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36화
제25장 유레카(1)
터벅. 터벅.
준후는 인쇄한 뇌종양 환자 리스트를 읽으며 병동 복도를 걷고 있었다.
현재 병동에 입원한 뇌종양 환자는 총 15명.
5명은 수술 후 회복 중이었고.
나머지 10명은 수술 대기 중이었다.
가장 먼저 살필 환자는 정미례.
50세 여성으로.
양성종양인 뇌수막종을 앓고 있었다.
뇌수막종은 뇌종양 중에서는 비교적 경과가 좋았다.
5년 생존율이 무려 95퍼센트에 달했다.
환자 리스트를 보며.
동선을 짜던 준후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눈앞을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소현 선생님. 또 장난치세요? 저한테는 안 통한다니까요.”
“와, 어쩜 매번 결과가 똑같지? 인쇄물 보고 계시면서 어떻게 제가 앞에 있는 줄 아셨어요?”
감탄하는 소현.
준후는 종종 교재를 보며 복도를 걷곤 했는데.
놀랍게도 맞은편에서 오는 스태프나 환자·보호자를 귀신같이 피했다.
그게 너무 신기한 나머지.
소현은 종종 준후의 앞을 가로막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선생님이 간호사들 중에서 보폭이 가장 짧고 빠르거든요. 몇 초 전부터 발소리가 안 들리기도 했고요.”
준후는 피식 웃으며 소현을 바라보았다.
“책 보면서 그런 것도 가능해요?”
“감각을 열어두는 게 습관이 되면 그렇죠. 그런데 이런 장난치면 재밌어요?”
“저는 재밌어요. 근데 그러는 선생님이야말로 제가 왜 이런 장난 치시는 줄 모르시죠?”
“방금 말했잖아요. 재밌어서라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네요. 선생님은 진짜 여자 여럿 울리실 거예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 소현이 떠났다.
준후는 어깨를 으쓱한 뒤 가까운 병실로 이동했다.
햇볕이 잘 드는 창가 쪽 자리.
보호자는 잠시 자리를 비웠고.
환자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연구활동을 하기에 딱 좋은 상황이었다.
준후는 조심스럽게 환자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환자의 머리로 흘려보냈다.
목적지는 뇌수막종이 자리 잡은 전전두엽.
우우우웅.
우우우웅.
내공이 환자의 두피를 통과했다.
단단한 두개골 내부로 스며들었다가 분사되는 스프레이처럼 전전두엽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과연 내공은 뇌종양에게 독이 될 것인가.
아니면 약이 될 것인가.
희대의 실험 결과가 코앞에 있었다.
설레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는 마음을 준후는 가까스로 억눌렀다.
내공을 운용할 때 생각과 감정이 소란스러우면 내공이 역류할 위험이 있었다.
내상을 입어 당분간 내공을 쓰지 못할 위험이 있었다.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야.
양성종양이라서 그런 건가?
아니면 뇌수막종만의 특징인 건가?
내공이 전전두엽에 위치한 종양에 접근했을 때.
준후는 강력한 흡입력을 느꼈다.
뇌수막종이 준후의 내공을 빨아들이려고 했던 것이다.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말이다.
깜짝 놀라서 준후는 환자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뇌수막종에게 내공을 빼앗길 순 없었다.
실험을 마친 후 준후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암세포의 특징 중 하나는 무한증식이다.
주변에 있는 정상 세포를 파괴해 자신의 먹잇감으로 삼는 것이다.
놀랍게도 암세포는 내공에 담긴 에너지마저 인식하고 그마저 흡수하려고 했다.
무시무시한 녀석이네.
이렇게 달려들 줄은 몰랐는데.
준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해봤다.
인간의 세포 중에서도 정파가 있고 사파가 있다고.
그중 암세포는 사파라고.
주변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니까.
조금 과장 섞인 통찰이지만.
암세포가 인간의 악한 성향 중 일부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주변도 파괴하고.
결국 자신마저 파괴해 버리고 마는.
첫 번째 실험을 마치고 준후는 곧바로 다음 병실을 찾았다.
이번 환자는 출입구 옆에 침상이 있었다.
환자의 이름은 오주현.
60세 남성으로 악성 종양 중 하나인 상의세포종이 측두엽에 위치해 있었다.
