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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156화 (156/424)

156화

제29장 미션(1)

터벅. 터벅.

중환자실 라운딩을 마치고 준후는 병동으로 복귀 중이었다.

문득 바라본 창가는 오렌지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석양이 퇴근 중이었다.

태양도 출퇴근을 하는데 정작 나는 출퇴근이 없구나.

생각이 그쯤 미치자 실소가 터졌다. 성상세포종 수술이 힘들긴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수술 시간만 장장 7시간의 한나절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준후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영양제 + 운기조식 조합으로 체력과 집중력을 한결같이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본관 3층 복도는 한적한 편이었다.

현재 시간은 오후 5시 50분.

외래 진료가 끝나가는 시간이라 외래 환자와 보호자 등이 병원을 떠나는 타이밍이었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의사 아니면 간호사였다.

준후는 복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할 일 없이 주변을 살피는데.

허리가 굽고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눈에 띄었다.

노인 역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준후와는 목적이 달라 보였다.

준후는 노인의 곤경을 금방 눈치챘다.

그래서 노인에게 다가가 망설임 없이 말을 걸었다.

“어르신. 어디 가세요?”

“갑상선 센터로 6시까지 오라는데 여기 맞죠?”

“저런, 잘못 오셨어요. 갑상선 센터는 별관에 있어요. 여기는 본관이고요.”

“이상하네? 제대로 온 것 같았는데?”

노인이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노인은 병원 미아였다.

대학병원에 방문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대학병원은 웬만한 복합 쇼핑몰보다 내부가 복잡했다.

각종 외래 진료실.

각종 검사실.

게다가 편의시설들까지 제각기 흩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건물 역시 본관, 별관, 암 병동, 어린이 병원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젊은 사람이라면 안내도와 입간판 표지 등을 보며 목적지를 잘 찾아가겠지만, 어르신들의 경우엔 그게 영 힘들었다.

“어르신, 6시까지면 10분밖에 안 남았어요.”

“별수 있나요. 오늘 진료는 포기해야죠. 나이를 먹으니까 원…… 머리가 빠릿빠릿하지 못해서.”

노인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르신 잘못이 아닙니다. 병원이 워낙 미로처럼 복잡해서 그래요.”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헛걸음하면 너무 아까우니까 업히시죠.”

준후는 노인에게 등을 보인 후 허리를 살짝 굽혔다.

“선생님. 설마…….”

“빠르고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폐를 끼칠 순 없어요. 선생님도 바쁠 텐데.”

“어르신을 모셔드릴 여유는 있습니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업히세요.”

준후의 독촉에 못 이겨 노인은 결국 준후의 등에 업혔다.

“혹시 허리나 목이 안 좋으신가요?”

“아니요. 딱히…….”

“좋습니다. 그럼 제 목 꽉 잡으세요. 총알 같이 달려갑니다.”

파바바밧!

노인을 업고서 준후는 번개처럼 복도 중앙으로 달려나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도 아까웠으므로 중앙 계단을 통해 빠르게 1층으로 내려갔다.

본관 1층은 3층보다는 사람이 많았다.

아직 병원에 남은 외래 환자와 입원환자가 있었던 것이다.

전속력으로 달리기는 무리인 상황.

그렇다면 다 방법이 있지.

준후는 별관과 연결된 통로를 향해 다시 달렸다.

호접보를 밟으면서.

호접보는 직선보다는 곡선, 방향전환에 특화된 보법이었다.

사피인들을 일대 다로 상대했을 때 큰 빛을 발했던 보법이었다.

“으…… 서…… 선생님. 너무 빨라요. 이러다가 다른 사람하고 부딪치겠어요!”

노인이 등 뒤에서 새 된 비명을 질렀다.

노인의 우려대로였다.

준후가 달려가는 정면에 건장한 청년이 한 명이 서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충돌이 확정이었다.

하지만 준후는 달리던 도중.

반 시계 방향으로 빙그르르 몸을 회전시켰다. 청년과의 충돌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이쯤이야 준후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검법 다음으로 자신 있는 게 보법이었으니까 말이다.

준후는 나비처럼 사뿐사뿐한 동작으로 진로에 있는 환자와 보호자 스태프들을 가뿐하게 피해냈다.

그 와중에도 보법의 속도는 줄지 않았다.

준후는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진로를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과 부딪칠 자신이.

“무서우시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세요. 이렇게 안 달리면 진료 시간에 못 맞춥니다.”

“그…… 그래도 너무 빠른데요?”

노인이 기가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노인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준후가 달리면서 발생한 바람에 나풀거리고 있었다.

“편하게 사람 택시에 탑승했다고 생각하세요.”

준후는 사람들을 피해 별관과 이어진 통로에 접어들었다.

순식간에 통로를 통과해 별관에 도착했다.

다시 찾은 중앙 계단.

훌쩍!

준후는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반 층짜리 층계를 뛰어넘었다.

