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159화 (159/424)

159화

제29장 미션(4)

“반갑습니다. 유명한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환자도 준후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유명한.

33세의 피아니스트.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 신동 소리를 들었으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국내 및 해외 콩쿠르를 휩쓸고 다녔다.

오죽하면 별명이 모차르트의 환생이었을까.

통성명을 나눈 후 준후는 명한의 외모를 관찰했다.

나뭇가지처럼 길게 드리운 속눈썹.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

오뚝하게 솟은 콧날과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

준후는 명한에게서 속세를 등진 수도승의 분위기를 얼핏 느꼈다.

“선생님. 저희 아들이 받는 수술이 정확히 어떤 수술인가요? 대충 설명을 듣긴 했는데 잘 이해가 안 가서…….”

명한의 곁에 있던 보호자가 물었다.

보호자는 명한의 어머니로 보였다.

“대화가 길어질 것 같은데. 일단 병실로 가실까요?”

“좋아요. 선생님이 센스가 있으시네요.”

보호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세 사람이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은 622호실로 1인실이었다.

준후가 알기로는.

6인실이 있음에도 명한이 1인실을 선택했다고 알았다.

하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데 그 정도 경제력도 없으면 이상하기도 했다.

1인실에 도착하자 명한이 수술복을 들고 화장실로 이동했다.

보호자는 챙겨온 짐을 침상에 올려놓고 준후를 응시했다.

아까의 대답을 원하는 눈치였다.

“아드님이 받을 수술은 각성 수술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퍽 거창하네요.”

“수술 방법도 꽤 거창하죠. 수술 도중에 환자분을 깨울 거거든요.”

“네? 수술은 원래 마취 중에 진행하는 거 아닌가요?”

보호자가 기겁하며 연거푸 질문을 던졌다.

“마취가 깨면 명한이가 엄청 괴로울 것 같은데요? 그래도 되는 건가요?”

“다행히 뇌는 통증을 못 느낍니다. 통증 문제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준후는 차근차근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뇌종양을 제거하는 도중.

환자의 신경이 손상될 수 있는데 이를 피하고자 일부러 환자를 수술 중에 깨운다.

뇌를 신경 자극기로 자극해서 해당 부위가 어떤 신경과 연결됐는지 파악하고.

해당 부분에 대한 절제 여부를 판단한다고.

각성 수술을 정의했다.

“아드님 같은 경우 손과 관련된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수술 후에도 피아노를 치셔야 하니까요.”

“어머머. 종양을 다 제거하는 게 아닌가요? 근데 종양을 남기면 안 되잖아요.”

“맞습니다. 하지만 해당 부위는 수술이 아니라 감마 나이프라고 방사선 치료로 절제하죠.”

“근데 선생님.”

“네. 말씀하세요.”

“사람 뇌라는 게 다 똑같은 거 아닌가요? 신경이 분포하는 양상 같은 것도요. 굳이 마취 중인 사람을 깨워서 또 확인할 필요가 있나요?”

보호자의 질문은 꼼꼼하고 날카로웠다.

일반적인 보호자라면 파고들지 않을 부분까지 파고들었다.

그래서일까.

명한이 지금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건 보호자의 교육도 한몫했겠구나 싶은 준후였다.

“좋은 질문입니다. 신경이 분포하는 영역은 현대 의학으로 어느 정도 파악이 되긴 했는데요.”

“…….”

“그렇다고 모든 사람의 신경 분포가 다 똑같은 건 아닙니다. 성장하면서 뇌가 발달하는 부위가 다 다르고 신경 세포가 연결되는 형상도 다 달라지거든요.”

“선생님은 자상하시네요.”

보호자가 준후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외래에서 진료하던 교수님은 이렇게까지 설명 안 해주시던데. 그리고 선생님 설명은 뭔가 귀에 쏙쏙 들어와요.”

“교수님들이야 워낙 바쁘시니까요.”

설명이 끝날 때쯤.

환자복을 입은 명한이 침상으로 다가왔다.

환복한 명한은 영락없는 환자였다.

정치인이 됐든, 스포츠 스타가 됐든, 연예인이 됐든…….

신원대 로고가 박힌 환자복을 입으면 누구나 환자가 됐다.

아마 준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환자분께도 각성 수술을 한 번 더 설명해드릴까요?”

