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제30장 용기(2)
시호는 마스크를 좋아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마스크 뒤에서 웃는 것을 좋아했다.
더욱더 정확히 말하면 수술 도중 마스크 뒤에서 웃는 것을 좋아했다.
실제로 환자의 허리 피부를 가를 때부터, 시호는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메스의 칼날이 살갗을 가를 때.
손끝에 전해지는 매끄러움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시호는 피도 좋아했다.
붉은 피는 느슨한 정신을 각성제처럼 각성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피만 보면 시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의사를 직업으로 선택한 시호의 판단은 과연 신의 한 수였다.
합법적으로.
또는 존경까지 받으며 타인의 몸을 함부로 주무르고.
또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직업이 의사 말고 또 있을까.
막 피부 절개를 완료하고.
시호는 물끄러미 준후를 바라보았다.
준후는 고정 견인기를 이용해 허리의 절개창을 넓히고 있었다.
절개창이 좌우로 벌어지면서.
수술 시야가 한결 탁 트였다.
누런빛을 띤 허리 근육과 인대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문대로의 실력이야.
민경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단 말이지.
시호는 준후의 어시스트에 감탄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준후는 양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이를테면 오른손으로는 이리게이션(세척)을 하고 왼손으로는 지혈 거즈로 수술 부위의 출혈을 막는다거나.
절개창을 좌우로 벌릴 때도.
완벽하게 좌우 대칭을 맞춘다거나.
한 손으로는 수술 부위를 픽싱(고정)하고 나머지 손으로 소작을 한다거나 등등.
양손을 쓴다고 해도.
보통 한 쪽 손의 정교함은 떨어지기 마련인데 준후는 그런 것이 없었다.
양손이 다 날아다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준후는 수술 과정을 전부 꿰뚫고 있었다.
지시하지 않은 처치까지 한 박자 빠르게 해치웠다.
준후처럼 똘똘한 레지던트 1년 차를 시호는 아직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시호는 딱히 준후를 경계하지 않았다.
질투나 시기를 느끼지도 않았다.
준후는 환자밖에 모르는, 의술에 진심인 우직한 외과의였다.
한 마디로 시호가 가장 다루기 쉬운 타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호는 좋은 장난감이 생겼다고 기대하는 중이었다.
“선배, 무슨 생각하세요? 후속 처치가 없는데요?”
준후가 시호에게 물었다.
수술 시야를 확보했음에도 시호가 아무런 행동이 없자 물은 것이었다.
“잠깐 머릿속으로 할 일을 정리하고 있었지.”
“마미총 증후군, 수술해 본 적 있으세요?”
“없어. 하지만 기본 원리는 척추 디스크 수술이랑 다르지 않아. 신경 감압이 최우선이고…… 이 환자는 기기 고정술까지 해줘야 할 것 같다.”
“응용력이 좋으시네요.”
“3년 차면 이 정도 통밥은 굴려야지. 다이아몬드 드릴.”
시호는 소독 간호사가 건넨 다이아몬드 드릴을 손에 쥐었다.
딸칵.
스위치를 켜자 드릴 헤드가 미친 속도로 회전했다.
위이이잉 굉음을 뿜어냈다.
시호는 다이아몬드 드릴로 환자 허리의 근육층과 인대를 갈기 시작했다.
조직들이 조각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환한 무영등 불빛 때문일까.
비산하는 조직들이 꼭 반짝이는 보석 부스러기 같았다.
작업을 마치자 문제의 요추가 모습을 드러냈다.
MRI를 통해 확인한 대로.
2-3번 요추에 골절이 발생했고.
골절 편이 척수 신경 내부로 말려 들어가 신경을 압박하고 있었다.
“환자 나이도 있고 골절도 심해서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준후가 시호에게 말했다.
“네가 아는 걸 내가 모르겠니?”
“혹시나 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아까 당직실에서 안 좋은 전화도 받으셨잖아요.”
“그 일이라면…… 이제 괜찮아.”
시호는 마스크 뒤에서 씽긋 웃었다.
어제저녁.
부산에서 직접 수술했던 환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은 사실 희소식이었다.
그나저나 서울 첫 근무부터 재미 좀 볼까?
케이스도 딱 좋은데 말이야.
시호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선생님. 보비(전기 소작기)요.”
“네. 여기 있습니다.”
“준후 너는 리트랙터로 척수강을 좀 더 벌려 봐.”
“네.”
시호는 양손에 각각 보비와 다이아몬드 드릴을 들고 신경 감압술에 들어갔다.
신경 감압술이란 척수 신경을 누르고 있는 뼈를 제거해 주는 수술이었다.
