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48화
제27장 스승(3)
“마음을 훔쳐보기라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 계획은 어떻게 아셨죠?”
준후는 감탄조로 물었다.
무림도 아니고 현대에서 타인에게 간파당했다는 기분이 들었던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재현이 처음이었다.
“자네 시점에서 자네를 보면 돼.”
“제 시점이라면…….”
“굳이 자네가 왜 타 대학 교수인 나를 찾아왔을까? 그것도 레지던트에게 황금 같은 오프 날에 말이야.”
“…….”
“예전에 수술받은 게 고마워서? 오랜만에 얼굴을 보고 싶어서?”
“…….”
“그건 아닐 거라 판단했지. 감사 표시와 안부 인사는 꾸준히 해왔으니까.”
“…….”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뿐이겠지.”
재현의 논리 구조는 완벽했다.
흠잡을 곳이 없었다.
날카로운 통찰력 때문인지 준후는 재현을 더더욱 스승으로 삼고 싶었다.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느냐.
이는 준후의 노력이 절반.
누구를 스승으로 삼느냐가 나머지 절반을 차지할 것이다.
“그러는 자네야말로 왜 나를 찾았지? 신원대에도 실력 있는 교수님들은 많을 텐데?”
재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래도 교수님만 한 분은 없어서입니다. 신경외과의 세 가지 분과를 다 소화하는 외과의는 국내에서 교수님뿐이니까요.”
뇌 파트.
척추 파트.
정위 신경 파트.
신경외과는 세 가지 분과로 나뉘는데.
전공의가 되면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 과목만을 전문적으로 갈고 닦게 된다.
그런데 재현은 돌연변이였다.
국내 신경외과의 중 세 가지 파트를 전부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이는 재현밖에 없었다.
“자네도 욕심이 보통이 아닌걸?”
“사람은 욕심을 부린 만큼 성장하는 거라 배웠습니다.”
“욕심의 크기를 보여주게.”
“저는 박 교수님을 뛰어넘고 싶습니다. 지금 박 교수님이 이룬 성취에 수부외과(사지 절단 수술 등을 하는 과목)와 외상외과의 솜씨를 더하고 싶습니다.”
“신경외과, 그리고 관련된 과목으로 트리플 보드를 따겠다는 건가?”
“네.”
준후는 거침없이 대답하고.
손목에 착용한 팔찌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제2의 성호.
제3의 성호가 비극적인 사건을 되풀이되는 것을 준후는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자네 같은 야심가는 처음 보는군. 하지만 나는…… 자네의 스승이 될 수 없다네.”
재현의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준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째서입니까?”
“나도 자네에게 도움을 주고 싶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내 일만으로도 벅차.”
“…….”
“수술 환자, 또 수술대기 환자가 줄을 섰지. 심지어 외래 예약은 3달이나 밀렸어.”
“엄청 바쁘시겠군요.”
“그래. 바로 그 이유 때문이라네. 내 환자를 보면서 의국을 관리하는 것도 벅차단 말이야.”
“…….”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자네까지 돌볼 여유는 없다네.”
재현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준후의 시선을 피했다.
재현 역시 거절이 불편한 눈치였다.
하지만 준후는 여기서 물러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재현 같은 사람을 또 만날 순 없을 거라는 걸.
오늘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을 거라는 걸.
“교수님. 그럼 제가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안?”
“네. 제 실력을 뽐낼 기회라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시험관이 아니네만…….”
“제 실력을 확인하고 나면 분명 저를 제자로 삼고 싶은 마음이 드실 테니까요.”
준후는 호기롭게 말했다.
재현에게 시간이 없다면.
없는 시간을 만들고 싶을 만큼, 자신이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면 된다.
그것이 준후의 목적이었다.
“…….”
재현은 팔짱을 낀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윽한 눈빛으로 준후만 쳐다볼 따름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신경외과 명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네, 자신감만큼은 알아줘야겠어. 그런데 그거 아나?”
재현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동료나 후배를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내 맘에 쏙 드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왜 본 적이 없으십니까? 바로 눈앞에 있는데.”
“오호. 계속 그렇게 나오시겠다?”
재현이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쓸어내렸다.
