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28화
제23장 사기꾼(3)
신경외과 컨퍼런스 룸.
책상에 앉은 준후는 환자에게 압수한 블루베리 잼통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 요물을 대체 어쩌면 좋을꼬.
잼의 영양 성분 중 주목할 만한 것은 당류였다.
막(먹는)잼은 100그람 당 3그람의 당류를 포함하고 있었다.
스테비아를 사용해서였다.
요즘은 제로 칼로리 음료수가 유행인데 이 잼도 그 유행에서 파생된 상품으로 보였다.
준후는 내친김에 해당 상품을 검색했다.
막잼은 인기폭발이었다.
저 칼로리 잼의 선구자 같은 느낌이었다.
덜 자극적이라서 맛있다.
당뇨 또는 내당증이 있는 사람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 등등.
수많은 리뷰가 잼의 인기를 간증하고 있었다.
보호자인 딸도 분명 이런 소문을 듣고 환자에게 잼을 선물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렇다면.
1) 업체에서 성분표로 사기를 쳤다.
2) 환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환자의 높은 혈당 수치를 두고 준후가 해석할 수 있는 방향은 두 가지였다.
드르르륵.
때마침.
컨퍼런스 룸 문이 열리고 은하가 안으로 들어왔다.
“선배. 말씀하신 혈당 측정기 챙겨왔어요.”
“땡큐. 이정화 환자 혈당은 어때?”
“저녁 공복 혈당은 80이에요.”
점심 식사 전 측정한 혈당에 비해 혈당이 2배 넘게 내려갔다.
정상수치였다.
하지만 준후는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환자가 몰래 먹던 간식을 중단했는지.
잼에 문제가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고맙다. 은하야. 이제 일 봐.”
“근데 선배. 혈당기는 왜 챙겨오라고 하셨어요?”
“혈당 좀 재려고.”
“혹시…… 당뇨 있으세요?”
은하가 부엉이처럼 동그란 눈으로 물었다.
심하게 충격받은 모습이었다.
본의 아니게 오해를 산 것 같아서 준후는 피식 웃었다.
“당뇨는 없는데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준후는 잼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은하에게 전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도 잼을 먹어보고 굳이 혈당까지 잴 필요가 있을까요?”
“당연히 직접 검증해 봐야지.”
“업체에서 당류로 장난을 쳤을 것 같지는 않아요. 요새 제로 칼로리나 저 칼로리 음식 많잖아요.”
은하는 업체 편을 들었다.
근거는 요즘의 제로 칼로리 유행과 막잼의 인기였다.
처치를 따르지 않는, 거짓말을 일삼는 일부 환자에 대한 불신도 근거 중 하나였다.
하지만 준후는 균형의 수호자였다.
환자의 말을 덥석 믿지 않았고.
업체의 말을 덥석 믿지 않았고.
심지어 은하의 말도 덥석 믿지 않았다.
믿기 전에는 충분히 의심을 해야 한다.
그것이 준후의 사고방식이었다.
무림에서 편견 때문에 크게 고생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혹시…… 선배…… 진짜…… 당뇨는 아니시죠?”
“아니라니까. 은하, 너 혼나볼래?”
“전 선배가 당뇨여도 괜찮아요. 제가 잘 관리해 줄 자신 있어요.”
“자꾸 이상한 소리할래? 일로 와. 이마에 딱 밤 한 대 맞자. 정신 번쩍 들게 해줄게.”
“히히히. 싫어요.”
준후가 일어서는 시늉을 하자 은하가 쌩 하니 당직실을 떠났다.
다람쥐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신속한 도주였다.
준후는 식전 혈당부터 체크했다.
(실험을 위해 네 시간 전부터 공복을 유지했다)
손가락을 소독하고 채혈침으로 푹 손가락을 찔렀다.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를 시험지에 묻힌 후 혈당기에 연결했다.
당뇨 환자분들도 참 고생이 많단 말이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이렇게 손가락을 찔러야 하니…….
혈당을 체크하면서 당뇨 환자들의 고충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준후였다.
채혈이 필요 없는 혈당기가 개발 중이고 일부 시판되고 있기는 하지만…….
갈 길은 아직 멀어 보였다.
삐비비빅.
잡념에 빠진 사이 나온 혈당 수치는 75mg/dl이었다.
당연하게도 정상 수치였다.