환자와 보호자와 잡담을 나누다가 준후는 마사지를 해주겠다고 했다.
추궁과혈 수법으로.
환자의 머리를 꼭꼭 지압해 준 후.
기다렸다는 듯 환자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내공을 종양으로 침투시키는 방법은 좀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악성은 양성에 비할 바가 아니야.
방심하면 내기를 몽땅 빼앗기겠어.
상의세포종의 게걸스러운 흡입력에 준후는 기겁하고 말았다.
과거 무림에서 혈교도와 전투를 벌인 적이 있는데.
그 당시 준후는 혈교도의 흡성대법 때문에 큰 위기에 빠졌었다.
물론 그때만큼의 위기는 아니었지만 암세포가 빨아들이는 힘은 당시가 떠오를 만큼 막강했다.
준후는 반(反, 되돌릴 반)자 결을 사용해 암세포의 괴력을 밀어냈다.
한 번 당했다고 두 번 당할 수는 없었다.
내공을 전진시키면서.
준후는 기어이 내공으로 환자의 측두엽 부근을 전부 훑는 데 성공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땀을 뻘뻘 흘리시는데요?”
준후의 안색이 변한 것을 확인하고 보호자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습니다. 어제 잠을 못 자서 그런 모양이에요. 그럼 두 분 다 편히 쉬시죠.”
준후는 어색하게 웃으며 병실을 나왔다.
고작 환자를 두 명 봤을 뿐인데 녹초가 된 몸.
뇌종양은 과연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인간의 몸속에 자리 잡은 소형 블랙홀이었다.
* * *
그 날 저녁.
준후는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왔다.
운기조식과 영양제. 그리고 홍삼.
가진 무기를 총동원해 오늘의 목표를 이뤄냈다.
병동에 있는 뇌종양 환자 중 단 한 명을 제외하고.
그들의 뇌종양을 전부 내공으로 탐색했던 것이다.
터벅. 터벅.
병동 복도를 가로지르며.
준후는 오늘의 깨달음을 정리했다.
양성과 악성.
두 뇌종양 모두 내공을 빨아들이는 흡입력을 가지고 있었다.
뇌종양의 예후가 나쁠수록 흡입력은 강력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이 깨달음으로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통찰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첫째로 치료에 관한 부분이었다.
사실 준후는 내공의 치유 능력으로 암까지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는 시작부터 박살 났다.
암 종양에게 내공을 불어넣는 일은 적군의 탱크에 연료를 들이붓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내공으로 암을 치유한다면.
그건 분명 외과적인 스타일이 될 것이다.
내공을 검처럼 날카롭게 벼려서.
암 종양을 베어 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수술이 불가능한 부위(뇌간 등등)에 생긴 뇌종양.
또는 방사선 감마 나이프로 다 제거할 수 없는 뇌종양.
이것들을 제거하는 일이 될 것이다.
너무 벅찰 것 같은데.
그건 심검(心劍)의 영역이야.
무형의 내공을 검처럼 형상화해야 해.
지금의 내가 감히 할 수 있을까.
이번만큼은 준후도 자신의 능력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내공을 검처럼 만드는 것도 문제였고 그걸 제대로 휘두르는 것도 문제였다.
특히 후자의 경우 통제에 실패하면 자신이 환자의 뇌를 도려내는 대참사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내공으로 뇌종양에 할 수 있는 일 두 번째.
그것은 암 진단이었다.
CT, MRI, MRA, PET 등등.
뇌종양을 진단할 수 있는 검사는 많고 많았다.
하지만 그 검사들은 완벽하지 않았다.
보통 3-5mm 이하의 침윤성 암까지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에 비해 준후의 내공 종양 검사는 훨씬 정확했다.
뇌종양 특유의 흡입력을 준후는 내공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드르르륵.
준후는 당직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당직 근무가 없는 경수는 이미 자리를 비웠다.
대신 인턴 은하가 오더 입력 업무를 보고 있었다.
“선배, 오늘은 유독 바쁘시네요?”
“그럴 일이 좀 있었거든. 지금은 괜찮아.”
“환자 보는 것도 좋지만 좀 쉬엄쉬엄하셔야죠. 제가 어깨 좀 주물러 드릴게요.”
