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30화
제23장 사기꾼(5)
“와, 선생님. 힘이 천하장사네요? 이 환자를 한 번에 옮길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혼자서.”
놀란 경미가 눈을 깜빡거렸다.
처음엔 준후가 힘자랑을 하고 싶어서 오기를 부린다고 생각했건만 착각이었다.
준후는 말 그대로 힘이 셌다.
체구는 호리호리하지만 가운 안에 탄탄한 근육을 갖춘 듯했다.
“…….”
“…….”
스테이션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쪽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다들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이었다.
“요령하고 힘이 있으면 어렵지 않습니다…….”
“요령만 배우면 저도 이 환자를 혼자서 옮길 수 있나요?”
“아니요. 힘이 없어서 안 돼요. 저 따라 하면 허리 나가요. 경미 선생님은 다른 분들 도움을 받으세요.”
“하긴…… 그래야 될 것 같아요. 어쨌거나 선생님. 감사해요.”
경미가 찡긋 눈인사를 하고 스테이션으로 돌아갔다.
준후는 그때부터 본인 업무에 들어갔다.
중환자실 라운딩이었다.
보통 인턴이 일반 병실을 라운딩하고 레지던트 1년 차가 중환자실을 라운딩했다.
의식이 없는 환자들을 준후는 꼼꼼하게 살폈다.
폴리(도뇨 카테터) 소독 및 감염 여부 확인.
ICP(두개 뇌압) 모니터 감시.
각종 수액이 연결된 중심 정맥관 관리.
기관 삽관 부위 소독 및 관리 등등.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는 죽음이라는 낭떠러지에 몰려 있었다.
간호와 감시가 조금만 삐끗하면.
상태는 추락하듯 급속도로 악화됐다.
그래서 사소한 증상이나 징후 하나조차 놓칠 수 없었다.
중환자를 살피면서.
준후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쏙 빠졌다.
눈빛은 진지하고 날카로웠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육감.
발휘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은 예민할 대로 예민해졌다.
환자를 한 명 한 명 살피던 준후는 마침내 마지막 환자 앞에 섰다.
환자의 이름은 민태웅.
나이는 40세.
급성 뇌출혈로 응급실을 내원했으나 도착이 너무 늦었다.
스태프들이 응급 수술로 목숨은 살렸으나 환자는 2개월째 의식이 없었다.
즉, 식물인간 상태였다.
준후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식물인간은 대뇌의 기능만 정지한 상태였다.
자발적으로 호흡, 맥박, 혈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뇌사와 달리 의식을 차리는 경우가 있지만…….
그런 케이스는 극히 드물었다.
기적에 가까웠다.
대체 무슨 꿈을 꾸고 계십니까?
좋은 꿈입니까?
나쁜 꿈입니까?
환자 머리와 연결된 EEG(뇌전도, 뇌파검사) 모니터의 파동을 응시하며 준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준후가 응시하는 식물인간 환자의 뇌파는 정상인의 뇌파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 의사들은 이런 주장을 하기도 했다.
식물인간 환자에게도 의식이 있을 수 있다고.
하지만 준후는 아직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식물인간 환자가 회복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식물인간 환자의 회복.
뇌사 환자의 회복.
이 두 가지는 세계에 있는 모든 신경외과 의사들이 풀지 못한 난제였고.
갓 레지던트 1년 차가 된 준후에게는 해결하기 너무 버거운 숙제였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지금은 못하더라도.
언젠가 식물인간 상태와 뇌사 상태를 정복하겠어.
칼에 베인 듯 아리는 통증을.
준후는 긍정적인 감정으로 승화시켰다. 포기라는 단어는 적어도 준후의 사전에는 없었다.
* * *
인간적인 감정을 잠시 접어두고.
준후는 식물인간 환자의 상태를 냉정하게 살폈다.
활력 징후(체온, 혈압, 맥박, 호흡)는 대체로 무난했다.
체온만 문제였다.
38도로 발열이 있었다.
뇌압은 정상이었고 산소포화도는 97퍼센트로 정상 범주였다.
이윽고 준후의 시선이.
환자의 목에 삽입되어 있는 튜브에 머물렀다.
가래 배출을 위해 삽입해놓은 것이었다.
준후는 튜브에 튜브를 연결했다.
쎄에에에엑!
공기의 파열음과 함께 끈쩍하고 탁한 가래가 딸려 나왔다.