“아니요. 저는 따로 알아봐서 대충 알고 있어요.”

명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짐 가방에서 챙긴 물품들을 보기 좋게 진열했다.

뭐랄까.

군대에서 각을 맞추듯이 딱딱 정렬되는 물품들.

명한은 결벽증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야 속이 좀 후련하네.”

명한이 한 시름 덜었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두 분 다 궁금하신 점은 더 없으신가요?”

“저는 없어요.”

“저는 나중에 여쭤볼게요. 갑자기 환경이 바뀌었더니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요.”

명한이 은근하게 축객령을 비추자 준후는 그 뜻을 읽고 병실을 떠났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에게 펼치는 각성 수술이라…….

가뜩이나 케이스도 복잡한데.

교수님 어깨가 무겁겠어.

당직실로 복귀하면서 준후는 생각에 잠겼다.

세컨드로 들어가는 이번 각성 수술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 * *

똑. 똑. 똑.

나지막한 노크 소리가 당직실 문 너머로 들렸다.

노크하는 걸 보면.

상대는 의국 식구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들어오세요.”

준후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드르륵 문이 열렸다.

의사 가운을 입은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년은 키가 165센티미터 정도로 작은 편이었다. 얼굴은 동글동글하고 눈매가 쳐져서 순둥순둥한 분위기를 풍겼다.

준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청년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시호 선배. 1년 차 서준후라고 합니다.”

“날 알아요?”

시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오전에 민경 선배에게 들었습니다. 분원에 파견 갔던 선배가 오늘 복귀한다고.”

“소문 한번 빠르네요. 어쨌든 반가워요. 최시호라고 해요.”

“말 편하게 하세요. 앞으로 계속 뵐 건데 존댓말 쓰시면 제가 불편해요.”

“……그럴까? 민경이나 다른 선배들은 수술 중이라 바쁘지?”

“네.”

“그럼 난 숙직실에서 짐 정리부터 하고 올게.”

시호가 당직실을 벗어났다가 10분 만에 돌아와 준후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새로운 3년 차 선배의 등장에 준후는 호기심을 느꼈다.

-시호 선배는 어떤 사람이에요?

-너랑 비슷한 점이 많아. 일 잘하고 다정하고. 또 귀엽고.

아침에 민경은 시호를 이렇게 평가했었다.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

짧은 대화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이 두 가지를 보면 민경의 말은 얼추 맞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본원은 변한 게 없네.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야.”

시호가 그리웠다는 듯 당직실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파견 갔다 오길 잘했네. 복귀하니까 이렇게 듬직한 후배도 있고.”

“…….”

“솔직히 난 우리 과 지원자가 없을 줄 알았거든.”

시호가 씁쓸하게 웃었다.

시호의 말대로 신경외과는 비인기 과였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는데 보상은 그에 한참 못 미치기 때문이다.

사명감만으로 버티기에도 한계가 있었고.

“저 말고 경수라는 친구도 있습니다.”

“그 친구도 1년 차?”

“네.”

“그야말로 운수 좋은 년도네. 준후 너도 내년에는 후배를 볼 수 있어야 할 텐데 말이야.”

“파견 생활은 어떠셨어요?”

준후가 시호에게 물었다.

준후도 2년 차가 되면 어디론가 파견을 나가야 했다.

그래서 파견 생활이 궁금했다.

“나는 부산에 8개월 정도 있었는데, 사실 파견은 어디를 가든 본원보다 못해. 스태프가 너무 부족하거든.”

“…….”

“본원도 T.O를 못 맞추는데 지방이야 말 다했지.”

“그럼 수술도 많이 들어가셨겠네요?”

“질릴 정도로 들어갔지.”

시호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시호의 설명을 들은 준후는 오히려 파견이 매력적이라 생각했다.

준후는 더 많은 환자를 경험하고.

더 많은 수술을 경험하고 싶었다.

사람을 성장시키는 건 결국 다양하고 고된 경험이었기에.

운기조식과 영양제 조합만 있으면 피로는 모를 테니…….

준후는 오히려 파견 나가서 한 층 더 성장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뭐야? 어쩐지 부러워하는 눈치다?”

“어…… 제가 원래 고생을 좋아하거든요.”

“뭐, 그런 반응은 대충 예상하고 있었어.”

