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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134화 (133/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134화

제24장 훈련(4)

“보호자분, 진정하시고 자세한 사정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준후는 사건 현장으로 이동해 보호자의 맞은편에 섰다.

간호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소한 행동이었지만 보호자의 폭언과 폭행으로부터 간호사를 보호하겠다는 의미가 있었다.

“아, 글쎄요. 선생님. 간호사가 저희 아들한테 말을 함부로 하잖아요.”

“아드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기우요.”

환자의 이름을 듣는 순간.

준후의 안면 근육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기우.

20대 초반에 껄렁껄렁한 환자.

마약성 뇌출혈과 뇌혈종으로 입원한 환자.

오늘 오전 부로 ICP 모니터링을 끝냈고 내일 퇴원이 예정된 환자였다.

“이제야 보호자분 얼굴을 뵙네요. 주치의 서준후라고 합니다.”

“호호호. 요 잘생긴 선생님이 주치의셨구나. 배우 하셔도 되겠다.”

보호자가 푼수처럼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해외여행 중이었는데 기우가 다쳤다고 해서 급하게 귀국했지 뭐예요?”

“…….”

“정말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저희 남편은 보셨죠?”

“네. 몇 번 뵙고 인사도 드렸습니다.”

지난 며칠간 환자의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환자의 곁을 지켰는데.

아버지 쪽은 어머니 쪽과 성격이 정반대로 말수가 적은 걸 넘어서 말이 아예 없었다.

“그건 그렇고 혹시 간호사 때문에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말도 마세요. 불쾌해 죽는 줄 알았으니까. 어휴, 짜증 나.”

보호자의 말이 이어졌다.

보호자의 주장은 즉.

간호사가 환자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는 것이다.

환자가 오늘 병동 생활 도중 술을 마셨다고.

“아니, 입원해서 술 마시는 몰지각한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근데 우리 아들을 그런 저급한 인간 취급하니 제가 참겠어요?”

보호자는 씩씩거리며 준후 뒤에 있는 간호사를 노려보았다.

“저 간호사 당장 잘라주세요! 안 그러면 저 병원장한테 가서 따질 거니까.”

“조금만 마음을 가라앉히시죠. 간호사 이야기도 들어보죠.”

준후는 뒤로 돌아 간호사를 바라보았다.

간호사의 이름은 양윤희.

윤희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이 상황이 분한지 이따금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간호사 상의 부분이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는데 보호자에게 멱살도 잡힌 것 같았다.

“양 선생님. 어떻게 된 거죠?”

“3시간 전에 환자 바이탈을 재러 갔는데 술 냄새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환자분한테 혹시 술을 마셨냐고 물어봤어요.”

“환자는 뭐라고 하던가요?”

“자기는 마신 적 없다고 펄쩍 뛰더라고요.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 나왔는데.”

윤희가 억울해하며 말을 이었다.

“환자가 제 이야기를 보호자에게 전했나 봐요. 그때부터 보호자분이 저한테 따지기 시작했어요.”

양쪽의 이야기를 다 듣고서 준후는 마음을 정했다.

윤희의 편을 들기로.

환자가 이기우라면.

병실에서 술을 마시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약도 했는데 병실 음주쯤이야 별 일탈로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준후는 보호자의 무례한 태도도 불만이었다.

사실관계를 파악하기보다는 무조건 자기 아들부터 감싸지 않았던가.

윤희를 하인처럼 여기지 않았든가.

윤희도 윤희 가족에겐 소중한 딸인데 말이다.

“선생님. 언제까지 시간 끄실 거예요? 빨리 간호사 잘라달라고요.”

보호자가 준후를 독촉했다.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는 듯 쿵쿵 발을 굴렀다.

“일단 다 같이 병실로 가실까요?”

“병실은 왜요?”

“아드님의 억울한 사정도 직접 들어보고 싶어서요.”

“설마 선생님까지 제 아들을 의심하는 건 아니겠죠? 우리 기우가 얼마나 착한데요.”

“보호자님을 보니까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가시죠.”

준후가 반어법을 사용했지만 보호자는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어쨌거나 준후는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었다.

조용히 윤희를 곁으로 불렀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선생님. 이기우 환자, 병실에 누가 왔다 갔나요?”

“친구분이 면회 왔었어요.”

“그럼 술은 친구가 전달했나 보네요. 혹시 친구가 들어올 때랑 나갈 때 눈여겨보신 점이 있나요?”

