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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155화 (155/424)

155화

제28장 새 바람(5)

털썩.

동훈은 휴게실 소파에 주저앉듯이 앉았다.

길고 험난했던 수술의 여파가 뒤늦게 밀려왔다.

허리, 팔, 손 등의 관절이 마디마디 쑤셨다. 미세 현미경을 바라보던 두 눈은 사막처럼 건조하고 메말랐다.

그래서일까.

한량처럼 퍼질러 눕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동훈은 지금 이대로 눈 감고 누우면 1분 안에 잠들 자신이 있었다.

성상세포종의 종양절제술을 마친 후.

동훈은 혼자 수술방을 빠져나왔다.

머리를 닫는 일은 레지던트들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고.

동훈에게는 다음 수술 스케줄도 있었기 때문이다.

소파에 앉아 숨을 고르다가.

동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캔 커피를 뽑아서 마셨다.

달콤 쌉싸름한 맛에 몽롱했던 의식이 차차 맑아졌다.

의사 피의 절반은 카페인으로 이루어졌다.

의사끼리 주고받는 이 농담은 절반이 진담이었고, 절반이 자조였다.

커피나 에너지 음료 없이.

그 살인적인 스케줄을 어찌 버텨내겠는가.

동훈은 커피를 단번에 비우고 재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대를 하지 않았건만 재현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교수님.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무슨 일 있으세요?

재현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는 자네야말로 웬일이야? 이 시간에 재깍재깍 전화를 다 받고? 자네도 수술 끝나고 쉬는 중인가 보지?”

-정확하십니다. 오늘은 통하는 날이군요.

“그런가보군.”

-서울에서 수술 데뷔전을 치르는 날로 아는데…… 별일 없으셨죠?

“별일이 있었다가…… 없어졌지.”

동훈은 방금 끝낸, 다사다난했던 수술 과정을 짧게 요약해서 전했다.

0수다를 떨다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건 그렇고 준후는 어떻게 된 거야?”

-준후에게 문제라도 있었나요?

“어시스트 솜씨가 장난 아니더군. 양손을 자유자재로 쓰고. 수술 과정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꿰찼고.”

-…….

“어디 그뿐이었는 줄 알아? 기저 동맥에 발생한 출혈의 시야를 확보한 것도 준후고. 소작한 것도 준후였다니까.”

준후 이야기를 꺼내면서 동훈의 언성이 차차 올라갔다.

그때의 흥분과 감격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살다 살다 레지던트 1년 차를 구원투수처럼 느껴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거, 교수님이 한 게 아니라 준후가 한 거였습니까?

“그렇다니까? 한 손으로 내시경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보비를 들고.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했단 말이지.

-저도 놀랍군요. 제 수술 스타일을 기억한 것도 모자라 직접 펼쳤다니…….

재현도 퍽 놀란 눈치였다.

하긴 준후가 재현의 제자라고 해도.

재현이 준후를 감독하며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근무하는 병원이 달랐으니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자네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어. 자네가 준후를 가르쳤고 준후가 그걸 똑 부러지게 소화해서 위기를 넘겼으니까. 고맙네.”

-별말씀을…… 어쨌거나 준후가 성장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기쁘군요.

“자네도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제자한테 따라잡히지 않으려면 말이야.”

동훈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오늘 동훈이 두 눈으로 확인한 준후의 잠재력은 어마어마했다.

실전 경험만 좀 더 받쳐준다면.

재현의 왕좌를 위협할 만했다.

로봇 팔처럼 떨림이 없고 정확한 손놀림(심지어 양손 다).

위기에 더 빛나는 위기 관리력.

냉정하고 침착한 태도까지.

어시스트 하던 준후를 떠올리면.

동훈은 많이 과장해서 경외감마저 느꼈다.

수술방에서 준후의 존재감이 그만큼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확실히 재능이 뛰어난 친구지만 아직 저에 비하면 멀었습니다. 그 친구에게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으니까요.

“준후에게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고?”

-네.

“그게 뭔가?”

-하하하. 공짜로 알려드릴 순 없죠. 어쨌거나 연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엔 제가 연락드리죠.

“그래. 자네도 고생하고.”

재현과 통화를 마친 후 동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게실을 벗어나 다시 수술방으로 이동했다.

준후에게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라…….

재현은 대체 준후의 어떤 점을 봤던 걸까.