“제 반응을요?”

“민경이랑 가끔 통화했거든. 민경이가 네 이야기 많이 했어. 나보다 더 괴물 같은 1년 차가 들어왔다고.”

“보시다시피 괴물은 아니고 사람입니다.”

준후의 농담에 시호가 피식 웃었다.

이어지는 대화는 편안했다.

시호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자신의 이야기도 곧잘 섞어 얘기했다.

시호는 모나지 않은 둥근 돌 같았다.

“아 참.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준후, 넌 왜 신경외과 의사가 됐어?”

“사연이 긴데 괜찮으시겠어요?”

“물론이지. 듣고 싶어서 물어본 건데.”

준후는 손목에 찬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성호와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옛 상처를 꺼내 보이는 일은 아팠지만 견뎌냈다, 버텨냈다.

무림의 아버지는 준후에게 곧잘 이런 말을 해주곤 하셨다.

행복한 삶이란 상처 받지 않는 삶이 아니다.

행복한 삶이란 오히려 상처와 더불어 사는 삶이라고 했다.

준후는 예나 지금이나 그 말에 크게 공감하고 있다.

“저런……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구나. 상심이 컸겠어.”

“그 상실감 때문에 의술에 더 의욕을 불태울 수 있게 됐어요. 나름 좋은 점도 있었죠.”

“다행히 그래 보인다. 그 성호란 친구도 분명 하늘에서 널 굽어보고 있을 거야.”

말을 마친 시호가 가운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볼펜으로 수첩에 몇 글자를 긁적거리기 시작했다.

“뭐 적으세요? 선배?”

“네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문득 떠오른 게 있어서. 틈날 때마다 메모하는 습관이 있거든.”

딱히 시호의 수첩을 엿볼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공(眼功, 눈을 사용하는 무공)으로 단련된 시력을 통해.

준후는 우연치 않게 시호의 수첩 내용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1월 30일: 결(結)]

[4월 10일: 결(結)]

[7월 3일: 결(結)]

메모임을 감안해도 내용이 너무 간결했다.

적힌 거라고는 날짜와 한문으로 된 결 자뿐이었다.

[7월 4일: 탐(貪)]

심지어 방금 적힌 글씨는 탐이었다.

그런데 준후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그 의미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마음 같아서야 대놓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메모를 뜻하지 않게 훔쳐봤다는 걸 광고하는 셈이 될 테니까.

띠리링~

때마침 당직실 전화기가 울렸다.

준후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신경외과입니다.”

-여기 부산 분원 신경외과입니다. 시호 선배, 잘 도착했죠?

응급실이나 스테이션 전화를 예상했건만 전화를 건 이는 의외로 부산 신경외과 의국이었다.

“아. 네. 지금 당직실에 있습니다.”

-그럼, 시호 선배 좀 바꿔줄래요?

“네. 알겠습니다. 선배, 부산에서 전화 왔는데요?”

“그래.”

시호가 준후 대신 전화를 받고 한참 부산 의국 스태프와 통화를 했다.

5분 가까이 이어진 통화가 끝나고 시호가 침통한 표정으로 다시 준후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어제 자정에 뇌출혈 응급 수술에 들어갔거든. 내가 집도를 했는데…… 환자가…… 중환자실에서 세상을 떠났대.”

시호가 침울하게 고개 숙인 채 말했다. 하지만 그 순간 준후는 포착하고야 말았다.

시호의 입가가 기묘하게 비틀려 있는 것을.

웃고 있는 것인지.

울고 있는 것인지 모를 미묘한 표정을.

시호에게서 얼핏 드러나는 기묘함을 준후는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몰랐다.

“선배, 괜찮으세요?”

“안 괜찮지만 괜찮아지겠지. 괜찮아져야지.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잠깐 숙직실에서 쉬시는 게…….”

띠리링~

위로를 방해하듯 다시 당직실 전화기가 울렸다.

“신경외과입니다.”

-…….

“네.”

-…….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끊고 준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 죄송한데 척추 외상 환자가 들어왔다고 해서요. 응급실에 가봐야겠습니다.”

“그래. 가 봐. 당직실은 내가 지키고 있을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직실을 나온 준후는 보법을 밟아가며 병동을 빠져나갔다.

오늘은 어쩐지.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일이 곳곳에서 터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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