“됐어. 바쁠 텐데 네 일 봐.”
준후가 거절했음에도 은하는 기어이 준후의 등 뒤로 다가왔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준후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물론 조금도 시원하지 않았다.
준후의 어깨를 풀어주기에 은하의 악력은 너무나 약했다.
하지만 은하의 손길에 닿은 걱정과 배려만큼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그래서 어깨가 가벼워졌다.
“선배, 저 아까 막잼 챌린지 영상 올렸어요. 실험해 보니까 혈당이 진짜 확 튀던데요?”
“그렇지? 업체 놈들이 나쁜 놈이야. 인간을 탈을 쓴 짐승이지. 아니, 어떻게 보면 짐승보다 더 질이 나쁠지도.”
스위티 헬시를 떠올리면서 준후는 얼굴을 찌푸렸다.
오늘 뇌종양 연구를 했기 때문일까.
그들의 존재 자체가 종양처럼 느껴졌다.
주변과의 조화를 모르는 것들.
오로지 탐욕스럽게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들.
대체 왜 모를까.
그런 행동들이 결국에는 본인들마저 파멸로 이끈다는 진리를.
“그래도 선배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거짓말이란 게 금방 들통났잖아요.”
은하가 준후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뉴튜브 확인해 보셨어요?”
“오늘은 바빠서 못 봤네.”
“지금 막잼 챌린지 영상이 30개도 넘었어요. 선배가 올린 폭로 영상 조회수는 100만을 찍었고요.”
“오늘 들은 소식 중에 제일 희소식이네.”
“그렇죠?”
“은하 너는 좀 어때? 업무는 할 만하고?”
준후가 은하로 화제로 돌렸다.
첫 턴(첫 번째 과에서 보내는 인턴생활)은 누구에게나 힘들기 마련이었다.
산더미 같은 일에 깔리고.
환자·보호자·간호사·레지던트의 눈치를 보고.
그들에게 또 혼나느라 자존감이 땅바닥을 치기 마련이었다.
“힘들긴 한데 할 만해요. 제 인턴 생활에 빛이 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게 누군데?”
“비밀이에요.”
은하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은하의 미소 자체가 빛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해맑은 미소를 언제 또 봤는지 준후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은하, 네게 빛이 되는 사람이라면 분명 좋은 사람이겠구나.”
“당연하죠. 그 사람은 정작 눈치를 못 채고 있는 것 같지만요.”
은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뒤지더니 준후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동그란 형태의 초콜릿이었다.
“제가 요새 맛있게 먹는 건데 선배 드실래요? 단 거 좋아하시잖아요.”
“땡큐.”
“전 콜이 와서 그만 나가볼게요. 파이팅하세요. 선배.”
“은하 너도.”
은하가 떠난 당직실이 유난히 휑하게 느껴졌다. 인간 비타민의 공백은 그만큼 큰 것이었다.
“와.”
준후는 은하가 준 초콜릿을 먹고 감탄했다.
달아도 너무 달았다.
졸다가도 정신이 번쩍 들 만한 당도였다.
그러고 보니 뇌는 포도당을 연료로 쓰지.
가끔씩 초콜릿을 챙겨 먹어도 좋겠어.
초콜릿 빨(?)을 앞세워.
준후는 밀린 오더를 순식간에 처리해나갔다.
타다다닥.
타다다닥.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꼭 기관총을 연발하는 소리 같았다.
차트 입력에는 오타가 없었다.
단 한 번의 번복도 없었다.
분당 2,000에 가까운 타자 속도 또한 꾸준히 유지되었다.
빠른 차트 입력은 준후의 또 다른 효자였다.
근무 시간을 대폭 줄여 그 시간에 각종 공부할 수 있는 여유 시간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손 봐라, 손. 가운만 빼고 보면 영화 속 천재 해커인 줄 알겠다.”
3년 차 희준이 당직실에 들어왔다.
준후에게 농담을 건넸다.
“선배 오셨어요? 수술은 잘 끝나셨고요?”
“다행히 별 탈 없었지.”
희준이 준후 맞은편에 의자에 앉아 말을 이었다.
“근데 준후야.”
“네. 선배.”
“너 내일 나랑 뇌종양 어시스트 하나 해볼래?”
희준이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