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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143화 (143/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143화

제26장 정면돌파(3)

“응?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울고 있었던 것 같은데.”

준후는 아영의 곁에 앉아서 아영의 표정을 살피려 했다.

하지만 아영은 준후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아영은 감정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는 타입이라는 사실을.

아영도 알고.

준후도 알고 있었다.

“그냥 일이 너무 힘들어서. 순간적으로 감정이 북받쳐서 울었어.”

아영의 허술한 설명을 준후는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아영은 그저 힘들다고 눈물을 보일 아이가 아니었다.

친동생이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부터 흉부외과 전공을 마음먹을 정도로 아영은 마음이 굳셌다.

그런 아영이 힘들어서 울었다고?

준후가 아는 아영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책임감으로 이겨내는 아이였다.

“네가 단순히 일이 힘들어서 울진 않았을 거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

“그게 친구잖아. 그렇지?”

“준후야.”

준후를 바라보는 아영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아영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진실을 털어놓았다.

사태의 원흉은 하준식이었다.

흉부외과 레지던트 2년 차, 하준식은 과거 준후와도 악연을 맺은 적이 있었는데.

승범과 둘이 짜고.

준후에게 흉관삽관을 도발했던 전적이 존재했다.

“선배가 근무 첫날부터 나한테 치근덕거리더라고.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

“갈수록 정도가 심해졌어. 일을 가르쳐준다는 명목으로 막 쫓아다니고.”

“그래서 뭐라고 했구나.”

“응.”

이어지는 아영의 설명.

아영이 준식의 행동이 불편하다고 말하자 준식의 태도는 180도 변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일진처럼.

아영을 괴롭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5일 연속으로 당직을 세우고.

배우지도 않은 처치를 해보라며 무리한 요구를 하고.

근무 태도를 꼬투리 잡고 등등.

그동안 아영은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다고 했다.

“이거 생각보다 질이 나쁜 놈이네.”

준후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다른 선배들은 아무 말 없었어? 5일 연속 당직은 말도 안 되잖아. 100일 당직도 사라진 지 오래인데.”

“한 달만 강하게 키우자. 준식 선배가 그런 식으로 말했는데 그게 통했나 봐.”

“별 개떡 같은 논리를 다 보겠네. 신규가 들어왔으면 예뻐해 줄 생각을 해야지.”

“모르겠어. 다른 선배들 속을.”

아영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고.

준후는 그런 아영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했다.

미치도록 아영을 돕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신경외과 전공인 준후가 흉부외과 의국에 껴들 명분은 없었다.

그렇다고 흉부외과에 친한 선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인턴 시절.

흉부외과에서 수련한 적이 없었으니까.

의대에 다닐 때 인연을 맺은 선배도 없었으니까.

할 수 있는 건 위로가 다인가.

직접 나설 수 없는 상황에 준후는 답답했다.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듯했다.

성호가 세상을 떠나면서.

곁에 남은 소중한 사람은 아영뿐이거늘.

물론 가족을 제외하고 말이다.

벌컥!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때마침 휴게실 문이 열렸다.

사마귀처럼 얼굴이 세모난 준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준식은 준후를 잠깐 쳐다봤다가 아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야, 이아영, 농땡이 피우냐?”

“아니요. 잠깐 쉬고 있었어요.”

“그게 농땡이잖아. 병동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동기랑 노닥거리고 있어?”

“…….”

“돌았어? 1년 차 주제에 벌써 빠져 가지고. 어시스트 끝났으면 빨랑빨랑 병동으로 올라가야 할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안 되겠다. 너 오늘 하루 더 당직 서야겠어. 그래야 정신이 번쩍 들지.”

“……네.”

아영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동안.

준후의 속에서는 열불이 뻗쳐올랐다.

준식의 괴롭힘은 선을 넘었다.

흉부외과에 1년 먼저 들어왔다고 저래도 된단 말인가.

아영이 자기 노예라도 된단 말인가.

문득 아영의 안색을 살피니.

아영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절대 이대로 넘어가선 안 돼.

무슨 방법을 써야 해.

