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45화
제26장 정면돌파(5)
한의원을 찾은 이유는 단순했다.
내공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꾸준히 홍삼을 챙겨 먹고.
운기조식도 하고 있음에도 내공은 턱도 없이 부족했다.
레지던트가 되면서.
내공을 사용하는 빈도와 양이 급속도로 증가했던 탓이었다.
내공 종양 조영술도 그렇고.
특히 최근에는 심검(心劍)으로 뇌종양을 제거하겠다는 야심 찬 수술법까지 수련 중이었다.
그래서일까.
준후는 내공의 부재와 고갈을 빈번하게 느끼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먹었던 총명탕 효과가가 기가 막혔지.
한 번 더 신세를 지자.
건물 안으로 들어간 준후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7층의 절반을 사용하고 있는 새로 한의원에 입장했다.
누가 한의원 아니랄까 봐.
입장할 때부터 향긋한 약재 향이 코끝을 스쳤다.
출입구 정면에는 단정하고 세련된 인테리어의 접수 데스크가 있었고.
14명 정도 되는 환자들이 의자에 앉아 진료 대기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진짜 오랜만이네요.”
접수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준후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근데 저를 기억하시네요? 거의 10년 전에 뵈었을 텐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외모가 너무 강렬했으니까요. 지금은 신경외과 의사가 되었다고 하던데. 맞죠?”
“네. 맞습니다.”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1년에 두 번.
명절마다 용진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이 직원에게도 흘러간 모양이었다.
“진짜 멋지게 자라셨네. 11시 예약이니까 잠시 기다려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준후는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무림에서 약방과 의원들을 경험했기에 준후는 한의원이 친숙했다.
한의원에 거부감도 없었다.
한의사들이 친절하고 환자에게 공감을 잘해줘서.
요즘은 오히려 한의원이 뜬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것도 같은데…….
새로 한의원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보였다.
대기 중인 환자가 무척 많았다.
한의학이라…….
준후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준후였다.
그렇다면 한의학을 배워서.
외과 수술을 보조하는 용도로 쓰면 어떨까 싶었다.
수술 전과 수술 후 환자 관리를 할 때 말이다.
한의학 중에서도 침술과 뜸은 좋은 효과를 기대해 볼 만했다.
“준후 씨, 원장실로 들어가세요.”
“네. 선생님.”
한의학은 가능성으로만 열어둔 채.
준후는 원장실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있는 원장 용진은 10년 전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기억 속의 얼굴.
또 지금 보고 있는 얼굴의 차이를 느끼기 힘들었다.
“얼굴을 보는 건 거의 10년 만이지? 반갑네.”
“죄송합니다. 선생님. 진작 찾아뵀어야 했는데…….”
“괜찮아. 의대 공부하랴 의사 노릇하랴 얼마나 바빴겠어. 거기 앉아.”
“네.”
“자네가 해준 CPR로 나는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 자네를 보고 있으니 또 그때 생각이 나는군.”
용진이 추억에 젖은 눈동자로 말했다. 근황 이야기에 5분이 순식간에 삭제되었다.
준후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선생님. 혹시 예전에 지어주셨던 총명탕보다 효과 좋은 탕약이 있을까요?”
“암. 있고 말고. 탕약은 아니고 환이긴 하지만.”
“환의 이름과 효과는 어떻게 되죠?”
“천산환이라고 우리 한의원에서 보양으로는 으뜸가는 환이지.”
총명탕보다 성능 좋은 환이 있다는 소식에 준후는 반색했다.
역시 강남까지 발품 판 보람이 있었다.
“그럼 천산환을 처방받고 싶습니다.”
“처방이야 어렵지 않지만…… 가격이 워낙 세서 말이야.”
“가격이 얼마나 되길래…….”
“환 하나에 10만 원이야.”
“그 정도면 감당할 만합니다. 한 달 치 처방해 주세요. 그리고 오늘을 기준으로 매달 처방 받겠습니다.”