이어서 준후는 환자의 옷 상의를 풀어헤쳤다.
목에 걸고 있던 청진기를 환자의 가슴에 댔다.
호흡음은 깨끗하게 들렸다.
그런데도 준후는 내공으로 청각을 증폭해 호흡음을 다시 청진했다.
보글보글.
희미하게 공기 방울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악설음(crackle) 또는 수포음이라고 불리는 소리였다.
“선생님, 진료가 너무 느려요. 거북이가 친구하자고 그러겠어요.”
청진기를 다시 목에 거는데.
등 뒤에서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경숙이 서 있었다.
서경숙.
일주일 전, 중환자실 근무를 시작한 주임(책임) 간호사였다.
나이는 40대 후반이었다.
“느린 게 아니라 꼼꼼한 겁니다. 중환자실 환자를 일반 환자랑 똑같이 보면 되겠어요?”
“저희 간호사들이 간호하고 주기적으로 노티도 하잖아요. 조금 전에 경수 선생님이 한 번 보고 가기도 했고요.”
“…….”
“쉬고 싶으면 그냥 휴게실에서 쉬세요. 애써 환자 보는 척할 필요 없으니까.”
경숙의 말에 준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쯤 되면 시비를 건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아니면 레지던트 1년 차인 준후를 길들이고 싶은 의도가 있는지도 몰랐다.
병원 근무 경력만 따진다면 준후는 경숙을 따라갈 수 없었다.
“주임 간호사라고 해도 말은 가려서 하시죠?”
“에이. 제 경력에 이 정도 말도 못 하나요?”
경숙이 빈정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이 환자 별 이상 없어요. 그리고 어차피 식물인간 상태잖아요? 체위만 적당히 바꿔주면 된다고요.”
“선생님은 성격이 낙천적인 겁니까? 아니면 선생님이야말로 환자 관리를 하기 싫은 겁니까?”
“뭐라고요? 선생님, 방금 뭐라고 했어요?”
준후의 말에 경숙이 도끼눈을 떴다.
둘 사이가 심상치 않자 스테이션에 있던 경미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두 분 다 왜 이러세요. 중환자실에서 싸우시면 안 돼요.”
경미가 두 사람을 중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번 붙은 불은 꺼질 줄 몰랐다.
“환자의 상태가 언제 악화될지 모르니까 긴장하고 또 긴장해야 하는 곳이 중환자실 아닌가요? 그런데 서 선생님 태도는 너무 느긋하네요.”
준후는 역으로 경숙에게 한 방 먹였다.
“그럼 식물인간 환자한테 뭘, 얼마나, 어떻게 더 해줘야 하는 건데요?”
경숙이 붉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우리도 할 만큼 하고 있다고요.”
“할 만큼 하는데 폐렴 의심 증상이 있어도 노티를 안 합니까?”
“참 나. 말싸움에서 질 것 같으니까 없는 병도 만드네요. 준후 선생님, 그렇게 안 봤는데.”
“아뇨. 서 선생님이 있는 병을 못 본 겁니다.”
“환자가 폐렴이라는 증거는요?”
“환자는 체온이 38도고 탁한 가래가 끼었습니다.”
“오래 입원하면 그 정도 증상은 있을 수 있어요.”
“청진기로 수포음도 들었는데요?”
준후는 물러서지 않고 대답했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이 기회에 자신이 경숙을 길들이고자 했던 것이다.
“경수 선생님도 청진했어요. 경수 선생님은 아무것도 못 들었다고 했어요.”
“경수는 경수고 저는 접니다. 두 시간의 텀 동안 환자 증상이 악화됐을 수도 있고요.”
“…….”
“CBC(전혈검사)랑 객담 검사, 흉부 엑스레이 오더 낼 테니까 누구 말이 맞는지 확인합시다. 그럼 불만 없죠?”
“좋아요. 대신 준후 선생님이 망신당해도 난 몰라요?”
“제가 망신을 당한다고요? 선생님이 아니고요?”
준후가 경숙을 비웃었다.
정해진 운명을 정숙만 모르고 있었다.
* * *
중환자실 스테이션.
준후는 책상에 앉아 식물인간 환자의 간호 기록지를 보고 있었다.
환자는 오전부터 38도의 체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받은 처방이라곤 달랑 해열제 처방 하나뿐이었다.
점심에는 diarrhea(설사)를 한 번 했다.
발열. 탁한 가래. 수포음. 설사.