“으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갔던 걸로 기억해요.”

“그럼 술은 주머니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팩으로 챙겨온 것 같은데.”

“…….”

“면회는 몇 분 정도 했나요?”

“한 10분 정도 였던 거 같아요. 짧았어요.”

“환자는 병실에 계속 있었나요?”

“제 기억으로는 그래요.”

“생각을 좀 해봐야겠네요.”

준후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환자의 음주 여부를 밝히기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가장 좋은 건 음주 측정이었지만.

환자와 보호자가 길길이 날뛰면 강제할 방법이 없었다.

설령 측정을 한다고 한들.

3시간 전이라서 혈중 알콜 농도가 다 떨어져 있을 수도 있었다.

여러모로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괜히 제 편들었다가 욕먹는 거 아니에요? 선생님한테까지 폐를 끼치긴 싫은데…….”

“선생님. 억울하죠? 진실을 밝히고 싶죠?”

“그야 당연하죠. 울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고요.”

“선생님 누명, 잘하면 제가 벗겨드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떻게요?”

“금방 알게 될 겁니다. 우리 둘이 보호자한테 시원하게 한 방 먹여주자고요.”

준후는 빙긋 웃으며 환자의 병실로 들어갔다.

* * *

1인실인 622호실에서 4자 대면이 이루어졌다.

병상에 누운 환자와 그 곁을 지키는 보호자.

그 맞은편에 선 준후와 간호사 사이에서 냉랭한 기운이 흘렀다.

대체 무슨 생각이시지?

윤희는 곁에 선 준후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아까부터 억울해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환자가 음주를 했다며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는 간호사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윤희는 그저 환자에게 술 냄새가 나서 술을 마셨냐고 물어봤던 것뿐이었다.

다른 행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환자는 보호자에게 쪼르르 달려가 그 사실을 일러바쳤다.

그 때문에 윤희만 나쁜 사람이 되었다.

폭언과 욕설을 듣고 멱살까지 잡혔다.

이러려고 간호사가 된 게 아닌데.

자괴감과 억울함.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윤희는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

다만 문제는…….

이제 그 불똥이 준후에게도 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준후는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까.

“환자분. 떳떳하시죠?”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준후가 먼저 운을 뗐다.

“뭐가요?”

“술 안 드셨으니까 떳떳하냐고 물어본 겁니다.”

“네.”

환자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환자분의 무죄를 증명해도 되겠죠?”

“어떻게요?”

“병실 소지품 검사 좀 하겠습니다.”

준후의 선언에 윤희는 화들짝 놀랐다.

음주 측정이 안 된다면 소지품 검사를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양날의 검이었다.

만약 보호자가 벌써 소주병을 치웠다면?

소지품 검사를 했는데 소주병이 나오지 않는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선생님. 너무 멀리 가셨어요.”

윤희는 준후의 가운 자락을 잡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아니요. 다 왔어요. 조금만 참으세요.”

준후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

“아니, 선생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소지품 검사가 화제로 떠오르자. 기다렸다는 듯 보호자가 나섰다.

성난 얼굴로 준후를 노려보았다.

“지금 저 간호사 편들려고 병실까지 왔어요? 하…… 어이가 없네?”

“아니, 떳떳하다면 소지품 검사가 무슨 문제가 됩니까? 아무것도 안 나오면 아드님이 결백한 거 아닙니까?”

“……좋아요. 대신 제 아들이 결백하면 책임은 단단히 지셔야 할 거예요. 기우야? 정말 문제없지?”

“당연하죠. 저 못 믿으세요?”

“두 분 다 동의하신 걸로 알고 확인하겠습니다.”

준후는 거침없이 침상으로 이동했다.

“이불 치우고 침상에서 나오세요.”

“시…… 싫은데요?”

“왜요? 찔리는 게 있습니까?”

“그냥 누워서 쉬고 싶어서요.”

“이미 충분히 쉬셨을 텐데요? 나오세요.”

준후가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내자 환자가 어물쩍 자리에서 비켰다.

펄럭!

이불을 걷어내자 침상 커버에 물방울 모양으로 젖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어서 준후는 환자의 베개를 손에 쥐었다.

베개 커버를 벗기자 그 안에서 툭 하고 플라스틱병 소주가 떨어졌다.

반쯤 마시다 만 소주였다.

증거품이 나타난 순간.