준후의 호쾌한 대답에 용진이 눈을 깜빡거렸다.
환 하나에 10만 원.
한 달을 복용하면 거의 300만 원이나 되는 거금이니 그럴 수밖에…….
“괜찮겠어? 레지던트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텐데?”
“부가 수익이 있거든요. 저 뉴튜브 합니다. 그게 좀 잘나가고요.”
준후가 씽긋 웃었다.
매달 뉴튜브로 얻는 수익이 400만 원 정도 되었다.
레지던트 월급 역시 세후 400만 원 정도 되었고.
그렇다고 환의 가격이 부담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충분히 감당할 만한 수준이었다.
환으로 얻은 내공.
그 내공으로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다면 오히려 남는 장사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는 것 같은데? 환이라는 게 체질마다 흡수하는 양이 다 다르거든.”
“…….”
“10만 원짜리라고 생각하면 실망할 수도 있어.”
“괜찮습니다. 전 선생님의 약제 솜씨를 믿으니까요.”
준후는 씽긋 웃으며 말했다.
“허…… 그렇게 말하면 또 내가 할 말이 없는데 말이야.”
“그런데 선생님, 처방받기 전에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무슨 부탁?”
“한 달 치를 구입하기 전에 천산환 하나를 먼저 먹어보고 싶습니다.”
* * *
준후가 천산환을 하나 받아 원장실을 떠난 후.
용진은 잠시 진료를 중단시켰다.
창가에 서서 도심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급성 심근 경색으로 쓰러졌던 자신에게 CPR을 해주었던 고등학생 준후가 10년 만에 한의원을 찾아왔다.
그것도 신경외과 레지던트가 되어서.
준후를 직접 만나고 나니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벌써 10년이 지났을 줄이야.
용진에게는 지난 10년이 고작 10시간처럼 느껴졌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분위기가 많이 변했어.
좀 더 영민한 느낌이 들고 호방해졌군.
확실히 어른이 된 건가?
준후와 대화를 나눴던 좀 전을 떠올리며.
용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용진은 사람 보는 눈이 좋은 편인데 덕분에 준후의 변화를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관상이며.
분위기며.
태도가 은연중에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만 성장하면 준후는 훌륭한 외과 의사가 될 것 같았다.
상념을 마친 용진은 자리로 돌아와 책상에 있던 호출 벨을 눌렀다.
“네. 선생님. 진료 재개할까요?”
정화가 원장실로 들어와 물었다.
“그전에 우리 천산환 얼마나 가지고 있죠?”
“천산환이면…… 90알 정도 있습니다.”
“그럼 준후한테 한 달 치 처방해 줘요.”
“준후 씨가 천산환을 구입하겠다고 했나요?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정화 역시 용진과 의견이 비슷해 보였다.
왜?
굳이?
……라는 반응이었다.
천산환은 기력이 쇠하고 또 부유한 노년층이 찾는 환이었다.
청년에게 어울리는 환이 아니었다.
“꼭 처방을 받아야겠다니 별수 있나.”
“그래도 말리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가격이 엄청나잖아요.”
“말린다고 들을 눈빛이 아니었어요.”
용진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처방과 가격에 대한 이야기였다.
“선생님도 대단하시네요. 굳이 출혈을 감수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에요.”
“은혜를 갚으려면 확실히 갚아야죠. 방금 말한 대로 잘 처리해 주세요.”
“네. 선생님.”
정화가 떠난 후 용진은 다시 진료를 시작했다.
천산환에 왜 그리 집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시 깊은 뜻이 있겠지.
넌 정의롭고 용감한 아이니까.
무슨 일이든 잘 해보려무나.
네가 원하는 것을 반드시 손에 거머쥐거라.
용진은 준후의 앞길을 속으로 축복해 주었다.
* * *
새로 한의원 치료실.
준후는 뜸을 뜨는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침상 주변에 커튼이 쳐져 있었기에 바깥에서는 준후를 볼 수 없었다.
천산환을 복용하고 운기조식을 펼친 지 20분.
