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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129화 (128/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129화

제23장 사기꾼(4)

막잼 업체와 통화를 마친 후, 준후는 싸늘하게 웃었다.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서 쓰겠나.

대화를 녹음할 거란 생각은 못 했나 보지?

녹음한 통화 내역을 들어보니.

관계자가 준후를 블랙 컨슈머로 협박한 발언.

나이를 따져 물으며 퍼부은 폭언 등등.

좋은 증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녹음 파일은 여론전을 펼칠 때 큰 무기가 되어 주리라.

현재 준후의 가슴은 차가운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업체에 쓴맛을 보여주지 못하면 두 다리 펴고 잠을 못 잘 것 같았다.

계획은 이미 세워두었다.

그 계획대로 진행한다면.

업체는 조만간 모래성처럼 무너지게 될 것이다.

본인들이 저지른 파렴치한 죄를.

대중의 건강을 기만한 죄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머저리 같은 놈들, 사람 잘못 봤어.

건드릴 사람을 건드려야지.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부숴주마.

업체 생각을 잠시 중단하고 준후는 병실을 돌았다.

수술 동의서를 받기 시작했다.

검사 동의서는 인턴이 받지만 수술 동의서는 레지던트가 직접 받아야 했다.

신경외과 병동 환자의 질병은 다양했다.

뇌종양 환자.

뇌혈관 질환 환자.

척수 및 경추 질환 환자 등등.

그리고 수술 환자의 반응 또한 제각각이었다.

어떤 환자와 보호자는 운명을 받아들이듯 준후의 설명을 듣고 순순히 서명했다.

어떤 환자는 본인의 생존율과 수술 후 후유증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어떤 환자는 서명을 거절해서.

준후를 한참 동안 애먹였다.

하지만 준후는 결국 모든 환자에게서 수술 동의서를 받아냈다.

환자와 보호자의 말을 끈기 있게 들으며 공감해 준 덕분이었다.

환자들이 자기 생각만 한다.

환자들은 의학 지식에 무지하다.

환자들은 의사의 시점에서 생각할 줄 모른다 등등.

그렇게 환자를 무시하는 성향의 의사들이 간혹 있는데.

준후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과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아파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플 때는 온전한 정신과 판단력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을.

그래서 환자를 일반인처럼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 * *

“안녕하세요, 환자분.”

마지막 병실에 도착한 준후는 환자와 마주했다.

65세의 김철순.

환자는 뇌종양 중 하나인 교모세포종을 앓고 있었다.

교모세포종은 뇌종양 중 가장 악성이었다.

참고로 뇌종양은 다른 종양과 병기 분류가 달랐다.

폐, 위, 대장, 췌장 등등.

이런 장기들은 대부분 TNM(종양의 크기, 림프절 전이, 다른 장기로의 전이) 분류를 사용하지만.

뇌종양은 TNM 분류를 사용하지 않았다.

폐의 특성 및 크기에 따라 1등급부터 4등급으로 나누었다.

교모세포종은 4등급으로 최악의 뇌종양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환자가 어눌한 말투로 대답했다.

본인은 웃으려고 노력하는 듯했지만 정작 얼굴은 짜증을 내는 것처럼 일그러졌다.

뇌종양의 후유증 탓이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아들로 보이는 보호자도 준후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틀 뒤에 뇌종양 수술받으시잖아요. 동의서 받으러 왔습니다.”

“서…… 선생님. 다…… 다른 건 됐고.”

환자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나 딱 내년 겨울까지만 살고 싶어요. 그…… 그게…….”

“제 아내가 임신했거든요. 아이 출산하고 아이가 돌 치르는 것까지만 보고 싶다고 하시는 거예요.”

환자가 힘겹게 말을 하자 보호자가 대신 설명했다.

“내…… 내년 겨울까지는…… 살 수 있겠죠?”

준후를 올려다보는 노인의 눈빛에는 삶의 의지가 가득했다.

환자의 사연에 준후는 가슴이 뭉클했다.

살고 싶지만 더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인간으로서 그보다 처절하고 두려운 일이 또 있겠는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할 말을 곱씹고 곱씹던 준후는 결국 원론적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때가 가장 답답했다.