환자의 모든 증상은 폐렴을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만 더 환자에게 신경 썼다면.
조금만 더 환자를 주의 깊게 봤다면 충분히 알아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동기인 경수도.
주임 간호사인 경숙도 말이다.
둘 다 환자가 식물인간 상태라서 방심한 모양인데…….
그건 착각이고 오산이었다.
식물인간 환자야말로 더 세심한 관찰이 필요했다.
“선생님. 이쪽으로 오세요. 검사 결과 나올 때 됐습니다.”
준후는 자신의 자리로 경숙을 불렀다.
경숙이 기다렸다는 듯 쪼르르 달려왔다.
다른 간호사들도 결과가 궁금한지 근처를 기웃거리거나 시선을 던졌다.
“근무 기간으로 따지면 제가 선생님보다 중환자실에 오래 있었거든요? 간호사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저는 간호사 선생님들 무시한 적 없습니다. 오히려 서 선생님이 절 무시하면 했지.”
“됐고. 빨리 검사 결과나 봐요.”
경숙의 재촉에 준후가 검사 결과를 띄웠다.
먼저 흉부 엑스레이 영상부터 확인했다.
영상에 이상은 없어 보였다.
“뭐에요? 멀쩡하잖아요.”
“이게 멀쩡해 보입니까? 서 선생님 눈이 멀쩡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준후는 환자의 좌측 폐를 확대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10번 갈비뼈 부근을 확인했다.
영상이 줌인 되면서.
해당 부위에 구름처럼 하얀 음영이 퍼져 있었다.
폐포성 음영.
명백한 폐렴의 증거였다.
혈액검사와 객담 검사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식물인간 환자는 초기폐렴을 앓고 있었다.
준후의 꼼꼼한 진찰.
특히 청각을 증폭해서 얻은 청진음이 한 건 해낸 것이다.
본디 초기 폐렴은 감기와 증상이 비슷해서 감별이 쉽지 않았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경숙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호언장담을 했음에도.
준후의 진단에 밀리자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눈으로 직접 보고도 우길 겁니까? 환자 멀쩡하다면서요?”
“…….”
“뭐라고 말 좀 해보시죠?”
지은 업보가 있어서 경숙은 대답을 못 했다.
경력이 자신보다 한참 떨어지는 후배들 앞에서 이런 개망신을 당할 줄이야.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었다.
경숙의 낯은 차차 치욕의 붉은 빛으로 물들어갔다.
경숙은 이런 그림을 원한 적이 없었다.
경숙이 원한 그림은.
후배들 앞에서 레지던트 1년 차를 꼼짝없이 길들이는 것이었다.
“그게…… 초기 폐렴은 발견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그래요.”
경숙이 가까스로 입을 뗐다.
“그럼 애초에 감기가 의심된다고 노티하던 가요. 아니면 최소한 환자가 멀쩡하다는 소리는 안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
“주임 간호사인 선생님이 이러면 다른 선생님들이 뭘 배우겠어요?”
준후의 말이 경숙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하지만 전부 맞는 말이라 대꾸나 반박을 할 수 없는 경숙이었다.
“서 선생님이야말로 앞으로 환자 관리 똑바로 하세요. 아셨습니까?”
“…….”
“호흡기 내과 컨설턴트(협진) 내서 폐렴 치료할 테니까 그렇게 아시고요. 1시간마다 바이탈 체크하세요.”
준후는 경숙을 따끔하게 꾸짖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흉부 촬영을 마친 식물인간 환자가 중환자실에 들어오고 있었다.
준후는 환자에게 다가갔다.
환자를 내려다보다가 환자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문득 성호의 모습이 환자에게 겹쳐졌다.
보호자분들이 애타게 환자분의 복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잠을 자고 있다면 깨어나세요.
소중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세요.
준후는 닿을 수 없는 진심을 환자에게 전했다.
환자가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보호자가 환자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준후도 환자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환자가 스스로를 포기하고.
보호자가 환자를 포기하더라도.
준후만큼은 환자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환자가 기댈 곳은 결국 의사뿐이었으니까.
지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콜폰.
전화를 받자 2년 차 민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후야, 어디야?
“중환자실이요. 라운딩 끝내고 복귀하려는 중입니다.”
-그럼 곧장 수술실로 와. 설명은 나중에 할게.
예정에는 없던 수술실 호출이라.
무슨 문제라도 터진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