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제30장 용기(4)
“고생하셨습니다.”
준후가 명한의 머리에 얹었던 손을 떼며 말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명한의 뇌종양은 MRI 검사 결과와 똑같았다.
수술만 계획대로 잘 진행되면 아무 문제가 없을 듯했다.
“고생이야 선생님이 다하셨죠. 실례가 안 된다면 가끔 와서 마사지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너무 시원해서…….”
“안 될 거 없죠.”
준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추궁과혈 마사지를 받은 사람들은 언제나 앵콜을 원했다.
그런 이유로 준후는 병동에서 마사지 대스타였다.
“곡 작업하고 계셨나 보네요?”
명한의 허벅지에 놓여 있는 악보 노트를 내려다보며 준후가 물었다.
악보의 3분의 2 이상이 음표와 기호로 가득 차 있었다.
음악을 잘 모르고 관심도 크게 없는 준후였기에 명훈의 악보가 암호문서 같았다.
속이 빈 콩나물 대가리처럼 생긴 게 2분음표였나?
“기왕 입원하신 김에 푹 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두통도 아직 남아 있을 텐데.”
“노력해 봤는데 안 돼요. 음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요.”
“그래도 좀 더 시도를…….”
“선생님. 저는 유치원 때부터 피아노와 함께했습니다. 잘 때를 빼고는 떨어져 본 적이 없죠.”
“…….”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명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명한을 보고 있자니 준후도 명한을 차차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준후도 마찬가지였다.
무림을 경험하고 난 후 빈 시간을 허투루 쓴 적이 없었다.
무공이나 내공을 연마하거나.
의료 지식을 쌓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주변에서 무리하는 거 아니냐고 걱정했지만 듣지 않았다.
준후는 단련을 멈출 수 없었다.
더 강해져야, 더 많은 환자를, 더 빠르고, 더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을 테니까.
명한이 음악에 집착하듯 준후도 의술에 집착했다.
따지고 보면 준후는 명한에게 푹 쉬라고 말할 자격이 없었다.
“이건 무슨 뜻인가요?”
준후가 악보에 적힌 영어 문자를 검지로 가리켰다.
[Moderato]
“모데라토라고 보통 빠르게, 또는 알맞은 속도로 연주하라는 뜻이죠.”
“뭔가 애매하네요. 보통이나 알맞은 속도의 기준은 어떻게 정하죠?”
“그걸 해석하는 게 연주자의 몫이죠. 그래서 더 연주가 다양하고 풍성해지는 거고요.”
전공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지 명한의 표정이 밝아졌다.
목소리도 샵으로 반 음 올라갔다.
“저는 가끔 인생이 거대한 악보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음표처럼 오르락내리락거리고 쉼표처럼 쉬기도 하고. 도돌이표처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
“솔직히 저는 두렵습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제 악보가 여기서 끝날까 봐.”
“…….”
“전 음악을 빼면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명한이 진심을 내비치다가 화제를 돌렸다.
“수술 날짜는 잡혔나요?”
“오늘 오후에 교수님과 환자분의 치료 계획을 세울 예정입니다. 날짜는 그때 잡히겠죠. 잡히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수술이 끝나도…… 제가 피아노 계속 칠 수 있겠죠?”
명한의 간절한 눈빛이 준후에게 머물렀다.
명한의 뇌종양은 전두엽, 측두엽, 두정엽에 걸쳐 있었다.
그리고 해당 영역에는 손과 관련된 신경도 포함되었다.
수술이 잘못된다면 명훈의 손가락은 예전과 같지 않게 될 것이다.
손을 심하게 떨거나.
손이 아예 마비가 될 수 있었다.
손가락 신경을 살리기 위해.
환자를 깨워서 진행하는 각성 수술을 하는 것이었고.
피아노를 포기해야 한다면 명한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얼마나 비참할까.
명한의 심정을 준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뇌사에 빠진 성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준후도 심한 좌절과 절망을 겪었으니까.
“최선을 다하고 있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개인적으로 완치 후 환자분의 피아노도 직접 들어보고 싶네요.”
“네. 부탁드립니다.”
무거운 대화가 끝났다.
준후가 목례를 하고 병실을 떠나려던 그때.
