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44화
제26장 정면돌파(4)
흉부외과 당직실.
“잘못했다, 아영아. 내가 더럽고 치사한 놈이었어. 너한테 치근덕거린 것도 미안하고 괴롭힌 것도 미안하다.”
“…….”
“내 속이 콩알만 했어. 너한테 정말…… 그랬으면 안 됐는데. 지금은 반성하고 있다.”
준식의 고해성사는 무려 5분 동안 이어졌다.
준식의 혓바닥이 오늘따라 길었다.
평소에는 명령조에 한 마디 이상을 뱉지 않던 사람인데 말이다.
아영은 팔짱을 낀 채 준식의 말을 듣기만 했다.
지금까지 한 말들이 진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본인이 궁지에 몰리자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지껄이는 말일 테니까.
그런데도 통쾌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준식이 이토록 비굴해질 줄이야.
“제가 신경외과로 가는 게 무섭긴 한가 보네요. 선배도.”
“당연하지. 아영이 너처럼 일 잘하고 성실한 레지던트를 어디서 구하겠어.”
“그럼 그동안 왜 그렇게 못살게 구셨어요?”
아영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뭐, 내 호감을 네가 받아 주지 않았던 것도 있고. 군기를 잡으려고 했던 것도 있고.”
“…….”
“이유야 많은데 하여간 다 내 잘못이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선배가 제게 잘해주길 바라지는 않았어요. 최소한의 상식만 지켜주길 바랐다고요.”
“못난 선배라서 진짜 미안해.”
준식이 두 손 모아 싹싹 빌었고.
아영은 자신이 준식에게 원하는 바를 털어놓았다.
정상적인 당직 근무.
준식의 업무를 아영에게 떠넘기지 않기.
말도 안 되는 트집 잡지 않기 등등.
준후가 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준식을 휘어잡기 위해.
아영은 당당하게 할 말을 다했다.
이제는 스스로 용기를 내야 할 타이밍이었다.
“딱 한 달만 지켜볼 거예요. 약속 안 지켜지면 저 신경외과로 갈 거예요. 뒤도 안 돌아보고.”
“어휴. 당연한 것들인데 당연히 지켜야지. 이제 신경외과 간다는 소리는 하지 마? 응?”
“선배 하는 거 봐서요.”
드르르륵.
때마침 당직실 문이 열렸다.
3년 차 백종오가 안으로 들어왔다.
“둘이 뭐하냐?”
“준식 선배가 계속 절 괴롭히면 신경외과에 가겠다고 말한 참이었습니다.”
아영은 돌직구를 날렸다.
평소에 아영다운 화법은 아니었지만 준후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어쩐지 이런 말을 했을 것 같았다.
“이 쪼다 새끼. 안 그래도 요새 하는 짓이 심상치 않더라니.”
종오가 인상을 찌푸리며 준식에게 다가갔다.
준식의 뒤통수를 가볍게 후려쳤다.
퍽!
“아야! 선배. 아파요!”
준식이 뒤통수를 부여잡았고.
종오는 그런 준식의 뒤통수를 몇 번이고 더 때렸다.
퍽. 퍽. 퍽.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지. 아영이가 오죽하면 저런 소리를 하겠냐?”
“안 그래도 싹싹 빌고 있었어요.”
“자랑이다. 자랑. 나갈 거면 아영이 말고 네가 나가야 돼. 짜샤.”
종오가 씩씩거리며 말을 이었다.
“너 이쯤에 흉강천자랑 흉관삽입도 못 했잖아. 아영이도 척척 해내는걸.”
종오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아영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아영이 실제로 성실하고 일을 잘했기 때문이다.
준후가 워낙 넘사벽일 뿐.
아영도 본인의 일솜씨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1년 차 처치 중 못 하는 것이 없었다.
“아영아.”
“네. 선배.”
“나야말로 미안하다. 그동안 신경 못 써줘서. 안 그래도 요새 준식이가 짓궂어서 한마디 할 생각이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종오 선배가 사과할 일은 아니에요.”
“어휴 마음씨도 비단결이네. 앞으로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바로 말해. 알았지?”
“네. 선배.”
“준식이 넌 컨퍼런스 룸으로 따라와. 정신 교육 좀 받자.”
“아…… 아…… 아파요!”
종오가 주눅 든 준식의 귀를 잡아당기며 당직실을 떠났다.
그제야 당직실의 평화를 되찾았다.
