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33화
제24장 훈련(3)
-똥줄이라니요. 말이 좀 지나치신 것 아닙니까?
“됐고. 저번에 저랑 통화하셨던 그분 맞죠?”
-네. 스위트 헬시의 기획팀장 최용현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준후는 확인 차 상대의 이름을 한 번 더 물었고 상대방이 소속과 이름을 말했다.
딱 하루가 지났을 뿐이거늘.
용현의 목소리는 한없이 겸손해져 있었다.
준후를 상전처럼 떠받들어 모시고 있었다.
막잼 폭로 영상을 본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준후가 의사라는 사실도 아는 눈치였다.
“잘 부탁드리고 자시고 할 게 있는 사이인가요? 저희가?”
준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바쁘니까 용건만 말하고 끊으세요.”
-한창 바쁘실 텐데 실례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씀드리죠. 막잼 폭로 영상 내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용현은 한없이 비굴한 자세로 나왔다.
모가지를 뻣뻣하게 쳐들고.
콧대를 세울 땐 언제고.
자기들 제품이 난타를 당하니까 그제야 공손하게 군다라…….
부침개처럼 쉽게 뒤집히는 용현의 태도가 불쾌했다.
속이 울렁거리고 구역질이 났다.
“거절하겠습니다. 본인들 제품에 자신 있으면 반박 영상 올리세요. 그럼 사람들은 저를 손가락질할 테니까요. 제 말이 잘못됐나요?”
-…….
“팀장님이 막잼 먹고 혈당 체크해 보시죠.”
-허허허. 서로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어렵게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용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요약하자면 이랬다.
준후가 폭로 영상을 내리고 용현이 준비한 자료로 새 동영상을 올리면 거액을 보상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돈이나 처먹고 입을 다물라는 겁니까?”
-꼭 그렇게 과격하게 해석하실 필요 있습니까? 쉬운 길을 가자는 뜻이지요.
“그럼 얼마까지 주실 수 있는데요?”
-하하하. 현명한 판단을 하실 줄 알았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천만 원까지 고려하고 있습니다만…….
“천만 원이요?”
준후의 목소리에게 가시가 돋쳤다.
이에 용현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기…… 긴급회의 때 나온 금액이고요. 원하신다면 더 올려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까지냐고요.”
-……이 천만 원까지 힘 써보겠습니다.
“사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준후는 용현의 제안을 단박에 내동댕이쳤다.
준후가 바라는 것은 정의구현이었다.
업체에게 더러운 돈을 뜯어내는 게 아니었다.
돈 이야기를 길게 했던 이유는…….
단순히 용현을 약 올리기 위해서였다.
-하…… 미치고 팔짝 뛰겠네, 진짜. 선생님, 좋게좋게 가시죠. 진짜 저희랑 싸우실 겁니까? 자신 있으세요?
용현의 목소리가 돌연 변했다.
협박을 하는 듯한 강압적인 기운이 담겨 있었다.
역시 제 버릇은 남을 못 주는 법.
수가 뒤틀리니 바로 본성이 튀어나오는 용현이었다.
준후 입장에서는 용현이 가소롭기만 했지만.
-변호사 선임하고 법정으로 가면 선생님이 저희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제가 진다고 확신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의사라서 세상 물정을 모르시나 본데. 이러면 선생님만 피곤해진다고요.
“아무렴 그쪽만큼 피곤하겠어요? 나야 당신들만 상대하면 되지만 당신들은 폭로 영상을 본 80만 명을 상대해야 할 텐데?”
-끝까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저희도 가만 안 있습니다. 단순히 으름장을 놓는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시든가, 말든가.”
준후는 냉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지리멸렬한 대화의 마침표를 찍을 때가 되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 전화 주셔서 감사하네요.”
-네? 갑자기?
“방금 통화한 내용도 다 녹음했거든요. 저번에 통화한 내용이랑 같이 뉴튜브에 올리면 딱일 것 같네요.”
-…….
“조회수를 한 번 더 빨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뉴튜브 각 챙겨줘서 고맙다고요.”
-이런 씹ㅅ…….
“왜요? 하던 말씀 계속하시죠? 녹음하고 있다니까 쫄립니까?”
-…….
“할 말 없으면 끊습니다.”
뚝!
먼저 통화를 종료한 후 준후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오늘 밤은 두 다리를 뻗고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 *
통화가 끝난 후 용현은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쾅!
책상 앞에 놓여 있던 쓰레기통을 발로 걷어찼다.
휴지와 담배꽁초가 어지러이 바닥을 뒹굴었다.
지가 의사면 다야?
어린 새끼가 못돼 처먹어서는 사람을 가지고 놀기나 하고 말이야.
업무를 보는 자리에서.