말 좀 해주면 어디 덧나?

하여간 여우 같은 친구라니까.

* * *

4층 휴게실.

장장 7시간의 대 수술을 마친 준후는 희준과 휴게실을 찾았다.

소파에 앉아 생명수와 같은 캔 커피를 마셨다.

“아이고, 죽겠네. 몸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

희준이 앓는 소리를 하며 자기 손으로 자신의 손목과 허리 등을 매만졌다.

“준후, 넌 오늘도 멀쩡해 보인다?”

“저도 피곤해요. 티를 안 내려고 할 뿐이지.”

“그 말은 내가 힘든 티를 내고 있다는 뜻?”

“어…… 말이 그렇게 되나요? 그럼 안 피곤할 걸로 할게요.”

준후의 농담에 희준이 피식 웃었다.

희준이 피곤해하길래.

준후는 희준의 팔, 다리, 허리, 목, 어깨에 차례대로 추궁과혈을 해주었다.

“어…… 으…… 아…….”

무림표 특급 마사지에 희준이 야릇한 신음 소리를 내었다.

마사지가 끝난 후에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키야. 역시 죽여주네. 죽여줘. 준후 네 마사지 솜씨는 세계 제일이라니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잠시 대화가 끊긴 타이밍.

준후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방금 끝난 수술을 복기했다.

동훈의 수술법을 초식으로 암기하고.

스승 재현의 비급을 통해 위기 상황에 돌파구를 찾아내고.

또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 위기를 극복하는 등등.

오늘 수술은 평소 수술보다 훨씬 버라이어티했고, 그래서 더 만족스러웠다.

본디 성장에는 위기가 필요한 법이었다.

위기를 뛰어넘는 순간이 곧 성장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너 박재현 교수님 제자였어?”

희준이 화제를 돌렸다.

“아, 네. 얼마 전 오프 때 직접 찾아가서 부탁드렸거든요.”

“간도 크다. 어떻게 타 대학 교수님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달라고 할 수 있어? 난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것 같은데.”

“그만큼 초조했으니까요.”

“어떤 부분에서?”

“저는 항상 초조해요. 제 손으로 감당할 수 없는 환자를 마주할까 봐.”

“…….”

“그 환자에게 아무것도 못 해주고 그 환자를 무기력하게 바라봐야만 할까 봐.”

“그 정도면 걱정을 사서 하는 거 아니야?”

“제 생각도 그래요. 어떻게 보면 바보죠.”

준후는 씁쓸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준후가 그저 성실하고 꾸준하게 공부를 하는 것처럼 보여도 준후의 속은 그렇지 않았다.

준후의 가슴에는 늘 불안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특히 성호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는 성장하는 것에 집착하게 되었다.

“아 참, 선배. 제가 박 교수님 제자라는 건 비밀로 해주세요.”

“왜? 자랑스럽게 말할 일 같은데.”

“제가 혹시라도 실수하면 박 교수님까지 싸잡아서 욕먹을까 봐요.”

“비밀은 지켜줄게. 마사지만 제때제때 해주면.”

“그거야 문제없죠.”

“난 다음 수술 어시스트 있어서 먼저 일어난다. 넌 좀만 더 쉬었다가 올라와.”

“네. 선배.”

희준이 떠나면서 휴게실은 한층 더 휑해졌다. 고요하다 못해 쓸쓸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슬슬 잃어버린 체력과 집중력을 회복해 볼까.

준후는 영양제를 챙겨 먹고 두 눈을 감은 후 운기조식을 펼쳤다.

7시간의 수술을 펼친 피로가 가시는데 필요한 시간은 고작 20분이었다.

* * *

“선배! 오랜만이에요!”

운기조식을 끝낸 준후가 소파에서 일어서려던 순간.

벌컥!

휴게실 문이 열리며 은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하는 번개처럼 준후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은하는 준후가 신경외과에서 막 레지던트 근무를 시작했을 때.

신경외과에서 첫 턴을 가졌던 인턴이었다.

“진짜 오랜만이네, 반갑다. 지금은 어디서 수련 중이야?”

“성형외과요.”

“성형외과면…… 1년 차에 유승범이라고 있지 않아?”

“네. 맞아요. 선배 동기예요?”

“동기라고 보기에는 조금 애매하지.”

준후의 미간이 좁아졌다.

유승범.

의대 시절부터 준후와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웠던.

