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147화 (147/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147화

제27장 스승(2)

제원대 병원 응급실.

응급의학의 이중기는 스테이션에 앉아 하염없이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었다.

5분 전 응급환자를 진찰했다.

지하철 칼부림에 휘말린 환자라고 했다.

그런데 칼부림에 휘말린 것 치고 환자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

우선 의식이 있었다.

기운이 없긴 했지만 말도 어느 정도 할 줄 알았다.

그래서 잠깐 방심했건만…….

피에 젖은 셔츠 자락이 복부를 감싼 것을 확인한 순간.

기겁하고 말았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환자의 바이탈 중에서는 특히 혈압과 맥박이 나빴다.

혈압은 90mmHg/60mmHg으로 저혈압 소견을 보였고.

맥박은 무려 분당 160회에 달했다.

출혈이 발생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바이탈이었다.

필요한 응급처치 후.

중기는 서둘러 환자를 검사실로 보냈고.

복부 CT와 흉부 엑스레이의 촬영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수술은 100퍼센트 확정이었고.

문제는 환자가 상태가 얼마나 나쁜가.

또 환자가 얼마만큼 버텨줄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톡. 톡. 톡.

중기는 검지로 리드미컬하게 테이블을 건드렸다.

초조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그렇게 1시간 같은 10분이 지났다.

중기는 응급 판독이 뜬 환자의 촬영 결과를 살폈다.

어라, 내 눈이 잘못된 건가?

이럴 리가 없는데?

몇 번 눈을 비볐지만 그렇다고 판독 영상이 변할 리는 없었다.

중기는 황당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뱉어냈다.

우선 흉부 엑스레이 영상을 보니.

자상으로 인해 환자는 외상성 기흉을 앓고 있었다.

우측 폐가 살짝 찌그러져 있었다.

진찰할 때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환자가 워낙 편안해 보였으니까 말이다.

저만큼 폐가 찌그렸는데 멀쩡하다면…….

환자는 흉강천자 처치를 받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누가, 어떻게?

119대원조차 흉강천자는 할 수 없거늘…….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기는 복부 CT를 마저 살폈다.

수상하고 의심스러운 건 복부 CT도 마찬가지였다.

환자의 간 좌측 정맥이 찢어져 있었다.

간 좌측 정맥은 간의 핵심 혈관 중 하나라서 손상될 경우, 막심한 출혈이 발생했다.

이송이 늦는다면 환자의 생명을 장담할 수 없었다.

복강이 피바다를 이루고 있을 테니…….

그런데 말이다.

판독 영상에서는 하얀 음영이 찢어진 정맥 부근을 틀어막고 있었다.

혈액이 복강에 피바다를 이루는 최악의 사태를 면한 것이다.

뭐 이런 케이스가 다 있지?

마치 누가 기적적으로 응급처치를 해놓은 것 같잖아.

당혹스런 심정을 가라앉히고.

중기는 다급하게 외상외과에 노티부터 했다.

환자의 상태를 알려주며 응급 수술이 필요함을 알렸다.

잠시 후 검사를 마치고 돌아온 환자.

중기는 환자에게도 수술이 필요함을 알렸다.

환자를 인턴과 함께 수술방으로 올려보냈다.

“아드님이시죠? 설명은 같이 들었으니 수술 동의서 받겠습니다.”

중기는 환자를 보필하고 있던 청년에게 말했다.

“아니요. 저는 사건이 터진 지하철에 있던 승객입니다. 신원대 병원 신경외과 레지던트이기도 하고요.”

“아. 그러셨구나. 워낙 싹싹하게 돕길래 아드님인 줄 알았습니다. 혹시 성함이…….”

“서준후라고 합니다.”

“그럼 준후 선생님이 환자에게 응급처치를 하셨나요?”

“네.”

“환자한테 대체 무슨 처치를 한 겁니까?”

중기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호기심을 해결해 줄 인물이 눈앞에 있었다.

과연 준후는 어떤 대답을 할까.

“지하철에서 흉강천자가 가능할 리 만무하고. 또 간에 이상한 음영도 있던데 말입니다.”

“음영 같은 건 잘 모르겠고. 흉강천자라면 볼펜으로 했습니다.”

“볼펜으로요?”

“네. 환자가 숨넘어가기 직전이라 별수 없더라고요.”