“보시다시피 정상이죠? 이번에는 잼을 한 통 다 먹고 혈당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혼잣말을 하며 준후는 맞은편에 놓인 거치대에 올라간 휴대폰을 향해 혈당기를 내밀었다.
현재 하고 있는 행동을 뉴튜브 업로드용으로 촬영 중이었던 것이다.
푹. 푹. 푹.
준후는 챙겨 온 숟가락으로 막잼을 한 통 다 퍼먹었다.
저칼로리 잼이라서 그런 걸까.
잼은 점성이 떨어져 흐물흐물했다.
물을 탄 것처럼 과일 맛이 흐리멍덩했다.
그런데도 달콤한 맛만큼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다음 혈당을 재기까지 1시간.
준후는 알람 타이머를 맞춰놓고 신경외과 교재를 공부했다.
시간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났다.
“이제 식후 혈당을 재보겠습니다. 1통을 다 먹어도 15칼로리밖에 안 된다고 했으니 혈당에는 변화가 없어야겠죠?”
준후는 아까처럼 혈당을 확인했다.
삐비빅!
혈당기에 수치가 떠올랐다.
* * *
다음 날.
오전 컨퍼런스와 회진이 끝나고 의국 스태프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외래 진료를 보는 교수는 외래로.
수술이 있는 교수는 수술실로 향했다.
레지던트들도 마찬가지였다.
“선배. 어제 실험은 어떻게 됐어요?”
당직실로 향하는 준후에게 은하가 물었다.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역시 환자가 몰래 간식 먹고 거짓말한 게 아닐까요?”
“아니. 문제는 업체에 있었어.”
대답하는 준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잼을 한 통 다 먹고 1시간 후.
측정한 준후의 혈당은 무려 160이 나왔다.
수치가 무려 85나 오른 것이다.
“정말요? 측정 잘못하신 거 아니에요?”
은하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환자들도 혈당 측정은 잘해. 근데 내가 실수했을 것 같아?”
“……설마 해서요. 그럼 이거 대형 이슈 아니에요?”
“대형 이슈 맞지. 쓰레기 같은 놈들, 장난칠 게 따로 있지.”
간악한 업체를 떠올리자 준후는 속이 불처럼 뜨거웠다.
업체는 소비자를 기만했다.
영양성분표를 거짓으로 작성했다.
15칼로리는 개뿔.
혈당을 보면 150칼로리는 너끈히 나갈 것 같은데 말이다.
특히 준후가 우려하는 부분은.
당뇨 환자가 막잼을 주기적으로, 또 장기적으로 먹는 것이었다.
안심하고 막잼을 먹다가.
당뇨가 더 심해질 수 있었으니까.
“근데 이상하네요. 스테비아를 썼다면 혈당이 안 올라야 정상일 텐데.”
“거짓말쟁이라는 게 들통났으니까 그 말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되지.”
준후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스테비아는 아주 조금 쓰고 사실 설탕을 더 많이 썼을 거야. 설탕이 훨씬 저렴하니까.”
“그러면 말이 되네요.”
“이 자식들,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지. 절대 그냥은 못 넘어가.”
준후는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악인들에게는 자비가 없는 준후였다.
잡초는 방치할수록 무성하게 자라지 않던가.
악당도 마찬가지였다.
뿌리까지 뽑아버리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기 마련이었다.
“경수한테 잠깐 늦게 들어간다고 말해줄래?”
“네. 선배.”
은하와 헤어지고.
준후는 당직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이정화 환자가 있는 병실을 찾았다.
“어제 했던 이야기를 계속 드리면…… 잼에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드신 잼은 저칼로리 잼이 아니라 고칼로리 잼이었네요.”
환자를 마주하고 준후는 어제 자신이 했던 실험을 설명했다.
“그렇죠? 선생님. 저 거짓말 안 했다니까요. 진짜 병원 밥하고 그 잼만 먹었어요.”
“…….”
“어제 오후부터 간호사 선생님이 저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시던데. 억울해서 죽을 뻔했어요.”
“너그럽게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설마 업체에서 이런 걸로 사기 쳤을 거란 생각은 못 했을 테니까요. 저도 같이 사과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이야 죄가 없죠. 오히려 전 감사해요. 덕분에 누명을 벗었으니.”
환자가 준후의 눈치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업체 말씀이시죠?”
“네. 따끔한 처벌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안심하세요. 저한테 찍혀서 편했던 사람은 없거든요. 그놈들은 뼈저리게 고통받을 겁니다.”
