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38화
제25장 유레카(3)
“야. 정신 사납게 왜 그러고 있어?”
경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준후를 응시했다.
아까부터 준후가 쳇바퀴 돌 듯 당직실을 돌고 있었던 것이다.
“어? 뭐라고?”
“대체 왜 그러고 있냐고 물었다.”
“고민이 있어. 남들한테 말 못 하는.”
“별일이네. 너한테도 고민이란 게 있을 줄은 몰랐는데.”
경수가 보기에 준후는 척척박사였다.
오더 입력.
레지던트 1년 차의 필수 처치.
수술 어시스트.
환자 및 보호자 관리 등등.
솔직히 말해 준후는 못하는 게 없었고.
일단 무언가를 했다 하면 2-3년 차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다.
그런 준후가 어쩔 줄 몰라 하니 걱정스럽기보다는 신기하고 낯선 기분이 들 정도였다.
“무슨 고민인데 말을 못 해? 혹시 여자 문제냐?”
“차라리 그랬으면 좋았지.”
“그럼 또 환자나 보호자 문제?”
준후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경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멍청이 같은 녀석.
또 사서 고생을.
“말 못 할 사연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뭐가 됐든 적당히 해. 네 깜냥을 벗어나는 일이면 손 떼라고.”
“그래서 환자가 위험하면?”
“어쩔 수 없지.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난 해내고 싶다.”
준후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의사는 환자를 위하는 마음으로 성장하기 마련이니까.”
“어휴. 그놈의 명의(名醫)병 한번 고약하네. 말기다 말기. 치료 불가능이야.”
“나도 알아.”
준후는 경수의 지적을 일축하고 계속 당직실을 돌았다.
교모세포종 환자의 뇌종양.
그러니까 검사상에서 드러나지 않은 해마 근처의 암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알릴지를 두고 고민한 지도 벌써 30분째.
뾰족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라고 말하지 못했던 복두장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아예 말을 못 했던 인어공주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준후는 자갈을 삼킨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혼자만 아는 진실은 감당하기 벅찼다.
준후의 시선이 문득 벽시계를 향했다.
남은 시간은 1시간 30분.
시간이 준후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내가 집도의였으면 아무 문제없었을 텐데…….
전이된 암이 있는지 살피겠다며.
자연스럽게 해마 인근에 접근했으면 됐을 텐데…….
준후는 현재 상황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지금 겪는 고충은 레지던트라서 겪는 고충이었다.
드르르륵.
때마침 문이 열리고 3년 차 희준이 당직실로 들어왔다.
“준후, 너 뭐 하니?”
준후가 당직실을 배회하는 것을 보고 희준도 한마디 했다.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요. 근데 선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해 봐.”
“1mm 미만의 암 종양을 발견하는 방법은 없나요?”
“MRI로 어느 정도 커버 될걸? 요즘은 1mm 언저리에 있는 종양도 잡아내.”
“만약 종양이 그보다 작으면 MRI에도 안 나오겠네요?”
“그렇지. 현대 의학에도 한계는 있으니까.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준후는 대충 얼버무렸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검사로 발견하지 못한 종양을 준후는 발견했다는 사실이었다.
희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종양의 크기가 무척 작을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악성 종양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자라곤 하니까 말이다.
“교모세포종 어시스트는 처음이라 긴장되니?”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괜찮아. 장 교수님이 뇌종양 수술은 꽉 잡고 계시거든.”
그렇다고 검사에 안 나온 종양까지 제거하지는 않으시잖아요.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준후는 간신히 참았다.
“평소의 너답지 않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희준이 준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곤 자리를 떠났다.
그쯤에서 준후도 방황을 끝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의학 논문 사이트를 미친 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검색어는 교모세포종, 측두엽, 해마.
이 세 가지였다.
* * *
603호 병실.
영훈은 물끄러미 아버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술 앞두고 머리카락을 잘랐기 때문일까.
머리카락이 없는 아버지는 예전보다 훨씬 연약하고 안쓰러워 보였다.
“아버지.”
영훈의 부름에도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두 눈을 감은 채 쥐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대답할 기력마저 없어 보였다.
영훈은 빼빼 마른 아버지의 손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영훈의 기억 속 아버지는 언제나 강인한 사람이었다.
세 가족이 단칸방을 전전할 때도.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졌을 때도.
영훈이 한참 동안 취업을 못 해 방황할 때도.