“그…… 그러니까 내년까지는…….”

“아버지 힘든데 말씀 그만 하세요. 어차피 수술받으셔야 하니까 사인하시고요.”

“그래도…… 내년…… 겨울.”

환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애잔했다.

“환자분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준후는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보호자를 응시했다.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뭐를요?”

“수술 후 생존율에 관해서요. 환자분이 알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요.”

“모르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요. 더 힘들어하실 것 같아요.”

“나 얼마나 살 수 있는지 알려…… 줘요. 안 그러면…… 사인 안 해.”

텔레파시라도 통했는지 환자가 먼저 생존율을 물어왔다.

“아버지. 자꾸 아이처럼 구실 거예요? 병원 선생님들이 알아서 해주실 거예요. 아버지는 수술만 받으시면 돼요.”

보호자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보호자를 야박하다고 탓할 일은 아니었다.

보호자는 단지 환자의 희망을 꺾고 싶지 않았을 뿐이니까.

“아…… 알려 줘. 사인 안 해.”

“휴. 미치겠네, 진짜. 선생님 그냥 말씀해 주세요.”

“그럼 겸사겸사 동의서 설명 진행하겠습니다.”

준후는 수술 과정 및 수술 후 발생할 수 있는 후유증 등을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슴 아픈 진실을 전했다.

“어르신이 궁금해하는 생존율은…… 이렇습니다.”

준후는 힘겹게 운을 뗐다.

교모세포종의 수술 후 생존율은 최악이었다.

1년 생존율이 50퍼센트.

2년 생존율이 7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순간 보호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생존율이 보호자의 예상보다 훨씬 낮아서 그런 듯했다.

하지만 대답을 듣고 나서.

환자는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환자는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동의서에 서명했다.

“치…… 칠 퍼센트면 충분해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준후는 동의서를 회수한 후.

환자의 앙상하고 주름진 손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삶을 포기하지 않은 노인의 모습이 투사처럼 보였다.

환자의 말이 옳을지 모른다.

어쩌면 7퍼센트의 확률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고 준후는 생각했다.

환자가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환자를 포기해선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에이 씨!”

보호자가 성질을 내며 병실을 떠났고.

준후는 그런 보호자를 뒤쫓았다.

“보호자분, 괜찮으십니까?”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이렇게 심각할 줄은 몰랐는데.”

보호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아버지를 병원에 너무 늦게 모시고 왔어요. 말을 더듬고 몸도 잘 못 움직이시길래 저는 아버지가 치매인 줄 알았어요.”

“…….”

“그래서 정신과 치료를 받게 했죠. 근데…… 근데…… 치매가 아니라 뇌종양이었어요.”

“…….”

“제가 빨리 발견만 했었더라도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

“보호자분 탓이 아닙니다.”

준후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호자가 자책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뇌종양은 원래 일찍 발견하기 힘든 질환입니다. 아버님 연세를 생각하면 치매와 헷갈리는 것도 당연해요.”

“몰랐다는 걸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나요?”

“못 받을 이유가 있습니까? 보호자분은 의사가 아니에요.”

준후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입니다. 앞으로 아드님께서 환자분에게 힘이 되어주시면 됩니다. 저도 최선을 다할 테니 부디 힘내세요.”

“못난 모습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고요.”

보호자는 담배를 한 대 피우겠다며 병동을 빠져나갔고.

준후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수술이야 집도의가 잘하겠지만.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부자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나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환자를 도울 수는 없을까.

그 길로 준후는 당직실에 돌아갔다.

순식간에 루틴 잡을 마쳤다.

이후 어제 촬영한 막잼 동영상을 뉴튜브에 업로드하고.

하나 남은 막잼은 외부 연구실에 성분 분석 의뢰를 위해 보냈다.

남는 시간에 준후는 신경외과 교제를 살폈다.

교모세포종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치…… 칠 퍼센트면 충분해.

공부하는 내내.

환자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반복 재생되었다.

수술까지 남은 기한은 불과 이틀.

이틀 후 숫자 7이 부디 희망과 행운의 숫자가 되기를 준후는 간절히 바랐다.

* * *

지이이잉.