그러니까 계단 15개를 한 번에 뛰어넘은 것이다.

계단을 단번에 뛰어넘은 직후.

준후는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혔다.

단전에서 끌어내린 내공을 발바닥에 실었다.

천근추.

몸의 무게 중심을 잡는 것과 동시에 몸의 충격을 흡수하는 무공.

준후야 고라니처럼 계단을 뛰어다녀도 상관없었지만.

등 뒤에 업힌 어르신은 충격을 받을 수 있었기에 세심하게 무공을 펼쳤다.

“도착했습니다.”

층계를 순식간에 정복하고 준후는 별관 3층 갑상선 센터 접수대 앞에 노인을 내려주었다.

준후의 질주에 놀랐던 걸까.

다리를 휘청거리는 노인.

준후는 노인이 넘어지지 않도록 어깨를 잡아주었다.

“괜찮으세요?”

“마…… 많이 놀랐지만 괜찮아요. 근데 지금 시간이…….”

“5시 55분입니다. 아슬아슬하지만 늦지는 않으셨어요.”

“고마워요. 선생님. 선생님 덕분에 살았어요.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다음에 와야 했는데.”

노인이 고개를 숙여 가며 감사를 표시했다.

“천만에요.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이쪽으로 오세요.”

준후는 내친김에 노인이 접수하는 것까지 도왔다.

접수를 끝낸 노인이 대기실에 앉는 것을 보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선생님. 진짜 착하시네요. 환자분을 업고 여기까지 안내해 주신 거예요?”

스테이션에 있던 외래 간호사가 준후에게 물었다.

“네. 길을 잃으셨길래 도와드렸습니다.”

“하긴 대학병원이 원체 복잡해야죠. 젊은 사람들도 헤매는데…… 고생하셨습니다. 준후 선생님.”

“저를 아세요?”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닐까요?”

간호사가 웃으며 외래 전광판을 가리켰다.

전광판에는 병원 홍보 영상이 나오고 있었는데 마침 홍보 영상 속에도 준후가 나오고 있었다.

외모빨(?)로 선발된 준후가 인턴 때 촬영한 영상이었다.

괜히 낯이 뜨거워지는 준후였다.

“선생님도 수고하세요.”

준후는 후련한 마음으로 병동으로 복귀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후.

친절 직원 추천함에 준후의 이름이 적힌 설문지 한 통이 접수되었다.

[친절하고 젊은 의사 선생님이 제가 길을 잃은 걸 보고 직접 진료실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심지어 저를 업고서 말입니다. 짜릿하고(?) 잊지 못할 경험을 시켜준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 *

그 날 저녁, 당직실.

책상에 앉은 준후는 두 눈을 감은 채 두개골 모형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경수가 한마디 했다.

“너 요즘 이상한 취미 생겼더라?”

“무슨 취미?”

“지금 하는 거. 대체 왜 두개골 모형에 손을 얹고 있는 건데? 살다 살다 그런 변태 같은 취미는 처음 본다.”

경수가 준후를 이해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까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이제 살짝 무서워지려고 하는데?”

“내가…… 준후로 보이니?”

준후가 공포 영화 귀신 흉내를 내자 경수가 기겁했다.

몸을 들썩거리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으이 씨. 짜증나게시리. 난 간다. 너 혼자 잘 먹고 잘 놀아라.”

당직실을 떠나는 경수를 지켜보며 준후는 피식 웃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준후의 행동이 괴짜처럼 보일 것이다.

두 눈을 감고 두개골 모형에 가만히 손을 얹은 모습을 어찌 좋게 볼 수 있으랴.

하지만 준후의 남다른 행동에는 명확한 목표와 이유가 있었다.

준후는 두 달 전부터 꾸준히 수련 중이었다.

내공 종양 제거술을.

환자 머릿속에 흘려보낸 내공을 메스처럼 날카롭게 벼려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수술로 제거하지 못하는 부위(뇌간 등등)의 종양을 제거하고.

또 감마 나이프로 제거하지 못하는 종양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내공 종양 절제술이 필수였다.

준후는 모형에서 손을 뗐다.

마우스를 클릭해 한 환자의 차트를 모니터에 띄웠다.

노현민.

나이는 32세.

언어장애, 두통, 경련을 호소해 신경과에서 진료받은 후 MRI 검사를 통해 악성 뇌교종 확진을 받았다.

현재 환자의 뇌간에는 4cm x 4cm 크기에 뇌교종이 자리 잡고 있었고.

내일 신경외과의 감마 나이프 수술을 통해 종양을 절제할 예정이었다.

이 환자가 기댈 곳은 나뿐이야.

내가 뭔가를 해내지 않으면 안 돼.

차트를 바라보는 준후의 눈빛이 엄숙했다.

뇌간에 발생한 종양은 수술로 제거할 수 없었다.

호흡을 비롯한 다양한 중추 신경이 있어 종양 제거 중 환자가 사망할 확률이 높아서였다.

