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제29장 미션(3)
나이를 먹으면 시간이 빨리 간다고 한다.
하루가 순식간에 지난다고 한다.
무림에서도 그렇고.
현대에서도 그렇고.
중·장년층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었다.
그런데 최근 준후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하루가 쏜살같이 빠르고.
틈틈이 사용하는 24시간도 부족한데.
앞으로 나이를 먹으면 시간은 얼마나 더 빨리 지나갈까.
눈 한 번 깜빡하면 하루가 지나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동안 준후의 일과는 숨 쉴 틈 없이 바쁘고 빡빡했다.
기본적인 레지던트 1년 차 업무를 처리하면서 개인 수련에도 힘썼다.
우선 스승 재현이 챙겨준 뇌종양 비급들.
그러니까 다양한 정리 자료와 논문을 머릿속에 때려 박았다.
신경외과의로서.
준후의 첫 번째 타도 대상은 뇌종양이었으니까.
그리고 틈틈이 신경외과 총론과 영상 판독, 해부학 등도 공부했다.
의학 지식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법.
의사만큼 아는 것이 힘인 직업은 없었다.
아는 것이 생명과 직결된 직업은 없었다.
공부를 하면서도 준후는 내공과 무공에 관한 수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매일 새벽.
준후는 천산환을 복용하고 운기조식하며 차곡차곡 내공을 쌓았다.
내공 수련은 은행 적금 같았다.
당장 목돈은 되지 않았지만 이자가 불어나는 것 같은 모습이라 지켜보면 흐뭇했다.
다른 외과의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오로지 무림을 경험한 준후만 할 수 있는 일이기에 더욱더 열심이었다.
내공 종양 조영술.
또 내공 종양 제거술이 바로 그것이었다.
회를 거듭할수록.
다양한 케이스를 경험할수록 두 가지 기술은 빠르고 정교해졌다.
그 덕분일까.
비록 준후의 내공 보유량은 무림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한참을 못 미쳤지만, 내공 사용의 정교함은 무림에 있을 때보다 정교해졌다.
특히 심검(心劍)을 다룰 수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었다.
한편 각종 뇌종양 수술 어시스트에 들어가며 실전 경험을 쌓은 것도 준후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봄에 씨앗을 뿌려.
여름에 성장시키고.
가을에 곡식을 추수하는 것이 농부의 삶인데.
준후의 삶은 어느새 농부를 닮아 있었다.
계절은 흐르고 또 흘러.
준후가 신경외과 레지던트 1년 차를 시작했던 쌀쌀한 겨울이 지나 봄, 여름이 가고 가을이 찾아왔다.
병원 주변에 나무들은 울긋불긋 단풍 옷을 입었다.
하늘은 호수처럼 맑고 깊었으며.
바람은 포근하고 시원했다.
준후는 이제 뇌종양에 관해서라면 거의 척척박사가 되었다.
교수처럼 수술을 집도해도 하등 문제가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
레지던트라는 신분 때문에 현실적으로 집도가 불가능하긴 했지만.
동기들이 레지던트 1년 차 업무에 적응할 무렵에 준후는 남모르게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냈다.
* * *
[Pump it!
Pump it!
Pump it up!
jump it!
jump it!
jump it up!
너를 속박하고 있는 것들을 벗어던져.
체면? 주저? 눈치? 그딴 것들 집어치워.
에라 모르겠다 그냥 고삐 풀고 춤춰.
다시 돌아오지 않는 오늘 맘껏 즐겨!]
그 날 새벽.
신경외과 컨퍼런스 룸에서는 흥겨운 댄스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악에 맞춰 준후는 최신 댄스를 소화하고 있었다.
무림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무공을 익혔던 준후였다.
최신 댄스를 한 번 쓱 보고 따라 추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긴 팔과 긴 다리에서 나오는 시원시원하면서도 호쾌한 춤선.
자로 잰 것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는 박자 감각과 리듬 감각.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안무 연결까지.
준후의 춤은 내로라하는 아이돌의 수준을 초월해 있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준후는 이미 인간을 초월한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준후는 1분 남짓 춤을 추고서 음악을 껐다.
휴대폰 동영상 녹화도 껐다.
뭐, 이만하면 나쁘지 않네.
본인의 춤 영상을 확인한 후 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중 하루.
그 하루 중에 또 30분.
준후는 다양한 최신 댄스곡들을 직접 추고 일반 영상 또는 뉴튜브 쇼츠에 올렸다.