시호는 보비로 척추를 지탱하는 황색인대를 제거하고.
신경을 짓누르고 있는 골절 된 뼈를 갈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다시 굉음을 내는 다이아몬드 드릴.
치이이익.
두꺼운 황색인대를 열로 지져대는 보비.
시호는 2-3번 요추에 신경감압술을 펼친 후 그 주변부의 뼈와 인대까지 싹 갈아버릴 예정이었다.
왜?
환자의 허리를 망쳐놓기 위해서!
환자의 육신을 망가뜨리는 데서 시호는 큰 쾌감을 느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1년 차 준후와 인턴, 소독 간호사뿐이었다.
시호의 심술궂은 장난을 알아챌 사람도, 제지할 사람도 없었다.
즉 지금 이 자리는 시호의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시호가 다이아몬드 드릴로 환자의 애꿎은 척추뼈까지 갈아버리려고 했을 때.
준후가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선배! 지금 뭐하시는 거죠?”
* * *
준후의 외침에 수술방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시호는 드릴 작동을 멈추고 준후를 쳐다보았다.
소독 간호사와 인턴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준후를 응시했다.
“선배. 왜 그러세요? 집도 중에 갑자기 이러시면…….”
“깜짝 놀랐잖아요, 선생님답지 않게 왜 그러세요?”
인턴과 소독 간호사가 준후의 행동을 지적했지만 준후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준후의 날카로운 시선은 시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선배, 감압 부위가 너무 넓습니다. 멈추셔야 해요.”
“마미총 증후군이 올 정도로 골절의 범위가 넓었어. 그럼 감압 부위도 그만큼 넓어야지.”
“남은 뼈와 인대까지 제거하면 환자의 허리는 악화될 겁니다.”
준후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자고로 신경 감압술을 펼칠 때는 제거하는 뼈와 인대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했다.
허리를 지탱하는 구조물이 적어진다면.
그만큼 허리에 부담이 많이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또 다른 허리 수술을 불러올 수 있었다.
“시호 선생님도 그 부분을 다 생각하고 집도하시는 게 아닐까요?”
소독 간호사가 시호의 편을 들었다.
이에 시호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야, 내가 3년 차다. 너보다 환자를 봐도 몇백 명은 더 봤어.”
“그래도 실수나 오류는 있을 수 있습니다.”
“답답하게 구네, 진짜. 내가 파견에서 복귀했다고 텃세 부리는 거니?”
“제 지적을 텃세로 치부하시다니. 유감이네요.”
준후의 미간이 좁아졌다.
신경 감압술을 과하게 펼치기 전까지만 해도 준후는 시호를 좋게 봤다.
시호 역시 양손을 쓰는 외과의였다. 손놀림이 빠릿빠릿하고 정교했다.
그래서 든든한 선배가 생겼다고 안심하던 차였다.
하지만 웬걸?
시호의 말도 안 되는 감압술 범위를 확인하고 준후는 화들짝 놀랐다.
지금 시호를 방관한다면.
환자의 허리는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리라.
“네 주장에 근거는 있어?”
시호가 가시 돋친 목소리로 물었다.
“인턴으로 정형외과에서 수련할 때. 마미총 증후군 수술에 들어간 적 있습니다. 그때도 이렇게 무식하게 감압을 하진 않았어요.”
“마미총 증후군이라고 해서 케이스가 다 같지는 않아. 그리고 그건 정형외과 스타일이겠지.”
시호가 지지 않고 반박했다.
“정형외과가 됐든, 신경외과가 됐든 허리 구조물을 최대한 보존한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
“뭣하면 치프나 교수님께 연락해 볼까요?”
준후는 초강수를 두었다.
시호의 감압술에 대놓고 반기를 든 것이다.
이러면 시호에게 찍힐 수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준후에게는 환자의 허리가 더 중요했다.
환자는 오늘에서야 간신히 병원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신뢰를 이번 수술로 깨부수고 싶지 않았다.
“선배. 선 넘으신 것 같은데요. 지금이라도 사과하세요.”
“준후 선생님, 고집 엄청나시네. 오늘 진짜 이상해요.”
인턴과 소독 간호사가 다시 준후를 만류했다. 그런데도 준후의 고개는 대나무처럼 빳빳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수술방.
이제 준후를 포함한 스태프의 시선이 시호에게 머물렀다.
준후의 반역에 시호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야, 역시 신경외과 차기 에이스답네.”
시호의 목소리는 의외로 유쾌했다.
“사실 말이야. 나도 감압을 더 할 생각은 없었어.”
“네? 그럼 왜…….”
“뻔하잖아. 준후, 널 시험해 봤던 거지. 감압술의 원칙, 제대로 기억하고 있네?”