아버지만큼은 언제나 가정의 든든한 기둥 역할을 해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는 방패였다.
세상으로부터 가족을 지켜주는.
하지만 그런 아버지조차 흘러가는 세월은 감당하지 못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잔병치레가 심해졌다.
급기야 1년 전부터는 말이 어눌해지고 운동 신경도 바닥을 쳤다.
그때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바보 같았어.
머저리 같은 놈.
영훈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1년 전의 영훈은 아버지가 치매를 앓고 있는 거 같다고 너무 단순하게 판단해 버렸다.
그리고 그 안일함이 지금의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었다.
아버지는 치매가 아니었다.
뇌종양을 앓고 있었다.
만약 그때 좀 더 신경을 썼다면.
병원을 몇 군데만 더 갔다면.
최소한 이 지경이 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아버지에게 무신경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영훈은 주먹이라도 한 방 먹여주고 싶었다.
“여보. 나 왔어.”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실의에 빠졌던 동안.
어느새 아내가 영훈의 곁에 서 있었다.
“미안. 또 혼자 고생시켜서.”
혼자 산부인과에 다녀온 아내에게 영훈이 말했다.
“괜찮아. 나보다 자기가 더 힘들 텐데. 아버님은 좀 어때?”
“금식하셔서 그런지 영 기운을 못 차리시네. 아침 회진 돌 때만 반짝하시더니 그 이후로 계속 이 상태야.”
“그랬구나.”
아내가 영훈의 손을 꼭 붙잡아주며 말했다.
“수술 잘 끝날 거야. 실력 있는 선생님들이 있잖아. 분명 아버님은 우리 애도 보시도 한참 건강하게 사실 거야.”
“……그래야겠지.”
아내의 따뜻한 위로에 영훈은 없던 힘을 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한 번의 기적은 온다고 아버지는 누누이 말해왔다.
그리고 그 기적이 펼쳐지기에 오늘만큼 좋은 날은 없었다.
신이 존재한다면.
부디 저를 도와주세요.
아니, 아버지를 도와주세요.
제게 와야 하는 기적, 아버지를 위해 쓰겠습니다.
* * *
터벅. 터벅.
준후는 수술 시간보다 20분 일찍 수술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교모세포종 환자 어시스트를 위한 준비는 모두 끝났다.
우선 운기조식으로 피로를 싹 날렸다.
몸은 가뿐했다.
집중력은 최고조였다.
어시스트에 필요한 정보도 빠삭하게 암기해두었다.
가장 골칫거리였던 문제.
검사상으로 드러나지 않은 해마 인근의 종양을 집도의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도 준비해놓았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준후는 수술실에 들어갔다.
먼저 세면대에서 스크럽(수술 전 소독)을 하고.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수술 장갑, 마스크, 수술모, 수술 가운 등을 착용했다.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 오늘따라 표정이 비장하신데요?”
간호사가 준후에게 물었다.
“오늘 수술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서요.”
“아…… 교모세포종 수술이라서 그런가 보네요. 그래도 장 교수님이라면 잘해내실 거예요.”
“장 교수님은 어떤 분인가요?”
“젠틀하고 부드러운 분이에요. 스태프들을 딱히 꾸중하는 타입도 아니고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요.”
준후는 그나마 한 시름을 덜었다.
집도의가 권위적이었다면.
준후의 말 따위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테니까.
“근데 장 교수님도 한 가지 단점이 있긴 해요.”
“그게 뭐죠?”
“수술 중에 어시스트들한테 질문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대답을 못 했을 땐 공부를 더하라고 살짝 핀잔을 주시고요.”
“…….”
“선생님이 1년 차라고 해도 예외는 아닐 거예요.”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공부는 충분히 해뒀으니까요.”
준후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하고 5번 수술방을 찾았다.
지이이잉.
차가운 소독 가스가 천장에서 살포되었다.
가스를 다 맞고 입장한 수술방.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무영등 아래에 환자는 수술대에 누워 있었다.
준후는 수술대로 다가가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손주랑 손녀를 볼 때까지만…… 살고…… 싶어요.
환자가 더듬거리며 했던 말이 귓가에 선명했다.
준후는 환자의 소박한 소원을 꼭 들어주고 싶었다.
“선배,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수술 용품실에 있던 은하가 드레싱 카트를 끌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너 도와주려고.”