“쉽게 포기할 것 같지도 않고. 그냥 보내는 것도 매정한 것 같으니 자네 제안을 따르지.”
“그 말씀은…….”
“내 나름의 테스트를 진행하겠어. 통과하면 하루를 26시간으로 만들어서라도 자네를 가르치지.”
“…….”
“단, 탈락하면 군말 없이 포기하는 걸세?”
“네. 좋습니다.”
준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테스트가 신경외과 의학 지식이 됐든.
처치나 수술에 관련된 것이든.
준후는 다 자신이 있었다.
포기, 실패, 좌절 같은 단어는 준후와 거리가 너무 멀었다.
* * *
개인 연구실.
재현은 준후가 앉아 있었던 소파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후는 잠깐 자리를 비웠는데.
재현이 준후에게 쉬는 시간을 주었던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당돌한 친구는 처음이군.
재현은 피식 웃고 말았다.
타 대학 병원 과장에게 스승이 되어달라고 찾아오는 맹랑한 레지던트가 준후 말고 또 있을까.
아마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지 않을까.
직접 찾아온 준후의 정성이야 갸륵했지만 재현은 준후를 가르칠 마음이 없었다.
사실 시간이 부족하다는 건 핑계였다.
재현은 그저 준후를 걱정해서 가르침을 거절했을 뿐이었다.
준후의 목표는 지나치게 높았다.
신경외과 세부 분과를 다 정복하는 것도 모자라 수부외과와 외상외과까지 손을 대겠다니…….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꼴이었다.
준후가 말도 안 되는 목표를 추구하다가 몸과 마음이 상하는 것을 재현은 원치 않았다.
자고로 목표란 실현이 가능한 범위를 넘어선 안 됐다.
준후야.
너는 한계라는 걸 알 필요가 있단다.
세상에는 할 수 없는 일도 존재한다는 걸 알 필요가 있단다.
포기할 줄 아는 것도 지혜야.
재현은 소파에서 일어나 집무실 책상으로 돌아갔다.
작년도 신경외과 전문의 시험 문제를 출력했다.
그중에서 난이도가 높은 문제만 30개 정도로 추렸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출력된 인쇄물을 확인하고 재현은 흡족하게 웃었다.
준후는 레지던트 1년 차였다.
4년 차가 치르는 전문의 시험 문제의 답을 맞힐 리 없었다.
즉 재현은 준후를 반드시 떨구기 위해 계략을 짠 것이다.
똑. 똑. 똑.
때마침 들려오는 노크 소리.
재현이 들어오라고 말하자 준후가 연구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본인에게 닥칠 미래를 모르는 준후는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곧 실망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준후에게는 실망이 오히려 좋은 경험이 될 테니까.
“충분히 쉬었니?”
“네. 캔 커피 한 잔 마시고 왔습니다.”
“나도 준비 끝났다. 여기 있는 문제를 70점 이상으로 통과하는 게 테스트야.”
재현은 소파 앞에 놓인 책상에 시험지를 내려다 놓았다.
준후가 담담하게 펜을 쥐고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10분 경과 후.
“다 풀었습니다. 교수님.”
“그래. 어디 실력 좀 확인해 볼까?”
준후가 내민 시험지를 받아들고 재현을 채점을 시작했다.
당연히 기대는 없었다.
첫째로 시험 문제 자체가 악의적이었고.
둘째로 준후가 문제를 너무 빨리 풀었기 때문이다.
답을 몰라서 대충 푼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막상 채점을 시작하면서.
재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시험지에 소나기가 아닌 동그라미만 가득했다. 믿을 수 없게도 준후는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
말도 안 돼.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1년 차가 어떻게 전문의 수준의 지식을…….
놀란 부엉이 눈으로 재현은 준후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듯 준후가 말했다.
“평소 공부를 열심히 해뒀습니다. 신경외과 총론 교재만 10번 넘게 봤거든요.”
“1년 차면 차트나 오더 입력하고 처치를 배우기만 해도 벅찰 텐데?”
재현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수련 기간 중 가장 고된 기간이 바로 레지던트 1년 차였다.
주치의가 되고.
환자와 보호자 인턴을 챙기고.
전공과목에 대한 지식을 쌓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총론을 10번이나 봤다니…….