준후는 그 남다른 효과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무림의 영약과 비교할 순 없지만.
천산환은 10만 원 이상의 가치를 멋지게 증명했다.
기경팔맥으로 흘러드는 진기의 양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혼합된 각종 약재가 폭발적인 시너지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오로지 한약에서만 기대할 수 있는 특수한 효과였는데.
양약은 보통 단일 성분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총명탕에 두 배 정도는 되겠어.
역시 선생님의 탕약은 범상치 않단 말이지.
준후는 눈을 뜨고 가부좌를 풀었다.
청풍심법으로 천산환의 진기를 모조리 흡수했더니 아랫배가 묵직해졌다.
천산환을 꾸준히 복용한다면.
내공이 모자라서 고생하는 일은 줄어들 듯했다.
내공으로 할 수 있는 치료와 검사들을 떠올리며 준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로써 한층 더 강해졌고.
더 많은 환자를 돌볼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 천산환 처방받으러 왔습니다.”
천산환에 대만족한 준후가 계산대를 찾아 정화에게 말을 걸었다.
“네. 카드 주세요. 몇 개월로 해드릴까요?”
“일시불로 해주세요.”
“네. 계산 끝났습니다.”
“잠깐만요. 계산 잘못하신 거 아니에요?”
계산을 마친 카드와 영수증을 받아들고 준후는 깜짝 놀랐다.
계산 금액이 150만 원밖에 되지 않았다.
반값이었다.
“제대로 된 금액이에요. 원장 선생님이 50퍼센트 할인해 주라고 하셨거든요.”
“이러려고 찾아온 게 아닌데. 방금 결제한 거 취소하고 300만 원으로 결제해 주세요.”
“안 돼요. 그럼 천산환 못 드려요. 원장 선생님이 신신당부하셨어요.”
정화의 단호한 말에 준후는 난감해졌다.
제값 주고 구입해야 마음이 편한데 말이다.
“그럼 선생님이라도 뵙게 해주세요.”
“그것도 안 돼요. 진료 중이시니까.”
“정말 이러실 거예요?”
“네. 이럴 거예요. 꼬우면 빈손으로 가시던가요.”
정화가 농담조로 말했다.
“원장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준후 씨가 천산환을 먹은 만큼 힘내서 환자들을 잘 돌봐달라고 하셨어요.”
“…….”
“환자를 게을리 보면 그때 제값을 받겠다고요. 약속 지키실 수 있죠?”
“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준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애초에 천산환을 본인의 보양이 아닌 검사 및 치료 목적으로 구입했으니까 말이다.
“받으세요. 천산환이에요.”
정화가 천산환이 담긴 포장지를 내밀었고.
준후는 순순히 받았다.
더 이상 입씨름해 봐야 소용이 없음을 알았다.
“포장지에 한의원 명함하고 계좌 번호 넣어놨거든요? 거기에 매달 150만 원 입금해 주세요. 그럼 떨어질 때쯤 배송 보내드릴게요.”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감사는 원장 선생님께 하셔야죠.”
“그래도요.”
준후는 포장지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뜸을 들였다.
용진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그저 10년 전에 심폐 소생술을 했을 뿐인데.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때부터 너무 많은 신세를 지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부담이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말이다.
이런 게 바로 도움의 선순환이라고 준후는 생각했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고.
반대로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고.
세상이 아직 살 만한 건 분명 도움의 선순환이 있기 때문이리라.
세상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건 분명 도움의 선순환이 있기 때문이리라.
“선생님.”
“네. 말씀하세요.”
“원장님께 대신 전해주세요. 따뜻한 배려 감사히 잘 받았다고. 멋진 의사가 돼서 보답하겠다고.”
“꼭 전해드릴게요.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정화가 아까 준후가 했던 말을 따라 했다.
두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준후는 천산환을 등에 메고 있던 백팩에 집어넣은 후 한의원을 떠났다.
다시 지하철로 향했다.
어쩌면 한의원을 방문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업무를 소화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