“안 그러셔도 되는데. 가뜩이나 수술 시간도 길잖아요. 푹 쉬시지.”
“가만히 있으려니까 좀이 쑤시더라고.”
준후는 피식 웃으며 은하를 도와 수술 준비에 나섰다.
환자 감시 장치 연결.
중심 정맥관 연결.
뇌 내비게이션 시스템 연결.
각종 처치 도구 준비 등등이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인턴 때부터.
준후는 수술 준비에 도가 텄었다.
“와, 선배가 도와주니까 번개처럼 끝났네요.”
“그럼 너도 뒤돌아보지 말고 번개처럼 가 봐. 한창 바쁜 시간이잖아.”
“역시 절 위해주는 건 선배뿐이네요. 감사하고 고생하세요.”
“그래. 은하 너도 파이팅하고.”
은하가 떠난 지 얼마 안 돼 희준이 수술방으로 들어왔다.
“준후야. 좋은 소식 있다.”
“네? 무슨 좋은 소식이요?”
“교수님이 수술방에 조금 늦게 오신댄다.”
“그게 왜 좋은 소식이에요?”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희준의 화법이 난해해서 이해가 어려웠다.
“많이 늦으시는 건 아니고 한 20분 정도 늦으신다는데.”
“…….”
“그 사이에 너한테 개두술을 맡겨볼까, 해서. 너 선행학습 좋아하잖아.”
“그거라면 확실히 좋은 소식이네요. 매번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선배.”
준후는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레지던트가 된 후부터 희준은 준후를 꾸준히 챙겨주고 있었다.
공부 방향을 알려주었으며.
다소 어려운 처치와 진료도 준후를 믿고 맡겼다.
보통의 선배라면 준후가 잘난 체를 한다거나.
주제도 모르고 나선다며 면박을 줬을 텐데 말이다.
“네가 쑥쑥 커야 나중에 나도 편하지 않겠어? 교수님 오시기 전에 끝내보자.”
“네. 선배.”
준후가 집도의 자리에 서고.
준후 곁에 소독 간호사가.
준후 맞은편에는 희준이 자리를 잡았다.
스으으윽.
스으으윽.
희준이 환자의 머리를 소독한 후 그 위에 방포를 덮었다.
그동안 준후는 초식으로 만들어두었던.
그동안 교수들이 집도했던 개두술을 머릿속에 그렸다.
눈앞에 동영상을 틀어놓은 듯한 생생하게 재현되는 모습.
준후는 자신이 없었다.
개두술에 실패할 자신이.
“10번이요.”
“네. 선생님.”
준후는 소독 간호사가 건네 메스를 손에 쥐었다. 무영등의 빛을 받은 메스는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메스는 준후의 손에 딱 들어왔다.
감촉이 좋았다.
이제는 무림에서 쓰던 검보다 메스가 더 익숙할 지경이었다.
“겁 없는 건 여전하구나.”
“수영 선수가 물을 무서워하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죠.”
“얼씨구, 그럼 잘해봐.”
교모세포종이 측두엽에 위치했으므로 준후는 환자의 옆머리를 절개해야 했다.
단 한 번의 주저도 없이.
준후는 메스를 가로 방향으로 그었다.
청운검법의 초식 중 하나인 사풍세우의 이치를 담아서.
사풍세우는 횡 베기의 일종으로.
검격이 정교하면서도 깔끔한 것이 특징이었다.
피부 절개.
또는 곡선 없이 평탄한 부위를 절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검법을 절개나 절개에 응용할 수 있는 건 현대에서 오직 준후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서걱.
준후의 부드러운 손짓을 따라.
준후의 메스를 따라 일(一)자의 궤적이 그려졌다.
절개창의 길이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4센티미터였다.
절개창의 선은 자로 대고 그은 것처럼 수평이었다.
절개창은 정확히 두피와 골막까지 파고들었다.
한 치의 삐뚤어짐도 없었다.
“와, 미쳤네. 절개만 놓고 보면 교수님보다 잘하는 것 같은데?”
“저도 이런 절개는 처음 봤어요.”
희준과 소독 간호사가 준후를 극찬했지만 준후는 들뜨지 않았다.
준후의 눈빛과 손짓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날 때까지.
절대 방심하지 않겠어.
준후는 어느새 무결검이라는 별호를 얻었던, 무림 시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현대의 삶을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