아니, 애초에 총론을 10번을 봤다고 해서 문제를 풀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달달 암기하듯 본 게 아니라면.
“이 정도는 해야 수부외과와 외상외과까지 정복하지 않겠습니까?”
준후가 재현과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이 정도는 해야 교수님께서 저를 받아 주지 않겠습니까?”
“흠흠. 틀린 말은 아니구나.”
재현은 헛기침을 하고 채점하던 시험지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생사의 기로에 선 환자를 수술할 때도 당황하지 않던 재현이 준후 때문에 동요하고 있었다.
이는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준후의 성취가 상식을 훌쩍 뛰어넘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떨어뜨리려고 작정한 문제에서 만점을 맞을 줄이야.
“시험 성적이 잘 나왔으니 이제 교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아직 점수는 이야기 안 했단다.”
“만점이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래, 만점은 맞단다. 하지만 테스트는 끝나지 않았어. 따라 오거라.”
재현은 소파에서 일어나 연구실을 나왔다.
그 뒤를 준후가 군말 없이 뒤따랐다.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 걸 보면.
재현은 어떤 테스트를 하더라도 통과할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만큼은 쉽지 않을 거란다.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아.
재현의 발걸음에 가속도가 붙었다.
과연 이번에도 준후가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을까.
만약 통과한다면.
그때는 재현도 순순히 준후를 제자로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 * *
교수님도 어지간하셨네.
날 완전히 떼어놓고 싶었던 건가?
앞서 걷는 재현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준후는 피식 웃었다.
신경외과 총론을 달달 외운 준후는 알았다.
시험 문제의 난이도가 극악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무릎을 꿇을 준후가 아니었다.
준후에게는 점혈법이 있었다.
사고의 중추를 담당하는 전두엽.
또 언어를 담당하는 브로카와 베르니케 영역.
이 영역들을 점혈로 자극해서.
준후는 말도 안 되는 속도와 말도 안 되는 이해력으로 신경외과 지식을 섭렵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식이 가물가물할 때는 점혈법으로 해마를 자극했다.
해마는 장기 기억을 감당하는 뇌의 구역이었다.
즉 준후에게는 의학지식의 입력과 출력이 너무나 손쉬웠던 것이다.
그렇게 의학지식이 뒷받침되고.
무림을 경험해서 각종 손놀림에 통달했으니.
어찌 수부외과와 외상외과를 넘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준후에게 신경외과 트리플 보드란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니라 이룰 수밖에 없는 꿈이었다.
어떤 의도이신지 몰라도.
전 반드시 교수님의 제자가 될 겁니다.
교수님의 어깨에 올라 더 높고 더 넓은 세상을 볼 겁니다.
준후는 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터벅. 터벅.
긴 복도를 가로질러.
재현을 따라 도착한 장소는 간이 수술실 같은 곳이었다.
방 중앙에 작은 수술대가 있었고.
그 주변에 보비(전기소작기), 썩션, 이리게이션 등등이 가능한 장비가 갖춰져 있었다.
수납함에는 메스, 혈관겸자, 포셉 등등.
각종 수술 도구가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어때? 신기하지?”
“네. 저희 병원에는 이런 공간이 없어서 더 신기하네요.”
“굳이 신원대뿐만이 아니라 다른 빅5병원에도 없을 거야. 내가 병원에 따로 부탁한 공간이니까.”
재현의 설명에 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의 평판과 위상을 생각하면.
병원 측에서 충분히 지원해 줄 만한 환경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뭘 하면 되는 겁니까?”
간이 수술실을 훑으며 준후가 물었다.
“두 번째 테스트를 진행해야지. 외과의라면 무릇 손놀림이 출중해야 하는 법.”
“…….”
“결국 수술은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하는 거니까.”
말을 마친 재현이 돌발 행동을 했다. 서랍장에서 뜬금없이 달걀 하나를 꺼냈다.
달걀의 윗부분의 껍질을 조심스럽게 깨더니 준후에게 내밀었다.
“삶은 달걀의 흰자막을 따로 줄 테니까 그 막으로 깨진 달걀을 봉합해 봐.”
“…….”
“단 봉합하고 난 뒤, 달걀을 거꾸로 뒤집었을 때 노른자가 흘러나오면 탈락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