시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지적하지 않았어도 감압술은 내 손으로 멈췄을 거야. 그리고 오히려 널 혼냈겠지.”
“…….”
“말도 안 되는 처치를 하는데 왜 가만히 보고 있었냐고 말이야. 그러니까 준후 넌 합격이다.”
“아…… 그런 생각이셨구나. 그럼 결국 준후 선배 판단이 옳았던 거네요?”
잠자코 있던 인턴이 시호에게 물었다.
“물론이지. 준후 너도 이제 오해가 좀 풀렸어?”
“아. 네.”
준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결과적으로 시호가 무리한 감압술을 포기했고 환자의 허리를 지켜냈으므로 준후는 본래 목표를 이뤄냈다.
하지만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꺼림칙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는 건 왜일까.
드릴을 환자의 뼈에 가져다 대던 시호의 손짓.
또 진지했던 눈빛.
그건 분명 진심처럼 보였는데…….
시호에게 반감을 가지다 보니 착각했던 걸까.
시호가 준후를 칭찬하면서 수술방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준후 선배. 죄송해요. 저야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괜히 나대가지고.”
“전 사실 준후 선생님, 믿고 있었다니까요. 까닭 없이 선배한테 대들 사람이 아니죠. 선생님은.”
인턴이 준후에게 사과하고.
소독 간호사가 준후를 치켜세우면서 수술방 분위기는 금세 화기애애해졌다.
평화를 되찾았다.
신경 감압술이 끝나면서 두 번째 수술인 기기 고정술의 막이 올랐다.
기기 고정술이란.
환자의 척추에 금속판을 고정해서 허리를 지탱해 주는 수술이었다.
기기 고정술에서 가장 어려운 작업은 금속판에 나사를 박는 일이었는데.
환자의 척추가 약해서 망치를 쓸 수 없었다.
공교롭게 나사 박는 드릴도 없어서 드라이버를 이용해 수동으로 나사를 조여야 했다.
“감압술하느라 고생하셨는데 제가 선배 대신 작업해도 되죠?”
드라이버를 돌리느라 낑낑거리는 시호에게 준후가 물었다.
시호의 얼굴에는 어느새 땀방울이 잔뜩 맺혀 있었다.
“힘든데 괜찮겠어?”
“원래 힘든 일 전문입니다. 선배랑 진태가 금속판 고정해 주세요.”
“그럼…… 10개씩 교대로 하자. 자.”
시호가 준후를 향해 드라이버를 내밀었다.
“아니요. 손으로 할게요. 손이 편해요.”
“나사를 어떻게 맨손으로 박아? 차력사라도 돼?”
“차력사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을 걸요?”
준후가 드라이버를 거절하자 시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드라이버를 회수했다.
그리고 인턴 진태와 함께 두 손으로 금속판을 단단히 고정했다.
교수님도 없으니까.
모처럼 실력 발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준후는 금속판 홈에 나사를 갖다 대었다.
그리고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오른 검지에 담았다.
“뭐야 설마 손가락으로 나사를 박겠다고?”
시호가 준후의 의도를 읽고 혀를 찼다.
“어디서 이런 이상한 걸 배운 거야? 하지 마, 그러다가 손가락 박살 나겠다.”
“전 할 수 있어요. 수술을 빨리 끝내려면 이게 최선입니다.”
준후는 여유만만하게 웃었다.
휘리리릭.
준후는 손목을 회전시키면서 손가락으로 나사를 금속판 홈에 밀어 넣었다.
탄통지(彈通指).
탄통지는 지공(손가락을 사용하는 무공)의 일종으로 극성으로 펼치면 사람 피부를 꿰뚫고 뼈도 부술 수 있었다.
턱!
탄통지에 닿은 나사가 단번에 금속판 끝까지 들어갔다.
시호가 드라이버로 안간힘을 써서 고정했던 나사를 고작 손가락질 한 번으로 고정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진짜 손가락으로 나사를 박아버리시네?”
“와…… 이게 되나?”
진태와 시호가 준후의 완력에 혀를 내둘렀다.
질렸다는 듯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후는 검지를 이용해 파죽지세로 나사를 박아버렸다.
턱! 턱! 턱! 턱!
총 20개의 나사를 박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1분.
준후 덕분에 수술 시간은 10분 가까이 단축되었다.
그 누구도 땀을 흘리고 손을 바들거리며 나사를 조일 필요가 없어졌다.
“…….”
“…….”
준후의 놀라운 활약으로 인해 수술방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가장 먼저 입을 뗀 이는 진태였다.
“선배랑 딱밤 내기하면 큰일 나겠어요. 대가리 깨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