“간도 크시네. 결과가 좋아서 망정이지 안 그랬다간 대참사였을 텐데요.”

“아무래도 하늘이 도운 것 같습니다.”

준후가 멋쩍게 웃었다.

겸손이 몸에 밴 듯한 태도와 목소리였다.

“어쨌거나 덕분에 한숨 돌렸습니다. 준후 선생님 없었으면 환자분 진짜 위험했을 거예요.”

“별말씀을. 저는 경찰분들하고 이야기 좀 나누겠습니다. 그럼 이만.”

“네. 고생하셨습니다.”

중기는 멀어지는 준후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보호자 동의서를 받지 않았지만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상황이 응급이었고.

의식이 있는 환자에게 직접 수술 동의를 구하기도 했으니까.

그나저나 볼펜으로 흉강천자라…….

드라마에서 할 처치를 현실에서 소화하다니.

아무래도 준후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 * *

휴우, 그래도 나름 잘 둘러댔네.

의심하는 눈치는 아니었지.

준후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며 응급실을 나왔다.

지하철에서 했던 처치를 솔직하게 고백할 순 없었다.

내공으로 빨대를 강화해서 환자의 가슴을 찌른 후 폐를 환기시켰다.

내공을 구슬 형태로 형상화해서 환자의 혈관을 막았다.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간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았다.

무공 또는 내공을 사용한 치료와 검사는 앞으로 영영 준후만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외롭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준후는 타인이 자신을 알아주길 바라지 않았기에.

준후가 바라는 건 오로지 환자의 건강과 회복뿐이었기에.

준후는 이번 사건으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본인의 치료와 처치가 응급 상황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는 점이었다.

만약 현장에 준후가 아닌 다른 의사가 있었다면 준후만큼 활약할 수 있었을까.

준후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화자찬하는 것처럼 비칠지 몰랐지만 현실이 그랬다.

자상 환자에게 준후가 했던 처치.

그것들은 전부 준후라서 가능한 것들이었다.

역시 외상외과에도 몸을 담아봐야겠어.

그렇지 형?

형 생각도 나랑 다르지 않지?

준후는 오른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성호의 선물이었다가 비극의 유품으로 변해 버린 팔찌를.

신경외과는 외상외과와도 떼놓을 수 없는 관계였다.

외상 환자들은 보통 머리나 허리, 목.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다쳐서 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신경외과 전문의 자격증을 따면.

외상외과 세부 전공 자격 요건이 주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었다.

“환자분은 무사하답니까?”

응급실 바깥으로 나오자 대기 중이던 경찰이 준후에게 물었다.

대기 중인 경찰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중년이었고 다른 한 명은 청년이었다.

“네. 상태는 양호한 편이고 수술만 잘 끝나면 별 탈 없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미친놈도 제압하고 환자 응급처치까지 하시고.”

“환자분도 참 복이 많으시네요. 현장에서 선생님 같은 분을 만나서 말입니다.”

경찰들이 살짝 고개를 숙여 준후에게 감사를 표했다.

준후도 목례를 했다.

“피곤하시겠지만 사건 당시의 사정을 청취해야 해서요. 상황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준후는 차분하게 설명에 나섰다.

“사람들이 반대 칸에서 몰려오는 것을 보고 저는 오히려 현장으로 이동했습니다. 다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

“의사라서 그런지 환자를 치료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숨을 고르고 준후가 말을 이었다.

“현장에 도착하니 칼을 든 범인은 살짝 정신이 나가 있더군요.”

“…….”

“그래서 몰래 다가가 칼부터 떨어뜨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다음 몸싸움이 펼쳐졌고.”

“…….”

“범인은 뒤로 넘어진 후 완전히 의식을 잃었더군요. 그때부터는 환자분께만 집중했습니다.”

준후는 제압 과정을 적당히 각색했다.

내공과 무공을 익힌 준후는 지구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지만 이 역시 밝힐 수 없는 부분이었다.

사정 청취는 5분 만에 끝났다.

임무를 모두 마친 준후는 경찰차가 병원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다시 제원대 병원 본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의 부름이 있었던 걸까.

공교롭게도 준후의 두 번째 목적지는 제원대 병원이었다.

* * *

제원대 병원 연구동 7층.