오전 라운딩 업무를 위해 준후는 신경외과 중환자실을 찾았다.

중환자실은 일반 병실과 분위기부터 달랐다.

우선 활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환자들은 하나같이 의식이 없었으며 움직임도 없었다.

각종 기계 장치와 약물들로 생을 이어가고 있었다.

삶과 죽음 중.

환자들은 죽음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병실을 감싼 공기가 더 무겁고 침울하게 느껴졌다.

중환자실은 일반 병실과 냄새도 달랐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독한 소독약 냄새와 배변 냄새.

문드러진 살 냄새 같은 것이 코끝을 찔렀다.

역시 죽음과 가까운 냄새였다.

“선생님. 제가 도와드릴게요.”

준후는 간호사 경미를 발견하고 경미에게 다가갔다.

경미는 마침 환자의 체위를 변경하고 있었다.

욕창이 생길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욕창이란 환자가 한 자세로 오래 있으면.

압박으로 인해 혈액순환이 잘 안 되어 해당 부위가 괴사하는 질환이었다.

방치할 경우 피부가 약해지고.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패혈증까지 유발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선생님도 바쁘실 텐데. 그리고 체위 변경은 제 일인 걸요.”

“네 일, 내 일이 어디 있어요. 다 환자를 위해서 하는 거지.”

“방금 하신 말, 조금 멋있었네요.”

“조금이요? 많이가 아니고?”

준후의 농담에 경미가 배시시 웃었다.

“저도 나름 ICU 4년 차인데 선생님 같은 분은 처음 봐요. 환자도 성심성의껏 보고 저희 간호사들도 잘 챙겨주시고.”

“…….”

“심지어 힘들다는 내색 한 번 한 적 없고요. 비결이 있나요?”

“글쎄요. 두 가지 정도가 있는데 말씀드리긴 곤란하네요.”

준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운기조식과 영양제 조합으로 체력과 집중력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 덕에 탁월한 업무 처리 속도를 가진 것이다.

일을 번개처럼 해치워 버리니.

남는 시간에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었다.

“며느리가 와도 안 가르쳐 줄 겁니다.”

“칫, 야박하시다.”

“야박 말고 수박은 어때요? 저 수박 좋아하는데.”

분위기를 더 풀어보려고 재차 더 농담했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경미가 가자미처럼 게슴츠레 한 눈으로 준후를 쳐다보았다.

“흠흠. 체위 변경하는 환자 알려주시겠어요.”

“네. 선생님.”

준후는 경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환자들을 기억하고 체위 변경에 나섰다.

욕창은 엉치뼈, 넓적다리뼈, 무릎뼈 등등.

침상에 닿는 면적이 넓은 부위를 집중해서 봐야 했고.

현재 환자가 취하고 있는 자세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준후는 이를 토대로.

똑바로 누운 환자를 옆으로 눕히거나 침상 접촉면에 쿠션도 깔아주었다.

겸사겸사 욕창이 생긴 부위가 있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어렵지 않아서 처치는 금방 끝났다.

“이 환자는 못 보던 환자인데요?”

먼저 일을 마친 준후가 아직 체위 변경 중인 경미에게 다가가 물었다.

“흉부외과에서 전과한 환자예요. 오늘 오전에요.”

“선생님 힘으로는 벅차니까 제게 맡기시죠.”

준후가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환자는 40대 남성인데 체구가 비대했다.

눈대중으로도 100킬로그램은 족히 되어 보였다.

“안 그래도 선생님들 부르려고 했어요. 이 환자 체위 변경하려면 네다섯 명은 달려들어야 하거든요.”

“다들 바쁜데 고생할 필요 있나요. 저 혼자 할게요.”

“안 돼요. 그러다 선생님 허리 다쳐요. 이 환자 120킬로그램이란 말이에요.”

경미가 한사코 말렸지만 준후는 듣지 않았다.

준후는 손쓰는 일뿐만 아니라 힘쓰는 일에도 자신이 있었다.

이 정도면 굳이 내공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었다.

준후는 환자의 허리 틈으로 왼손을 넣었다.

오른손으로는 환자의 어깨를 잡았다.

휙!

환자를 측면으로 돌리는 일은.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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