멋진 흉부외과의가 되겠다는 아영이의 꿈이 짓밟히게 둘 수 없어.

아영을 돕기로 결심한 순간.

준후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묘수가 있었다.

무림 정파 출신의 장점.

그것은 단순히 무공을 배웠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말빨(?)에도 있었다.

정파의 싸움은 말이 7할이었고 무공이 3할이었다.

명분과 간계.

의외로 이것들은 정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이었다.

그래서 준후는 지금도 설검(舌劍)을 사용하기로 했다.

혀도 검처럼 날카로울 수 있었다.

“선배. 적당히 하시죠.”

“뭐야? 서준후, 네가 뭔데 흉부외과 일에 나대냐? 사정을 알기나 해?”

“다 압니다. 선배 때문에 아영이가 힘들어하잖아요.”

“준후야. 그걸 말하면…….”

준후의 당돌한 대답에 아영이 놀란 부엉이 눈을 했다.

방금 대답은…….

결코 준식 앞에서 할 말이 아니었다.

아니,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뭐야, 이아영. 준후한테 흉부외과 욕하고 있었어? 너 진짜 가지가지 하는구나?”

준식이 눈살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불쾌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뿜어냈다.

휴게실 분위기가 폭풍전야로 위태로운 가운데.

준후가 내지른 한 마디가 거대한 파문을 몰고 왔다.

“선배. 아영이, 흉부외과 레지던트 그만두겠답니다.”

* * *

“…….”

“…….”

순간 고요해지는 휴게실.

준식도 놀라고 아영도 놀랐다.

차분한 이는 오로지 준후뿐이었다.

“아영이 관두면 참 행복하시겠네요. 다시 막내로 돌아가고 잡일도 도맡아서 하고.”

“지…… 지X하지 마. 아영이가 갑자기 왜 일을 그만두는데?”

“말했잖아요. 선배가 괴롭혀서라고.”

“염병 좀 작작 떨어라. 관두면 어디 갈 건데. 뭐, 1년 꿇을 건가? 1년 동안 손가락만 빨고 있을 거야?”

준식이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분위기였다.

“1년을 왜 꿇죠? 우리 신경외과로 들어올 건데.”

준후는 즉석에서 거짓말을 했다.

정파인 특유의 허세를 부리면서.

준식은 아영이 레지던트를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영을 괴롭히고 있었다.

먹고 살려면 일 계속해야지.

이런 입장인 것이다.

그래서 준후는 일부러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아영아. 우리 방금 신경외과 들어오는 이야기 하고 있었지?”

준후가 아영을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어? 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아영.

하지만 아영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내막은 몰랐지만.

준후에게 계략이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두 사람의 마음이 순간 이심전심으로 통했다.

“신경외과 들어간다고? 이제 와서? 그게 말이 되냐?”

“신경외과도 레지던트 전공자 미달입니다. 몇 년 전부터 쭉~ T.O는 남아돌아요.”

“레지던트 공고 마감된 게 한참 전이야. 이제 와서 지원 과를 마음대로 바꿀 순 없어.”

“그건 선배 생각이죠.”

준후가 냉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드물지만 상시 모집도 있고요. 참고로 저희는 레지던트 근무한 지 2주도 채 안 됐잖아요.”

“…….”

“정상 참작의 여지는 충분하죠.”

준후의 반격은 계속되었다.

아영은 우수한 인재다.

인턴 봉합 대회에서 2위를 수상했으며 인턴 수련 후 A턴 평가도 받았다.

그런 인재가 신경외과에 들어온다면 신경외과는 쌍수를 들고 환영이다 등등.

한 번 터지기 시작한 준후의 입담은 청산유수였다.

빌어먹을.

왜 상황이 이렇게 되는 거지?

왜 내가 털리고 있냐고!

준후의 폭격에 준식은 크게 당황했다.

아영이 정말 신경외과로 간다면?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다시 막내 생활을 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어디 그뿐이랴.

아영을 다른 과에 뺏긴다면.