준후는 엘리베이터 정면에 있는 연구실 앞에 섰다.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준후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연구실 책상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독서 중인 사내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지만 실제 나이는 50대 초반이었다.

-넌 의사가 아니라 의사 역할을 맡은 배우 같아.

……라고 주변 동기와 스태프들이 준후에게 말하곤 했는데 그 말을 사내에게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새하얀 피부.

총명하면서도 그윽한 눈빛과 눈매.

오똑한 콧날.

군살 없이 탄탄한 체구.

사내의 이름은 박재현.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신경외과의로 꼽히는 명의.

준후는 재현과 구면이었다.

과거 뇌출혈을 앓았던 어머니가 재현에게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준후는 재현에게 신경외과 서적을 선물로 받은 적도 있었다.

“오느라 고생 많았죠? 거기 앉아요.”

재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손으로 책상 앞 소파를 가리켰다.

준후가 소파에 앉고 맞은편에 재현이 앉았다.

“아닙니다. 고생은 무슨…….”

“셔츠에 피가 튄 것 보니까 어떤 사건에 휘말려서 응급처치를 한 것 같은데? 아니에요?”

재현의 날카로운 지적에 준후는 크게 놀랐다.

작게 얼룩진 부분이었는데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꿰뚫어 볼 줄이야.

명의 타이틀은 과연 아무나 다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왔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응급처치도 했고요.”

“딱 보니까 준후 씨도 환타네.”

“하하하. 그게…….”

“근데 그래서 오히려 더 좋지 않아요? 우리 같은 부류는 환자를 치료하는 게 삶의 낙이니까요.”

“네. 솔직히 그렇습니다. 동료들은 절대 이해를 못 하지만요.”

뼈가 담긴 말이 짧게 오갔다.

준후는 재현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파동을 느꼈다.

헌신. 희생. 끈기. 용기 등등.

현대에서 재현처럼 자신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람은 처음 만나보는 준후였다.

그래서 재현을 찾아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선생님,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계속 존대하시면 제가 오히려 불편합니다.”

“그럴까?”

재현이 빙긋 웃었다.

아이처럼 순수한 미소였다.

근황 이야기는 대략 10분 정도 이어졌다.

말은 주로 준후가 했다.

고등학교 1학년생이던 준후가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의대 시절과 인턴 시절은 어땠는지.

신경외과 전공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등등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것도 다 인연인가 보구나. 설마 널 이런 식으로 다시 볼 줄은 몰랐는데.”

“저도 몰랐습니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신경외과 전공은 아예 생각해 본 적 없었고요.”

“준후, 넌 운명을 믿니?”

박재현이 뜬금없이 운명을 화제로 꺼냈다.

“운명은…… 믿지 않습니다.”

“이유는?”

“초월적인 존재나 이치를 믿기에는 현실이 너무 참혹하니까요. 그럼 선생님은 운명을 믿으십니까?”

“난 믿는단다.”

재현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사람의 현재는 과거에서 비롯된 운명이고. 사람의 현재는 미래를 비롯할 운명이지.”

재현의 운명론은 어쩐지 무림에서 만난 선사들의 선문답 같았다.

하지만 재현의 그런 면모에 준후는 더 끌렸다.

신비롭다고 해야 할까.

현자 같다고 해야 할까.

속세를 통찰하는 깊이가 있다고 해야 할까.

“뭔가 현학적이고 어려운 이야기 같습니다.”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더구나. 하지만 알고 나면 간단해. 운명이란 바깥에서 구하는 게 아니라 안에서 구한다는 뜻이지.”

“…….”

“네 신경외과의가 되기로 마음먹었으니 너는 신경외과의가 될 운명이었던 거야.”

“그럼 이 자리에서 선생님을 뵙는 것도 운명이겠군요.”

준후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선생님을 뵙고자 마음먹었고. 선생님은 저를 보고자 마음먹었으니까요.”

“응용력이 좋은걸?”

재현이 소탈하게 웃었다.

“혹시 제가 선생님을 갑자기 찾아뵌 이유도 알고 계십니까?”

“물론. 알다마다.”

“듣고 싶습니다.”

“준후 네가 날 찾은 이유는…… 널 제자로 삼아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겠지.”

재현의 통찰은 이번에도 날카로웠다.

맞았다.

준후는 재현에게 스승이 되어 달라고 부탁할 작정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