당연하게도 뉴튜트 채널의 성장을 위해서였다.
준후 채널의 원투 펀치는 외모빨(?)을 세우는 스터디 영상과 댄스 영상이었는데.
최근에는 스터디 영상보다 댄스 영상의 반응이 더 좋았다.
댄스 영상이 주는 특유의 생동감 때문일 것이다.
현직 의사가 의사 가운을 입고.
맛깔나고 기깔나게 춤을 추니 신기하면서도 참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뉴튜브의 채널의 구독자 60만.
일주일에 세 개씩 올라가는 영상의 평균 조회수는 40만.
준후의 채널은 어느새 어엿한 중견 채널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일까.
뉴튜브 수익이 레지던트 월급을 뛰어넘은 것은 한참 전의 일이었다.
“미안. 나 때문에 일 못 했지?”
준후가 컨퍼런스 룸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문틈이 살짝 열려 있었다.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준후 쪽을 향하고 있었다.
“와…… 제가 지켜보고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인턴 혜미가 컨퍼런스 룸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기척이 느껴졌으니까.”
“춤추면서 기척 같은 것도 느끼세요?”
“그럼. 내가 좀 예민하거든.”
“저도 선배 뉴튜브 팬인데요. 춤추는 거 영상으로 보는 거랑 눈앞에서 보는 거랑 천지 차이네요. 뭐랄까, 진짜 빨려 들어갔어요.”
준후에게 다가온 혜미가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탑 남자 배우 뺨치는 외모.
깔끔하고 세련되면서도 박력 있는 안무.
듣기 좋은, 무게감 있는 중저음의 목소리.
혜미가 보기에 준후의 천직은 의사보다는 연예계 쪽이 아닐까 싶었다.
“선배, 연예계 쪽은 생각 없으세요?”
“전혀.”
“왜요? 돈도 많이 벌고 인기도 얻고 좋잖아요.”
“무대보다 수술대가 더 좋으니까. 팬들보다 환자가 더 좋으니까.”
준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준후는 주목받는 삶보다 봉사하는 삶에 큰 뜻을 두었다.
“와우. 대답도 멋져요.”
“나한테 콩깍지가 아주 단단히 씌었구나?”
“콩깍지가 벗겨지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근데 선배.”
“또 왜?”
“다른 댄스 채널에서 콜라보 제안 같은 건 안 왔어요?”
“많이 왔지. 천만 채널에서도 오고 오백만 채널에서도 오고.”
“근데 콜라보 안 하셨어요?”
“일단 그쪽하고 만나야 하는데 내가 시간이 나야 말이지.”
인턴을 거쳐 레지던트 수련을 하는 동안.
준후는 24시간이 모자랐다.
심지어 오프 날에도 병원에 남아서 공부나 수련을 하곤 했으니.
뉴튜트 채널 콜라보에 투자할 여력이 없었다.
무엇보다 준후의 근본은 외과의였고 말이다.
“그래도 다음에 들어오면 눈 딱 감고 한번 해보세요. 채널이 더 커질 것 같아요.”
“조언 고맙다. 천천히 생각해 볼게. 잡담은 이쯤하고 같이 컨퍼런스 준비나 할까.”
“네. 선배!”
준후의 일과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시작되었다.
그런 평범한 일과에 균열이 간 것은 정오가 지날 때쯤이었다.
* * *
“준후야, 잠깐 나 좀 보자. 컨퍼런스 룸으로 오거라.”
오전 회진이 끝나고 스태프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뇌종양 전문의 동훈이 준후를 호출했다.
준후는 동훈을 따라 컨퍼런스 룸으로 들어갔다.
동훈을 마주 보고 책상에 앉았다.
교수가 레지던트를 따로 호출하는 경우가 드물었기에 준후는 궁금했다.
동훈이 대체 무슨 말을 할지.
“내가 저번 주에 외래에서 환자 한 명을 맡았거든?”
“네. 교수님.”
“근데 그 환자가 유명한 음악인이야. 거의 VIP급이라고 보면 돼.”
“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될까요?”
준후의 물음에 동훈이 환자 이름을 말했다.
하지만 준후는 금시초문인 사람이었다.
“나중에 검색해 보렴. 찾는 건 어렵지 않을 테니까. 어쨌거나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 환자가 오늘 중으로 입원하러 올 건데 말이야. 그 환자 주치의를 네가 맡아줬으면 좋겠다.”