선배들에게 개갈굼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똥 군기 잡다가 흉부외과 망신을 시켰다며 평생 찍힐 것이 분명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자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준식은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쥐고 있던 칼자루가 준후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서준후, 이 자식.

또 우리 과 일에 끼어들어서 훼방을…….

준후가 얄미웠지만 준식이 당장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아영아.”

마음을 다스리며 준식이 나지막하게 아영을 불렀다.

“네. 선배.”

“너 동생 일 때문에 흉부외과의 되겠다고 했잖아. 그 결심을 이렇게 간단히 버릴 거야?”

“…….”

“정말 신경외과에 갈 거냐고.”

준식이 좀 전과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영을 붙잡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할까 봐요. 이젠 너무 힘들어서 못 버티겠어요.”

“하…… 미치겠네. 아무래도 나한테 맺힌 게 많은 것 같은데 잘 풀어보자. 응?”

“풀기는 뭘 풉니까. 신경외과에 오면 한 번에 다 해결되는데.”

준후가 옆에서 깐족거렸다.

“제3자는 그만 빠져. 아영이는 아직 흉부외과 소속이니까.”

“…….”

“아영이 네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줄은 까맣게 몰랐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당직실에서 속 시원하게 털고 가자. 부탁이다.”

준식의 입가에 비굴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아영이 선배고.

준식이 후배인 것처럼.

두 사람의 관계는 180도 역전되었다.

“이제 가 봐. 아영아.”

“그래도 돼?”

“일단 준식 선배 이야기 들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나한테 이야기해. 그때 신경외과 와도 늦지 않으니까.”

“상담해 줘서 고마워.”

“천만에.”

“가자, 아영아. 이쪽으로.”

준식은 휴게실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서 아영이 먼저 지나가도록 배려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영을 무조건 흉부외과에 붙들어 놓아야 했다.

* * *

준후는 두 사람이 막 떠난 휴게실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급조한 계략은 다행히 대성공을 거두었다.

거만하고 콧대 높았던 준식이 아영에게 절절매게 된 것이다.

아영의 꿈은 훌륭한 흉부외과의가 되는 것.

따라서 흉부외과의를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점은 오히려 준식의 먹잇감이 되었다.

자기가 아무리 아영을 괴롭혀도.

아영은 자기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준후는 그 확신을 깨부쉈다.

아영이 신경외과로 전과할 수도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실제로 전과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으니 준식은 똥줄이 탔으리라.

아영이의 연기력과 눈치도 제법이었어.

쿵짝이 안 맞았으면.

나만 바보가 될 수도 있었는데.

준후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로 아영을 다시 봤다.

아영은 성품이 착하고 모질지 못할 뿐.

상황 판단력과 위기 대처능력은 탁월했다.

준식을 물리친 5할이 준후의 계획이었다면 나머지 5할은 아영의 상황 이해력이었다.

자기가 힘든 생활을 했으면.

후배는 덜 고생 시키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정상 아닌가.

그런데 대체 왜!

후배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란 말인가.

준후는 준식 같은 부류를 혐오했고.

준식 같은 부류가 넘쳐나는 현실이 못마땅했다.

지금도 세상에는 제2, 제3의 아영들이 고통받고 있을 텐데.

지이이잉.

지이이잉.

때마침 몸을 떠는 콜폰, 준후가 통화를 연결했다.

-아직도 중환자 킵하고 있냐?

경수가 물었다.

“방금 끝났어. 왜?”

-병동 오는 길이면 응급실 좀 가달라고. T.A(Traffific Accident, 교통사고) 두부 외상 환자 있다. 너 환자라면 환장하잖아.

“이제야 좀 너랑 맘이 통하네.”

-이럴 때만? 어쨌든 그럼 네가 가는 걸로 알고 있는다?

통화를 마친 후.

준후는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아서 한 번에 들이켰다.

우드드득.

커피 캔을 구긴 후 등 뒤로 무신경하게 던졌다.

등 뒤에 눈이 달린 것처럼.

농구공이 농구 골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캔은 유려한 포물선을 그리다가 쓰레기통에 골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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