책상에 앉아서 아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준후가 도와준 덕분에.
무사히 지옥을 탈출할 수 없었다.
만약 휴게실에서 준후를 만나지 않았다면.
만약 준후가 재치를 발휘하지 않았다면.
아영은 아직도 준식에게 질질 끌려다녔을 것이다.
고마워, 준후야.
이제 좀 숨통이 트인 것 같아.
아영은 의사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휴대폰에 달린 액세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의대 시절 아영의 생일날.
준후가 생일 선물로 준 토끼 인형 액세서리였다.
* * *
커튼이 걷힌 창가에서 어슴푸레한 동녘이 쏟아지고 있었다.
동녘으로 준후의 옆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당직 근무 중이던 준후는 내공 종양 제거술에 매진 중이었다.
두개골 모형에 손을 얹은 채.
두개골 모형 안에 있는 뇌 모형으로 내공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뇌 모형 속에 위치한 초콜릿 부스러기를 제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내공 종양 제거술은 만만치 않았다.
내공을 메스처럼 날카롭게 벼리는 일도.
내공 메스로 초콜릿 부스러기만 정확하게 제거하는 일도.
능력 밖의 일이었다.
그 탓에 준후는 수련하는 내내 고통받았다.
하지만 힘들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뇌종양 수술.
또 감마 나이프 수술로 치료가 불가능한 뇌종양 환자.
그 환자들이 기댈 수 있는 곳은 내공 종양 제거술밖에 없었다.
내공 종양 제거술은 준후만 할 수 있는 일이므로 반드시 준후가 해내야 했다.
갈 길이 멀구나.
이번 치료는 익히는데 고생 좀 하겠어.
준후는 두개골 모형에서 손을 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모형을 분해해서 살피니.
이번에도 어김없이 실패였다.
초콜릿 부스러기는 멀쩡했다.
대신 뇌 모형의 전두엽 부근에 가로 0.5밀리미터, 깊이 0.5밀리미터의 상처가 생겼다.
또 뇌만 훼손시킨 것이다.
만약 실전이었다면…… 그 결과는 대참사였으리라.
실패한 경험을 디딤돌 삼아 준후는 다시 내공 종양 제거술을 연마했다.
단전에 내공이 텅텅 빌 때까지.
실력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지만 준후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실망하지도 않았고.
자괴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무언가에 꾸준히 노력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실력 상승이란 결코 우상향의 그래프를 띄는 게 아니란 것을.
실력 상승이란 오히려 항아리에 물을 붓는 행위와 비슷했다.
초반에는 항아리에 아무리 물을 부어도 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항아리에 물이 차면서 단 한 방울의 물로도 항아리의 물은 넘치게 되어 있었다.
즉 항아리에 물이 넘칠 때가 실력이 상승하는 시점인 것이다.
준후도 지금은 대책 없이 항아리에 물만 붓고 있었지만 물이 넘치는 때가 반드시 찾아오리라 믿었다.
그래서일까.
포기할 때를 몰라서 성공하게 되더라.
……라는 말을 준후는 좋아했다.
안 되는 일도 하다 보면 되고.
결국 인생이란 것도 살다 보면 꾸역꾸역 살아지게 된다는 걸 무림에서 경험한 덕분이었다.
오전 컨퍼런스 1시간 전.
준후는 영양제를 먹고 운기조식을 펼쳤다.
들숨에 자연진기가 들어오고.
날숨에 탁기가 빠져나가며 자연진기가 일주천(내공이 전신의 혈맥을 한 바퀴 도는 일)했다.
내공은 얼마간 복구되었으며.
영양제가 온몸에 골고루 퍼졌고.
무거웠던 몸은 가벼워졌으며 집중력은 다시 날카로워졌다.
당직실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준후가 눈을 떴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 자락을 툭툭 털어냈다.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며 준후는 벽에 걸린 달력을 응시했다.
오늘은 모처럼의 오프 날.
쉬는 날임에도 해야 할 일은 산더미였다.
* * *
“역시 병원 밖은 공기부터 다르네요. 으음…… 상쾌해.”
병원 본관 로비를 빠져나온 후 은하가 한마디 했다.
은하도 오프라서 준후와 함께 병동을 빠져나온 것이다.
현재 시각은 오전 9시.
병원은 출근하는 스태프들과 진료를 위해 방문한 환자들로 북적거렸다.
각자 바쁘게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생기 넘치는 풍경.