“…….”
“혹시 부담되니?”
“아뇨. 전혀 안 됩니다.”
준후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환자가 경증이든, 중증이든.
일반인이든, VIP이든 준후는 상관없었다.
준후는 그저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교수님께 감사합니다. 저를 믿고 환자를 맡겨주셨으니까요.”
“녀석. 말도 예쁘게 잘하네. 참고로 이 환자는 평소와 다른 스타일로 수술할 거란다. 수술 세컨드도 너로 세울 거고.”
“교수님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래, 일하느라 바쁠 텐데. 그만 가보려무나.”
“교수님도 고생하십시오.”
준후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컨퍼런스 룸을 떠났다.
당직실로 돌아와 밀린 차트 업무를 해치웠다.
타다다닥.
불을 뿜는 키보드.
엄청난 속도로 준후는 오더들을 하나하나 빠르게 박살 냈다.
그 후, 남는 시간을 이용해 교수님이 말씀하신 환자를 검색해 보았다.
준후만 몰랐을 뿐.
환자는 확실히 유명한 음악인이었다.
뇌종양 진단을 받고 신원대 신경외과에 입원한다는 기사가 벌써 포털 사이트에 올라와 있었다.
내친김에 준후는 환자의 차트도 살폈다.
MRI 영상을 확인하니 환자는 뇌수막종을 앓고 있었다.
뇌수막종이 양성이라는 사실은 다행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반쪽짜리 다행이었다.
종양의 크기가 4cm x 4cm로 꽤 컸고.
종양이 전두엽, 두정엽, 측두엽.
이 세 부위에 걸쳐져 있어 절제가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교수님이 분명 평소와 다른 수술을 한다고 하셨는데 이번에야말로 그 수술을 하는 건가?
교재로만 봤던 수술에 직접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 준후는 설레었다.
외과 수술에 관해서라면.
준후는 아직도 아이처럼 호기심이 왕성했다.
“오늘은 또 뭘 그렇게 열심히 보시나?”
등 뒤에서 민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후는 고개를 돌려 민경을 쳐다보았다.
“오늘 입원 환자 중에 신경 써야 할 환자가 있어서요. 근데 선배는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그렇게 티나?”
“네. 벌써부터 입이 헤벌쭉하신 걸요. 내일 오프세요?”
“아니, 그건 아니고.”
민경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오늘 시호 선배 복귀한대.”
“시호 선배가 누구세요?”
“아, 참 준후 너는 모르겠구나. 우리 과 3년 차 선배인데 지방으로 파견 근무 나갔다가 오늘 돌아와.”
“아…… 파견 근무 가셨던 분이구나.”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원 레지던트들은 수련 도중 최소 한 번 이상 브랜치(Branch, 지방 분원)로 파견 나가게 되어 있었다.
공교롭게 시호라는 선배가 파견 나갔을 때.
준후가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했으니 일면식이 없었던 것이다.
“시호 선배는 어떤 사람이에요?”
“너랑 비슷한 점이 많아. 일 잘하고 다정하고. 또 귀엽고.”
“선배. 혹시 시호 선배 좋아하세요?”
“좋아하지. 이성이 아니라 선배로서.”
“아닌 것 같은데요? 홀딱 반한 것 같은 눈치인데요?”
“준후, 너 오늘따라 유독 짓궂다. 선배 놀리라고 누가 가르쳤어?”
“장난이에요. 장난. 조크.”
준후는 웃음으로 얼렁뚱땅 넘겼다.
세상에는 숨길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기침, 가난, 사랑.
그런데 준후는 민경에게서 사랑을 보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민경이 연모하는 시호라는 선배가 궁금해졌다.
시호가 좀 더 구체적으로 자신과 어떤 점에서 닮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민경과 잡담을 마친 후.
준후는 곧바로 수술방을 찾았다.
3시간 가까이 소요되는 척추 후궁 절제술 어시스트를 마치고 병동으로 복귀했다.
현재 시간은 오후 1시.
신경외과 병동으로 뻗은 복도를 걷는데.
스테이션에서 입원 수속을 밟고 있는 호리호리한 사내와 노년의 여성이 준후 눈에 들어왔다.
동훈이 부탁했던 ‘그 환자’가 도착한 것이다.
준후는 스테이션으로 향하는 걸음을 서둘렀다.
환자에게 다가가 목례를 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주치의를 맡은 서준후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