윤희는 천장으로 손을 올리며 환호성을 지르고 싶어졌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준후는 환자가 숨긴 플라스틱병 소주를 단번에 찾아냈다.

딱딱하게 굳어가는 환자와 보호자의 얼굴을 살피는 것도 깨소금 맛이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준후가 정말 자신의 누명을 벗겨줄 줄이야.

그런지 몰라도.

지금 눈앞에 있는 준후가 정의의 사도처럼 멋져 보이는 윤희였다.

“혹시나 했는데 물도 아니네요. 그렇죠?”

준후가 플라스틱병의 뚜껑을 열고서 냄새를 맡아본 후 소주라는 것도 확신시켜줬다.

보호자를 향해 소주를 내밀었다.

보호자는 와락 얼굴을 구긴 채 소주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준후의 명백한 승전보였다.

“간호사분에게 폭언하고 멱살잡이한 거 사과하세요.”

“…….”

“빨리!”

준후는 역으로 보호자를 쥐 잡듯 잡기 시작했다.

* * *

보호자의 사과는 끝내 듣지 못했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끔찍하게 아낀다고.

보호자는 끝까지 환자 편을 들었다.

병원에서 술 마시지 말라는 법이 있냐며 오히려 따지고 들었다.

하지만 보호자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2020년부터 의료기관도 금주 구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를 어길 시 1년 이하의 징역, 1,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

준후의 지적에 보호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진짜로 법이 제정되어 있을 줄 꿈에도 몰랐으리라.

“끝까지 간호사분에게 사과 안 하실 겁니까?”

“…….”

“반성의 기미가 없으시군요. 뭐, 그럴 것 같았습니다.”

준후는 냉정한 표정으로 보호자를 응시했다.

모전자전이라고…….

보호자가 순순히 사과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준후였다.

그래서 숨겨놓은 필살기를 꺼냈다.

“아드님이 보호자분 몰래 마약 하시는 건 알고 계십니까?”

“마…… 마약이요?”

“대마초 계열을 꾸준히 피웠던 모양입니다. 뇌 혈종도 그래서 생긴 거고요.”

“기우 너, 저 말이 사실이야?”

“아니에요. 저 마약 한 적 없어요. 생사람 잡는 거예요.”

환자가 한사코 오리발을 내밀었지만 그런다고 진실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준후는 증거품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ICP 모니터링을 하기 전 확보한 환자의 머리카락이었다.

병원 내부 검사를 통해.

머리카락에서는 벌써 마약 성분이 검출되었다.

머리카락을 경찰에 넘기면 환자는 병원 밥에 이어 콩밥을 먹게 될 것이다.

식욕이 없어서 살은 쭉쭉 빠지리라.

“환자분, 발뺌해도 소용없습니다. 환자분 머리카락을 제가 가지고 있으니까.”

“…….”

“사과를 못 하시겠다면 처벌을 받으셔야죠. 두 분이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게 저희 둘은 그만 빠질까요?”

준후가 윤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 네. 선생님.”

“그럼 가시죠.”

준후는 윤희와 함께 병실을 빠져나왔다.

비록 사과는 못 받았지만.

정의를 구현할 수 있어 준후는 뿌듯했다.

진상 환자와 보호자들은 유독 의사보다 간호사를 하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작 환자·보호자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스태프는 간호사인데 말이다.

“선생님. 정말 감사해요. 저 이제 살 것 같아요.”

윤희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준후도 가슴이 뭉클했다.

“보호자한테 당할 때, 저 정말 비참했거든요. 간호사 일 그만두고 싶었고요.”

“…….”

“근데 지금은 속이 후련해요. 날아갈 것 같은 거 있죠.”

“의사건 간호사건 다 식구잖아요. 식구를 챙기는 건 당연해요.”

준후는 윤희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얌전히 있어. 괜히 오지랖 부리지 말고.

아까 당직실에서.

경수는 준후의 행동을 오지랖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경수는 뭘 몰랐다.

타인을 돕는 건 배려와 관심이지 오지랖이 아니었다.

설령 그것이 오지랖이라고 해도.

세상에는 고통받는 사람을 구원하는 오지랖.

도움의 손길이 간절하게 필요한 오지랖도 있는 법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준후 역시 무림에서.

또 현대에서.

따뜻한 오지랖을 받아서 위기를 잘 넘겨왔고 말이다.

“근데 선생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환자 베개 밑에 소주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윤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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