뇌와 척추 또는 신경이 다친, 신경외과 병동 환자들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들처럼 활기차게 걸을 수가 없었다.
똑바로 걷는 것도 축복이라는 걸 준후는 신경외과 전공을 하고 나서 알았다.
“은하, 너는 아직 대학생 같아 보인다?”
준후가 은하를 살피며 말했다.
사복 차림의 은하는 부쩍 어려 보였다.
갓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 같았다.
“제가 원래 한 동안하잖아요. 어려 보이는 게 꼭 좋은 건 아니지만요.”
“그거야 그렇지. 의료인은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게 좋긴 해.”
환자는 의사의 실력 이전에 의사의 얼굴을 먼저 보기 마련인데…….
의사가 너무 젊어 보이면 경험과 연륜이 적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환자들이 꽤 많았다.
“근데 선배도 동안이잖아요. 외모 때문에 무시당한 적 없어요?”
“아직까지는.”
준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동안이라도 일 처리가 워낙 깔끔해서 환자나 보호자에게 무시를 당한 적은 없었다.
다만 나중에 외래 교수가 된다면.
역용술로 외모는 살짝 손 볼 계획이었다.
무공 덕분에 준후는 셀프 성형 수술(?)이 가능했다.
“은하, 넌 무슨 계획 있어? 오프인데 재밌게 놀아야지.”
“놀고 싶긴 한데. 친구들하고 시간이 안 맞아서요.”
은하가 울상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선배는 오늘 스케줄 어때요? 괜찮으면 저랑 영화 보러 가실래요?”
“미안하지만 안 되겠다.”
“왜요? 제가 싫으세요? 부담스러우세요? 아니면 데이트 약속?”
은하의 따발총 같은 질문에 준후는 피식 웃고 말았다.
“오전이랑 오후에 다 선약이 있어. 그동안 못 됐던 분들 뵈어야 해서.”
“아쉽다.”
“언제 또 시간 되겠지. 대신 아침이라도 같이 먹고 갈래?”
“네. 좋아요!”
준후는 은하와 병원 근처에 있는 국밥집을 찾았다.
모처럼 편의점 인스턴트 음식을 벗어나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
은하와 헤어진 후 준후는 2호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출근 시간이 살짝 지난 덕분에.
지하철은 그나마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앞뒤 좌우로 나름 공간을 차지할 수 있었다.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준후는 막잼에 대한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한 통을 다 먹어도 15칼로리 밖에 안 된다며 소비자들을 희롱했던 발칙한 제품을.
[논란에 휩싸인 막잼. 해당 상품 전부 마켓에서 내려.]
[소비자들이 뿔났다. 대규모 집단 소송 예고. 이젠 우리도 막 나가요.]
막잼에 대한 기사 중 업체 측에 좋은 기사는 하나도 없었다.
업체는 자체 실험을 통해.
제품의 당류가 그리 높지 않다고 변명했지만 누구도 업체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거짓말쟁이 목동이 되었다.
그러게.
뻗대지 말고 좋은 말 할 때 사과했으면 좋았잖아.
꼭 오리발을 내밀어서 일을 키운다니까.
여론이 거센 만큼 해당 업체는 분명 앞으로 소송에 시달리다가 망하리라.
쌤통이고 깨소금 맛이었다.
기사를 살핀 후 준후는 자신의 뉴튜브 채널도 살폈다.
구독자 30만.
평균 동영상 조회 수 10만.
영상이 일주일에 1-2개 정도밖에 올라가지 않았지만 채널은 어엿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만한 규모라면 앞으로 사람들에게 꽤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의료계의 비리 폭로.
의학 정보 전달.
희귀 질환 환자의 성금 모금 등등.
누가 뭐래도 뉴튜브는 준후의 든든한 본진이었다.
[이번에 내리실 역은 강남, 강남입니다. 내리실 문은…….]
때마침 흘러나오는 방송 멘트.
준후는 지하철과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근 10년 만에 다시 찾은 강남은 예전만큼 화려해 보이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와 달리 그동안 경험한 장소들이 많았으니까 말이다.
인파에 섞여 걷던 준후가 한 빌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8층 높이의 세련된 빌딩이었다.
아침 햇살을 반사하면서 빌딩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새로 한의원]
준후의 시선이 빌딩의 한 간판에 머물렀다.
드디어 도착했다.
오늘의 첫 번째 행선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