전자 담배를 한 대 다 태웠음에도 용현은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씩. 씩. 씩.
콧구멍에서 더운 김이 쏟아졌다.
“팀장님, 어디 가시게요?”
용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 직원이 용현에게 물었다.
“당연히 사장실이지. 넌 생각이 없냐? 지금 비상사태인 거 몰라?”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짓은 처음부터 하지를 마.”
쌀쌀맞게 대답하고 용현은 사무실 북쪽에 위치한 사장실로 들어갔다.
스위트 헬스의 사장이자 용현의 친형인 용욱은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형. 지금 팔자 좋게 신문이나 보고 있을 때야?”
“왜 또 시비인데?”
“대학병원 의사 새끼가 우리 잼 폭로 영상 올렸다고. 하루 만에 조회수 80만을 찍었어.”
용현은 인상을 확 찡그리고 용욱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건 아는데 네가 잘 해결할 줄 알았지. 안 통했어? 돈 준다는데도?”
“돈은 필요 없대. 끝까지 가겠대.”
“별종이네. 돈을 마다하다니.”
“지금 남 이야기하듯 할 때가 아니잖아!”
용욱의 유체이탈 화법에 용현은 버럭 성질을 냈다.
SNS 스타들에게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가며.
막잼을 홍보한 지 2년째.
스위트 헬시는 최근에야 가까스로 다이어트 잼 1위를 차지했다.
본전을 뽑으려면 이제부터 시작이건만…….
하필 가장 중요한 시기에 악재가 터졌다.
“어쩐지 설탕을 섞기 싫더라니.”
“원가 절감해서 좋다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합의가 안 됐으면 사과문을 올리는 게 좋겠지?”
용욱이 체념한 기색으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사과하면 우리 망해. 기존 제품 다 회수하고 배상금도 물어줘야 한다고.”
“그래도 그게 깔끔하지 않겠어?”
“깔끔은 개뿔. 거지로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하든가.”
“왜? 넌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으면 좋겠어?”
“당연하지. 원래 싸움은 먼저 눈 피하는 놈이 지는 거고, 먼저 고개 숙이는 놈이 지는 거라고.”
용현은 빠르게 잔머리를 굴렸다.
하늘이 무너졌지만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건 아니었다.
회사와 협력 관계를 맺은 연구실에 성분 분석을 의뢰하고 성분표를 조작한다면 말이다.
여론을 충분히 반전시킬 수 있었다.
-막잼에 영양 성분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최근 퍼지고 있는 폭로 영상은 거짓입니다.
-해당 뉴튜버는 막잼을 먹고 난 후 다른 음식을 먹었고, 그 부분을 편집해서 잘라냈기에 혈당이 오른 겁니다.
-녹음 파일 또한 사실이 아닙니다. 본사에서는 사건을 조속히 마무리하고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제안했을 뿐입니다. 지금은 그 어리석음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론전을 펼친다면.
이번 논란을 진흙탕으로 끌어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대중들은 이번 사건을 기억 못 하게 되리라.
“형은 내 말만 들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용현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피어났다.
* * *
-선생님. 스테이션에 선생님 우편물 도착했는데요?
“네. 지금 갑니다.”
통화를 끊고 준후는 곧장 당직실을 나왔다.
스테이션에서 우편물을 받아 당직실로 돌아왔다.
찌이이익.
우편 봉투를 찢자 곱게 접힌 4매의 인쇄용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 급하게 의뢰한 막잼의 성분 분석표였다.
성분 분석표를 빠르게 훑던 준후의 시선이 한 지점에 머물렀다.
[당류: 100g당 35g]
다른 부분은 볼 필요도 없었다.
이 부분이 노른자였다.
막잼의 자체 성분표에 따르면.
막잼에는 100g당 1g의 당류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준후가 의뢰한 결과보다 무려 35배나 낮은 수치였다.
업체의 성분표.
그리고 준후가 손에 쥔 성분표.
양극단의 수치를 보여주는 두 성분표 중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일까.
진실은 두말할 나위 없이 후자였다.
막잼을 먹고 난 후.
준후와 입원 환자의 혈당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으니까 말이다.
어제오늘 수집한 업체와의 통화 내역.
방금 받은 막잼의 성분 분석표.
이 두 가지로 뉴튜브 영상을 제작한다면 업체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들, 사람 잘못 건드렸어.
난 한 번 찍은 악당은 지구 끝까지 쫓아가거든.
준후는 업체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드르르륵.
때마침 당직실 문이 열리고 은하가 들어왔다.
“은하야.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선배 부탁이라면 무조건이죠.”
“시간 날 때 챌린지 영상 좀 찍어줬으면 좋겠어.”
준후는 챌린지 영상에 대해 설명했다.