환자를 안심시키고 준후는 병실을 나왔다.
곧바로 업체 대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녹음 버튼을 켠 채로.
* * *
가산디지털단지의 한 빌딩.
6층에 거주 중인 스위트 헬시 본사.
-팀장님, 전화 한 통만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왜?”
사무실에서 근무 중이던 용현은 연결된 내선을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고객 응대 팀에 전화가 왔는데요. 한 고객이 저희 제품 칼로리를 가지고 꼬치꼬치 따지고 있대요.
“…….”
-책임자와 통화가 안 되면 매스컴에 접촉하겠다고 난리를 피운대서요.
“하…… 아침부터 별 이상한 새끼가 걸렸네. 알았어. 연결해 봐.
-감사합니다. 팀장님.
직원이 내선을 돌리는 동안.
용현은 전자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실내 금연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용현은 회사의 2인자였다.
1인자는 용현의 친형이었고.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네. 기획팀장 김용현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 들으셨을 테니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
-제품 영양 성분 제대로 표기하시고요. 정식으로 소비자에게 사과하고 배상도 하세요.
상대방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용현은 혀를 내둘렀다.
이거, 이상한 놈이 아니라 미친놈이었잖아?
다짜고짜 이렇게 뻔뻔한 소리를 한다고?
“이봐요. 우리 제품을 얼마나 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합니까?”
용현이 신경질을 내며 말을 계속했다.
-아주 잘~ 알죠. 제로 칼로리 유행을 등에 업고 칼로리를 속여서 소비자를 등쳐먹는 제품이라는 거.
“거 말이 너무 심한데?”
용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잼을 먹기 전과 먹은 후의 혈당을 체크해 봤습니다. 그런데 저칼로리라던 잼을 먹고 혈당이 85 가까이 오른 건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고객의 지적에 용현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보통 소비자는 그런 불편한 수고를 사서 하지 않았다.
유행이면 유행인가 싶어서.
사고나 성찰 없이 유행을 따르곤 했다.
그게 대중의 속성이었다.
제로 칼로리 탄산음료를 먹고.
혈당을 재본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용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직접 혈당 체크를 했다고?
지금까지 막잼을 먹은.
그 수많은 소비자가 하지 않았던 행동을?
그래서 용현은 살짝 긴장했다.
“잼을 빵에 발라 먹었거나 중간에 다른 음식을 먹으셨겠죠. 저희 잼은 한 통을 다 먹어도 15칼로리밖에 안 나옵니다.”
-…….
“연구실에서 다 증명한 사실이에요.”
-잼밖에 안 먹었는데요? 동영상으로 자료도 남겼는데요?
고객이 비웃듯이 말했다.
동영상까지 촬영했다고 하니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는 용현이었다.
하…… X발.
진짜 뭐 이런 게 다 있지?
-그리고 방금 말한 연구실. 당신네들 회사랑 관련 있는 곳 아닙니까? 검색하니까 제품 연구개발도 같이 한 곳이라고 나오던데.
“그래도 공신력 있는 연구실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막말하지 맙시다.”
-공신력이 아니라 친분이 있는 연구실이겠지.
고객의 목소리가 신랄해졌다.
고객이 조목조목 팩트만 말하고 있어서 용현은 곤란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그동안 쌓은 공든 탑이 무너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용현은 차라리 강하게 나갔다.
“당신 회사를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고 싶은 모양인데. 어림도 없어! 우린 한 푼도 못 줘!”
-…….
“계속 아가리만 털면 협박죄로 고소하는 수가 있어.”
-역시 너희들은 반성을 모르는 족속이군. 이럴 줄 알았어.
“뭐? 반성? 족속? 인마, 너 몇 살이야. 목소리 들어보면 어려 보이는데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것 같아?”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는 건 그쪽이 깨닫게 될 거야. 조만간 좋은 소식 기대하라고.
뚜우우.
뚜우우.
고객이 먼저 통화를 끊었다.
화딱지가 난 용현은 전자 담배 연기만 뻑뻑 내뱉었다.
“X발. 별 거지 같은 새끼를 다 보겠네. 어디 되먹지도 않은 협박을 하고 지X이야?”
용현은 한참 전화기를 노려보았다.
아주 조금 불안했지만.
저깟 놈이 뭘 할 수 있겠냐는데 라는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