감마 나이프 수술 또한 한계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크기가 3cm 이상인 종양에서 감마 나이프 수술의 효율은 좋지 못했다.

그래서 준후의 계획은 이랬다.

자신이 내공 종양 절제술을 통해 종양을 3cm 이하로 잘게 쪼개고.

잘게 쪼개진 종양을 방사선 감마 나이프로 제거한다.

계획은 야무졌지만 계획대로 치료가 될지는 미지수였다.

내공으로 벼린 심검으로 종양이 아닌 뇌간을 베어버린다면 환자는 준후 손에 죽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환자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준후는 큰 심리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다.

실패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질 만큼 두려웠지만 준후는 계획을 밀어붙이기로 했다.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그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었다.

쓰으읍.

후우우.

준후는 크게 심호흡하고 다시 두개골 모형에 손을 얹었다.

경수 때문에 흐트러진 정신을 한 점에 모았다.

그렇게 10분이 지났다.

준후는 조심스럽게 두개골 모형을 분리했다. 그 안에 있던 6조각의 뇌 모형도 분리했다.

뇌간에 접착제로 붙여놓은 초콜릿 조각이 깔끔하게 도려 나가졌다.

뇌간에 상처는 없었다.

연습이 실전 같다면 불가능한 도전은 아니었다.

* * *

문제의 아침이 밝았다.

오전 컨퍼런스, 회진, 차트 입력 업무 등등으로 준후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준후의 머릿속은 오로지 내공 종양 절제술뿐이었다.

내공 종양 절제술을 완성해야만 뇌종양 수술을 완전하게 졸업할 수 있을 테니까.

“집 잘 보고 있어라. 나, 감마 나이프 센터 갔다 온다.”

오전 11시가 되었을 때.

준후는 당직실을 떠나 본관 2층 감마 나이프 센터로 향했다.

감마 나이프는 방사선 치료의 일종이었다.

일반 방사선 치료와 달리 한 번에 강한 방사선을 쏘아 종양을 죽이는 치료법이었다.

센터에 도착하자 환자는 이미 대기 중이었다.

대기실에 보호자와 함께 앉아 있었다.

한참 팔팔할 30대 초반의 환자는 시들어 버린 풀 같았다.

얼굴에도, 눈빛에도, 행동에도 생기가 없었다.

32세에 3기 뇌종양이라니.

운명이란 어찌 이리 기구하단 말인가.

병원에서 근무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준후는 세상의 부조리함을 더 자주, 더 똑똑히 지켜보게 되었다.

“선생님. 오늘 수술은 무사히 잘 진행되겠죠?”

보호자가 준후를 발견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보호자의 목소리가 애틋했다.

“치료는 계획대로 잘 진행될 겁니다. 최선을 다할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하필이면 수술이 불가능한 부위에 종양이라니…… 하늘이 원망스럽네요.”

“저도 안타깝습니다. 보호자분은 대기해 주시고 환자분 이쪽으로.”

준후는 환자를 부축해서 감마 나이프 센터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실이라고는 했지만.

감마 나이프 수술실은 일반 수술실과 달랐다.

MRI 검사실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입구 쪽에 책상과 탁자가 놓여 있었고 수술실 중앙에 원통형의 감마 나이프 방사선 치료기가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수술대나 메스, 거즈, 보비, 리트랙터 같은 수술 도구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한편 통유리를 통해 수술실 건너편의 치료 계획실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직 수술 준비 시간이었기에.

치료 계획실에 사람은 없었다.

정위신경외과 교수도, 다른 레지던트도 보이지 않았다.

준후는 환자를 의자에 앉히고 가볍게 대화를 나눴다.

“몸 상태는 좀 어떠세요?”

“최…… 최악이에요. 머리에 지진이 난 것 같아요. 흔들리는 것 같고…… 어지럽고.”

“일단 가볍게 긴장부터 풀까요?”

환자의 등 뒤로 가서 준후는 환자의 머리를 추궁과혈로 풀어주었다.

팟! 팟! 팟!

내친김에 진통 점혈까지 펼쳤다.

“어? 선생님. 머리가 좀 괜찮아졌어요. 아까보다 훨씬 나아요. 마음도 좀 진정되고요.”

“수술이 잘 되려나 봅니다.”

“근데…… 교수님이 그랬어요. 감마 나이프 수술이 완벽한 건 아니라고.”

환자가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완벽하지 않은 수술, 제가 완벽하게 만들어 드릴 테니까.

환자분이 더 건강하고 오래 살게 만들어 드릴 테니까.

준후는 속으로 대답했다.

환자를 안정시킨 후, 준후는 손날로 환자의 목 뒤를 가볍게 툭 쳤다.

축 늘어지는 환자의 팔다리.

환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의식을 잃었다.

턱!

준후는 환자의 머리에 손을 얹고 내공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처음 펼쳐보는 실전에서의 내공 종양 절제술.

이제 환자의 경과는 오롯이 준후의 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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