챌린지 영상이란 다름 아닌 막잼 챌린지였다.
막잼을 먹기 전 혈당.
막잼을 먹고 난 후의 혈당을 비교하는 챌린지였다.
준후는 이번 논란에 장작을 추가하고 싶었다.
열기가 쉽게 꺼지지 않도록.
막잼 챌린지 영상에 선한 영향력을 설명한다면 많은 사람이 참여해 줄 것이고.
스위트 헬시의 사악함도.
만천하에 퍼지게 될 것이다.
챌린지를 위해서는 막잼을 구매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상관없을 듯했다.
업체에서 얻는 이득은 미미할 것이다.
잼이 얼마 더 팔리는 것보다.
장사를 접는 게 더 큰 타격일 테니까.
“지금은 바빠서 힘들고. 오후쯤 촬영해도 될까요?”
“괜찮아. 편할 때 부탁할게.”
“천만에요.”
은하가 찡긋 윙크를 했다.
그리고 당직실에서 잠깐 업무를 보다가 떠났다.
그 빈자리를 메운 사람은 응급실 진료를 마치고 돌아온 경수였다.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아니었을까.
경수의 복귀가 빨랐다.
“다행히 별일 없었나 보네.”
“당연하지. 난 누구처럼 환타가 아니니까.”
환타는 ‘환자를 타는 의사’를 뜻하는 줄임말이었다.
쉽게 말하면 환자를 몰고 다니는 의사라는 말이었다.
준후는 언젠가부터 의국에서 환타로 찍혔다.
준후가 근무할 때.
수술이 필요한 응급환자가 응급실에 유독 자주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네가 몰라서 그래. 사실 환타는 좋은 거야.”
“환타가 좋다고?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지?”
경수가 준후 옆자리에 앉아서 물었다.
“응급환자를 많이 볼수록 의사로서의 경험치가 올라가잖아. 그런 의미에서 환타에도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는 거지.”
“그 말, 다른 선배들 앞에서도 할 수 있겠어?”
경수의 지적에 준후는 멋쩍게 웃었다.
솔직히 선배들 앞에서 했다간 한 소리를 들을 말이긴 했다.
준후가 특별한 케이스일 뿐.
응급환자를 좋아하는 외과의는 세상천지에 누구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넌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하냐?”
경수가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준후에게 물었다.
“그렇게 사는 게 어떻게 사는 건데?”
“레지던트 일하고. 개인 공부하고. 후배들 챙겨주고. 환자랑 보호자들까지 챙기잖아. 넌.”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준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피곤해도 보람이 있는 일이니까. 난 환자를 치료하고 주변 사람을 보살필 때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껴.”
“명의 나셨네. 명의.”
오늘은 어쩐지 경수와 그럭저럭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들던 그때.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병동 복도에서 고함을 치고 있었다.
준후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밖에 무슨 일 있어?”
“보호자가 간호사를 잡고 컴플레인을 걸더라. 보호자 성격이 괄괄해 보이던데 똥 밟았지.”
“잠깐 나갔다 올게.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겠다.”
“얌전히 있어. 괜히 오지랖 부리지 말고.”
경수가 점잖게 준후를 타일렀다.
“좋은 일도 한두 번이지. 계속 나서면 나중에 피를 보는 건 너야.”
“오지랖이 아니라 병동 관리거든? 병동 관리도 1년 차 업무인 거 몰라?”
“하지만 간호사와 보호자 사이에 벌어진 일이기도 하지. 알아서 해결하게 내버려 둬.”
“…….”
“한 번 나서면 사람들은 계속 너만 찾게 될 거야.”
“나도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이 자리까지 왔어. 그때 받은 도움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건 당연해.”
산다는 건.
타인과 크고 작은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라고 준후는 생각했다.
하물며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 자신과 함께 환자를 관리하는 간호사라면.
두말할 나위 없이 나서는 게 옳았다.
세상이 제아무리 흉흉해졌다고 한들 타인을 향한 배려와 관심이 어찌 오지랖이 되겠는가.
이는 오히려 의사로서 갖춰야 할 덕목이었다.
준후가 앞으로도 잊지 않아야 할.
또는 잃지 않아야 할 덕목이기도 했다.
“너 좋을 대로 하셔. 천하의 서준후를 누가 말리겠어.”
“너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냐?”
“칫. 내가 널 왜 걱정해?”
경수가 토라진 얼굴로 준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금방 해결하고 올게.”
준후는 당직실을 나와 병동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현장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귀부인처럼 차려입은 여성이 복도 중간에서 고래고래 악을 질렀고.
그 앞에 선 간호사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보호자가 화를 낼만 한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본인 성질을 못 이겨서 간호사를 괴롭히는지는.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