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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150화 (150/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150화

제27장 스승(5)

재현은 뒷짐을 진 채 연구실 창가 앞에 서 있었다.

발밑으로 펼쳐진 병원의 풍경을 굽어보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가는 중이었다.

사위가 어두워졌다.

황금빛 석양은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아갔다.

재현의 고요한 마음에 거대한 바위가 떨어졌다.

서준후라는 이름의 바위가.

바위라서 그런지 재현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문은 만만치 않았다.

준후가 떠난 후부터.

재현은 준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준후는 레지던트 1년 차임에도 불구하고.

전문의급 지식을 갖췄으며.

봉합 솜씨는 자신과 필적할 수준이었다. 적어도 달걀막을 봉합하는 처치에서는 말이다.

앞으로 준후가 어디까지 성장할지 재현은 감도 오지 않았다.

신경외과에서 트리플 보드 외과의가 나온 적이 없거늘…….

나온다면 준후가 첫 단추를 꿰매겠어.

재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쳇바퀴처럼 돌던 준후 생각을 멈추고 재현은 자리에 앉았다.

준후에게 메일로 보낼 줄 자료를 정리했다.

자료들은 그야말로 보물이었다.

재현의 피와 땀, 경험치가 그대로 녹아 있는 문서들이었다.

개중에는 다른 외과의들이 아직 소화하지 못할 것 같아서 논문으로 발표하지 않은 자료도 있었다.

하지만 영민한 준후라면 소화할 수 있으리라.

똑. 똑. 똑.

한참 작업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말하자 산적 같은 외모의 중년인이 연구실로 들어왔다.

천영환.

제원대 뇌혈관 질환 교수.

재현의 1년 후배로 사교성이 뛰어나고 넉살을 잘 부리는 친구였다.

“여기 있을 줄 알았어요. 인간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은 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다가 몸 축나겠어요.”

“할 만하니까 하는 거다.”

“맨날 그 소리야. 레지던트한테 들었어요. 어제 수술 중에 코피 흘렸다고.”

영환이 소파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재현을 응시했다.

“의사는 환자 말고 자기 몸도 돌 볼 줄 알아야 한다. 선배가 나한테 했던 말이에요.”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기억이 잘 안 나는걸?”

“참 나, 오리도 아닌데 오리발을 내미시네?”

영환의 농담에 재현은 피식 웃었다.

재현은 영환의 이런 유쾌함이 좋았다. 영환이 곁에 없으면 재현은 하루에 한 번 웃기도 힘들었다.

외과의는 웃을 일이 좀처럼 없었다.

웃음이 허락되지 않은 직업이기도 했다.

“그럼 다음 생에는 오리로 태어나야겠어. 오리 발이나 실컷 내밀게.”

“됐고요. 슬슬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어요?”

“뭘?”

“또 또 또 그런다. 식물인간 환자랑 뇌사 환자 연구하는 거요. 못 고치는 병을 고치려고 하니까 자꾸 선배 몸만 상하잖아요.”

영환의 말 그대로였다.

3년 전부터 재현은 쉬는 날마다 연구실에 나와 식물인간 및 뇌사 환자의 치료 방법에 대해 연구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상관없었다.

“포기할 건 포기할 줄 알아야죠. 이것도 선배가 나한테 한 이야기에요.”

“영환아.”

“왜요?”

“인간은 어떤 면에서는 동물보다 저열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신만큼 위대해.”

“…….”

“인간이 달에 우주선을 쏘아 올릴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니. 식물인간과 뇌사 연구도 마찬가지야.”

“우리 손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요?”

“그래. 할 수 있어.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

대답하는 재현의 눈이 별처럼 빛났다.

굳이 영환뿐만이 아니었다.

신경과·신경외과의는 뇌사와 식물인간을 범접할 수 없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현의 생각은 달랐다.

실제로 재현은 치료에 실마리를 가진 상태였고.

“분명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가.”

말을 마치면서 재현은 마음속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 * *

고요한 새벽녘.

준후는 자기 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운기조식을 펼치고 있는 중이었다.

운기조식 전, 어제 한의원에서 구입한 천산환을 복용했던 덕분일까.

내공이 물줄기처럼 혈맥 구석구석으로 펴졌다가 단전에서 한자리에 모였다.