카데바 사진을 SNS에 올렸다가 뭇매를 맞고.

진료부원장인 아버지의 후광으로 이를 무마하려고 했던 희대의 망나니.

작년의 승범은 인턴 배 봉합 대회에서 준후에게 얄팍한 술수를 부리다가 된통 당하기도 했다.

“승범 선배, 재수 없어요. 엄청 거만하고요. 항상 제멋대로라니까요. 아버지가 진료부원장이라서 그런가 봐요.”

“그 거지 같은 버릇은 아직 못 고쳤나 보네. 네가 고생이 많다.”

“몸은 성형외과가 조금 더 편한데 마음은 신경외과에 있을 때가 더 편했던 것 같아요. 근데 선배.”

“응. 왜?”

“저 살찐 것 같지 않아요?”

은하가 본인의 몸을 훑으며 물었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성형외과 근무하면서 초콜릿을 왕창 먹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살찐 것 같아요. 군살이 붙고 몸이 둔해진 느낌이에요.”

“지금도 보기 좋아.”

“정말요?”

은하가 꺄르륵 꺄르륵 웃었다.

인간 비타민답게 은하는 주변 사람을 편안하고 즐겁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성호도 은하랑 성격이 비슷했는데…….

생각이 그쯤 미치자 잠시 잊고 있던 상처가 욱신거렸다.

벌컥!

때마침 휴게실 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아영이 나타났다.

아영은 화기애애하게 대화 중인 두 사람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영아, 어서 와. 무슨 힘든 일 있었어? 표정이 안 좋은데?”

“힘든 일이…… 있었지.”

아영이 준후 옆자리에 앉아서 팔짱을 꼈다.

순간 교차하는 아영과 은하의 시선.

두 사람의 시선에서.

호적수를 만난 듯한 긴장감을 느꼈던 건 단순히 준후의 착각이었을까.

아영은 합류를 하고도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하는 사람은 주로 은하였고 준후는 맞장구를 치는 편이었다.

“저 먼저 일어나볼게요. 두 분 다 수고하세요.”

은하가 눈을 찡긋하곤 휴게실을 떠났다.

그제야 아영이 입을 뗐다.

“은하, 참 귀엽고 예쁘지? 내가 남자라도 저런 스타일을 좋아할 것 같아.”

“갑자기?”

“그냥 그렇다고.”

어쩐지 토라진 듯한 표정의 아영이었다.

“확실히 은하가 인기 많은 스타일이긴 해. 구김살도 없고 밝고 싹싹하니까.”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래도 난 아영이 네가 더 좋아. 은하가 들으면 섭섭해할 수도 있겠지만.”

준후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아영의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아니, 여기서 이렇게 치고 들어온다고?

은하의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치기 시작했다.

“막 뜨거운 연애 감정 같은 건 아니지만…… 힘든 의사 생활을 헤쳐 나가는 데는 아영이 너처럼 속 깊고 차분한 사람이 좋지.”

준후의 이야기를 듣고 아영은 생각했다.

잘 나가다가 옆길로 샜다고.

그래도 준후가 은하보다 자신을 더 좋다고 하니 기분은 좋은 아영이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은하를 향했던 질투와 준후를 향했던 서운함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아영은 자신도 모르게 팔짱을 풀었다.

“준후 너 많이 컸다? 이제 낯 뜨거운 소리도 할 줄 알고?”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진심은 직선으로 전해야 하는 법이라고 하더라.”

“…….”

“아까 힘든 일 있었다고 했지? 혹시 준식 선배가 다시 괴롭혀?”

준후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영과 얼굴을 가까이했다.

갑자기 확대되는 준후의 얼굴.

아영은 부끄러워서 시선을 옆으로 살짝 돌렸다.

사실 힘들다고 한 건 거짓말이었다.

은하와 준후가 깨가 쏟아지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표정을 관리할 수 없어서 한 말이었다.

“아…… 아니. 그런 거 없어. 저번에 그 사건 이후에 내가 준식 선배 꽉 잡고 있거든. 준식 선배, 이제 내 손 안에 있어.”

“이야, 멋있다. 아영이.”

준후가 엄지를 치켜들어가며 아영을 치켜세웠는데.

그 모습이 어쩐지 햇살처럼 밝게 보이는 아영이었다.

우리 관계,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용감하게 내가 한 발짝 더 다가가 볼까.

아영의 마음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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