들이나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인데.”
“혹시 몰라서요. 취향은 다양하니까요.”
“하와이안 피자 좋아하는 너처럼?”
“바바박하고 하와이안 피자를 같은 레벨로 두면 섭섭합니다.”
“뭘? 내 눈에는 다 똑같구만.”
“1퍼센트도 닮은 구석이 없거든요? 그 차이를 이해 못 하시면 곤란합니다.”
민경과 준후가 툭탁거리는 사이.
중환자실 라운딩을 마친 경수가 당직실로 돌아왔다.
간식 시간이라는 것을 듣고.
아이스크림 하나를 손에 쥐었다.
민경에게 구박받던 아이스크림, 바로 바바박이었다.
“준후 너랑 경수가 동기는 맞긴 하네. 음식 취향 마이너한 게 꼭 닮았어.”
민경은 웃으며 두 번째 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 * *
타다다다닥.
수술하느라 밀린 오더를 준후는 빛의 속도로 처리했다.
키보드 위에서 양 손가락이 현란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무림에서 기른 손재주.
양수 호박 기술을 완벽하게 터득하면서 얻은 왼손의 정교함.
덕분에 준후의 차트 입력은 눈 깜빡할 사이에 끝났다.
슬슬 피곤한데?
몸도 무겁고 머리도 무거워.
영양제 먹고 운기조식을 해야겠어.
준후는 책상 위에 있는 휴대용 약통으로 손을 뻗었다.
약통에는 준후가 미리 분류해 놓은 영양제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지이이잉.
가운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준후는 번호를 확인하고 통화를 연결했다.
“네. 선생님.”
-…….
“네. 네. 지금 확인해 볼게요.”
“뭐야? 응급실 콜?”
준후가 통화를 끊자 곁에서 업무를 보던 경수가 물었다.
“아니. 스테이션 콜이야. 잠깐 자리 좀 봐줘.”
준후는 노티 받은 환자의 차트를 쭉 훑고 해당 환자의 병실을 찾았다.
환자의 이름은 이정화.
올해 60세로 건강검진에서 촬영한 뇌 CT를 통해 ‘뇌동맥류’ 진단을 받았다.
이틀 뒤 코일 색전술 예정.
지병으로 고혈압과 당뇨가 있었다.
환자는 병실 침대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딸로 보이는 보호자도 보호자용 침대에서 휴대폰 삼매경이었다.
“안녕하세요. 환자분.”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근데 어쩐 일로…….”
환자가 준후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간호사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혈당 관리가 안 된다고 들었는데. 어제부터 혈당이 높더라고요.”
간호 기록지를 확인한 결과.
어제저녁과 오늘 오전, 오늘 오후에 측정한 환자의 혈당이 높았다.
당뇨약을 복용하고 있음에도 공복 혈당이 무려 180이나 나온 것이다. (정상은 100 이하)
이 상태가 유지된다면 수술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당뇨 환자의 경우.
수술 후 사망률이 정상혈당군에 비해 5배 가까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감염 및 혈관질환.
혈전(피딱지) 형성.
체액량 감소에 따른 혈압 감소 등등.
각종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혹시 중간에 간식 드시나요?”
“딱히 먹는 건 없어요. 과일도 안 먹고 과자도 안 먹고 탄산음료 같은 것도 안 먹어요.”
“…….”
“선생님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환자가 떳떳하게 말했지만.
준후는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환자가 종종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먹은 게 없다면 혈당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무언가를 드신 게 분명해요.”
“이상하네요. 딱히 먹는 게 없는데.”
“어제저녁부터 오늘 오후까지 먹은 음식을 전부 나열해 주시겠어요?”
“나열할 것도 없어요. 병원 밥밖에 안 먹었다니까요.”
준후와 환자의 문답이 지루한 평행선을 달렸다.
답답한 정체구간에 들어섰다.
그런데 바로 그때.
잠자코 있던 보호자가 나섰다.
“선생님. 혹시 제가 어머니한테 잼을 사드렸는데 그게 문제가 될 수도 있나요?”
“잼이요?”
보호자의 말에 준후는 경악했다.
잼이라면 과일에 설탕을 버무린 음식이 아닌가.
잼을 먹고 혈당이 안 오르길 바란다면 그건 치킨을 먹고 살이 안 찌길 바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환자분. 잼을 드셨으면서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다고 하신 겁니까?”
준후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잼을 먹긴 먹었는데요…….”
“…….”
“한 통을 다 먹어도 15칼로리밖에 안 된다고 적혀 있어서요. 15칼로리면 혈당은 거의 안 오르잖아요.”
환자가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개인 사물함에서 잼통을 꺼내서 내밀었다.
준후는 건네받은 잼을 살폈다.
상표 이름은 막(먹는)잼.
환자의 말대로 한 통을 다 먹어도 15칼로리밖에 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영양성분을 살피니.
요즘 제로 칼로리 감미료로 주목받는 스테비아가 사용되었다.
표기가 이렇게 되어 있으면.
환자 입장에서는 억울할 법도 했다.
“일단 잼은 제가 회수하겠습니다. 간식은 안 하신다니 식사는 평소대로 하시고요.”
“네.”
“저녁때 혈당 수치 다시 확인하고 이야기를 나눠보죠.”
준후는 보호자가 가진 잼 2통을 회수해서 병실을 빠져나왔다.
당직실로 향하는 내내.
준후의 눈길은 잼통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