덕분에 아랫배가 따뜻하고 든든했다.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허물지어다. 만물은 하나로 통할지니 이치의 순환을 가로막는 것은 오로지 그대의 편견과 아집이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되고 비가 오면 비가 되어라. 세상이 그대고 그대가 세상이다.]

운기조식을 하면서 준후는 서씨세가의 상승 심결을 속으로 읊조렸다.

심결이란 마음수련에 필요한 마음의 비급이었다.

검으로 따지면 검법 비급과 같았다.

무림에서 조화경에 경지에 이르렀던 준후는 현대에서라도 못다 이룬 현경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랐다.

현경의 경지에 오른다면 얻을 것이 많았다.

더 많은 내공을 보유하게 되며.

더 많은 무공을 섬세하게 다루는 등등.

그리고 이런 효과는 자연스럽게 환자의 치료로 이어질 것이다.

“휴우.”

한숨을 내쉬며 준후는 운기조식을 마쳤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현경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심결을 마음 깊숙이 받아들였다고 자신했음에도 어쩐지 이전과 변한 것이 없었다.

제자리걸음만 하는 답답한 기분이었다.

내가 현경이란 경지에 집착하고 있는 건가.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건가.

그래서 소득이 없는 걸까.

준후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말이다.

현경의 경지를 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현경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준후는 심결에서 심한 모순을 느꼈다.

드르르륵.

자리에서 일어난 준후는 창문을 열었다. 새벽의 쌀쌀한 바람을 얼굴로 맞았다.

바람은 바람이고 준후는 준후였다.

바람이 준후가 되고 준후가 바람이 되는 경험은 할 수 없었다.

현경의 경지는 아직 짙은 안개 속에 숨어 있었다.

준후의 눈으로는 볼 수 없었다.

힘들겠지만 계속 부딪치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길이 없다면 길을 만들고 말겠어.

각오를 다지고 준후는 책상에 앉았다. 집에 있는 신경외과 총론 교재를 정독했다.

팟! 팟! 팟!

점혈법으로 뇌 신경을 자극하자 교제의 내용이 파도처럼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아직 배워야 할 것도 많았고.

익혀야 할 것도 많았다.

공부를 게을리할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희미하게 열렸다.

어머니의 기척이었다.

“쉬는 날에도 공부밖에 모르네. 우리 아들은.”

“배워서 남 주려고요.”

“원 녀석도. 아침 먹자.”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아직 4시밖에 안 됐는데?”

“아들하고 같이 밥 먹으려면 그 정도 수고는 감수해야지. 빨리 나오렴.”

“네.”

준후는 방을 나와 부엌으로 이동했다. 출근 준비를 마친 아버지가 벌써 식탁에 앉아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준후 너도 잘 잤니?”

“네. 잘 잤습니다.”

“멍! 멍! 멍!”

이제는 새 식구가 된 반려견 똘똘이도 잘 잤다는 듯 우렁차게 짖었다.

똘똘이가 귀여워서 준후는 똘똘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모처럼 가족과 집밥을 먹는데.

어머니가 식사하다 말고 준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할 말 있으세요?”

준후가 먼저 어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아들은 이렇게 잘생겼는데 왜 연애를 안 하나 싶어서.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연애하는 모습을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

“혹시 준후 너…….”

“어머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준후가 고개를 저었다.

준후는 동성애를 나쁘게 보거나 동성애에 편견이 있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준후가 그쪽 성향인 것도 아니었다.

“엄마 아빠한테는 솔직하게 말해도 돼. 준후 너는 누가 뭐래도 소중한 우리 아들이니까.”

“정말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럼 왜 연애를 안 하니?”

“연애할 여유가 없어서요.”

“아들 말대로라면 전국에 있는 의사들은 전부 연애를 못 하게?”

“저는 다른 사람들하고 달라요.”

“응? 다르다고?”

어머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무래도 준후의 말을 오해한 듯했다.

“목표가 남다르다는 뜻이에요. 좀 거창하긴 하지만 저는 세계 최고의 신경외과의가 될 거니까요.”

준후는 간신히 어머니의 오해를 불식시켰다.

원대한 포부를 내비치면서.

“어머니는 제가 연애하길 바라세요?”

“암. 당연하지. 사랑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데.”

“…….”

“기왕이면 준후 네가 일찍 결혼해서 손주나 손녀도 일찍 봤으면 좋겠고 말이야.”

자식이 결혼해서 살림을 꾸리고.

또 자식 키우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모든 부모의 공통된 희망 사항처럼 보였다.

하지만 준후는 부모님에게 떠밀리듯이 연애하고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준후는 사랑하는 사람을 챙겨줄 자신이 없었다.

무림에서 약혼한 천 소저에게도 그랬다.

준후는 적일도에게 복수하기 위해 무공 수련에 매진했고 그 결과 천 소저를 등한시했다.

지금 생각하면 몹쓸 짓이었다.

“준후 체하겠어. 불편한 이야기는 그만하지?”

“안 그래도 그만둘 참이었어요.”

아버지의 훈수에 어머니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식사가 끝난 후.

준후는 씻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섰다.

* * *

신경외과 숙직실에서 수술복과 가운으로 환복하고 준후는 복도로 나왔다.

현재 시각은 오전 6시.

기상 시간이 오전 6시 30분이라 병동은 아직 고요했다.

복도는 스산할 정도로 황량했으며 병실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드르르륵.

준후는 당직실로 들어갔다.

당직 근무 중인 경수가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준후를 바라보았다.

“너는 환자가 없으면 환자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니?”

경수가 혀를 차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데?”

“어제 1호선에서 칼부림 났을 때 그 자리에 네가 있었다면서?”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긴 뉴스에 나왔으니까 알지. 동영상도 쫙 퍼졌어.”

경수의 설명에 준후는 크게 놀랐다.

사건이 이슈가 될 거라는 건 알았다만…….

동영상이 퍼졌다는 건 무슨 뜻이지?

“무슨 동영상인데? 너도 봤어?”

“병동에 있는 사람은 이미 다 봤을걸? 뭐, 너야 현장에 있었으니까 볼 필요가 없었겠지만.”

경수가 이리 와보라고 손짓을 했다.

이에 준후는 경수 뒤에 섰고.

경수는 뉴튜브에 1호선 칼부림 사건을 검색한 후 동영상을 재생했다.

대피를 하지 않은 시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사람이 휴대폰 카메라로 준후의 행동을 촬영했던 모양이었다.

카메라 앵글은 준후의 뒷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휴. 살았다.

잘못됐으면 큰일 날 뻔했네.

영상을 다 보고서 준후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도 영상은 준후가 가해자를 제압하고 환자의 복부를 셔츠로 압박하는 장면까지만 담고 있었다.

가장 우려했던 장면.

빨대로 흉강천자를 했던 장면만 쏙 빠진 것이다.

휴대폰 배터리가 모자라서인지.

준후의 치료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자리를 피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너 진짜 간도 크다. 어떻게 정글도를 든 미친놈한테 달려들 생각을 했어?”

경수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히 경수 눈에는 준후가 경솔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준후는 지구 최강의 인간이 아니던가.

내공과 무공으로 단련된.

준후는 저런 놈 수십 명이 달려들어도 다 때려눕힐 자신이 있었다.

“글쎄. 환자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망설임이 없어지더라.”

“앞으로는 제발 좀 망설여라. 혹시라도 크게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뭐야?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그래. 걱정했다. 네가 다치면 네 일을 내가 다 맡아서 해야 하잖아.”

경수가 투정조로 말했다.

“영상 본 소감은 그게 끝이야?”

“뭐, 굳이 하나 더 꼽자면…… 앞으로 너한테 까불면 안 되겠다는 정도?”

“알았으면 까불지 마라.”

경수의 농담을 준후도 농담으로 응수했다.

“아 참, 네 뉴튜브 채널도 확인해 봐. 은하가 그러는데 네 채널 이번 사건으로 또 떡상 각이라던데?”

“오케이.”

준후는 자리에 앉아 자신의 뉴튜브 채널에 접속했다.

과연 경수의 말대로였다.

하루 만에 구독자가 무려 5만이 늘었던 것이다.

-의인께 인사를 올리러 왔습니다. 꾸벅. 꾸벅.

-잘 생기고 공부 잘하시는 줄은 알았는데 피지컬도 개쩐다. 사기 캐릭 ㅠㅠ

-살신성인하시는 모습,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용기 있는 분이네요. 동영상 정주행하면서도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까요?

-이 의사분, 얼마 전에는 막잼 폭로 영상도 올리셨어요. 그것도 꼭 보세요. 강추!!!!!

최근 업로드한 동상에 댓글이 쏟아져 내렸다.

댓글 수가 10만에 육박했다.

아무래도 채널의 인기는 당분간 식지 않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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