명한이 다시 준후를 불렀다.
“선생님, 잠시만요.”
“더 하실 말씀이라도…….”
“죄송한데 이거 어떻게 내리는 건가요? 아무리 힘을 써도 안 되는데.”
명한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안전 바를 가리켰다.
안전 바는 침상 좌우에 설치된 것으로 환자의 낙상을 방지하는 용도로 쓰였다.
“안전 바를 잡아 보시면 플라스틱으로 된 부분이 있어요. 거기를 누르면서 내리시면 됩니다.”
“아. 되네요. 감사합니다.”
명한이 준후의 지시를 따라 안전 바를 내렸다.
“평소에는 내리시면 안 됩니다. 잘못하면 다쳐요.”
“잠깐 화장실 좀 가려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준후는 1인실을 나와 당직실로 향했다.
음악밖에 모르는 바보.
확실히 어떤 면에서 명한은 준후와 꼭 닮아 있었다.
* * *
그날 오후 4시, 컨퍼런스 룸.
치프 찬영과 준후.
뇌종양 전문의이자 조 교수인 동훈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세 사람이 바라보고 있는.
단상 중앙에 설치된 스크린 위로는 명한의 MRI 영상이 떠올라 있었다.
4cm x 4cm의 크기로.
퍽 거대한 뇌종양이 환자의 전두엽과 두정엽, 측두엽에 걸쳐져 있었다.
“다들 알다시피 환자는 양성인 뇌수막종을 앓고 있다. 하지만 수술 난이도는 악성 못지않아.”
동훈이 말을 계속했다.
“종양이 큰 만큼 제거하는 과정에서 신경 손상의 위험 또한 크지. 솔직히 나도 이런 케이스는 처음 본다.”
동훈이 평소답지 않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만큼 이번 수술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교수님. 특별히 각성 수술을 택하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일반 수술이 더 편하고 안전하지 않을까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단다.”
찬영의 질문에 동훈이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 환자의 경우 정상 조직과 암 조직의 경계가 애매모호해. 환자를 깨워서 신경을 자극하면 해당 부위가 정상조직인지 암 조직인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지.”
“…….”
“둘째는 환자의 부탁이다.”
“환자의 부탁이라 하심은…….”
“외래에서 진료 볼 때 손을 쓰는 신경은 최대한 살려달라고 하더구나. 아무래도 직업이 피아니스트니까.”
준후의 생각에도 환자에게는 각성 수술이 필요해 보였다.
스승 박재현이 전해준 비급.
그러니까 스승이 경험한 다양한 임상 케이스에 따르면.
명한은 반드시 각성 수술을 받아야 했다.
특정 신경을 살리고 싶을 경우.
각성 수술을 통해 환자의 신경 위치를 명확하게 파악해야 했다.
사람마다 뇌신경의 분포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손을 쓰는 사람은 손과 관련된 뇌신경의 분포가 보통 사람에 비해 더 넓고 복잡한 편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 궤적은 뇌신경에 고스란히 남는다. 뇌신경을 알면 그 사람도 알 수 있다.]
이는 스승 박재현의 각성 수술 자료집에 나온 문장 중 하나였다.
준후도 퍽 공감하는 문장이었다.
“이번 수술, 너희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거야.”
동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찬영과 준후를 훑었다.
“과장님이 교수님께 잔뜩 부담을 주셨나 봅니다.”
잠자코 있던 준후가 모처럼 입을 뗐다.
“녀석, 눈치 한 번 빠르구나. 그래, 안 그래도 이 자리에 오기 전에 과장님과 잠깐 면담을 했지. 이번 수술에 실패하면 잡아먹을 기세더구나.”
“과장님 성격이라면 그러시고도 남죠.”
준후가 대답했다.
신경외과 과장은 전형적인 소인배였다.
스태프들의 처우 개선보다는 본인의 승진에 목을 매단 인물이었다.
윗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만을 미덕으로 삼는 인물이었다.
존경할 만한 구석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과장님이 내게 무슨 말을 했을 것 같니?”
“교수님이 괜찮으시면 성대모사로 표현해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동훈의 허락을 받고 준후는 가볍게 목을 풀었다.
“신 교수. 이번 수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환자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란 말이야. 이 환자를 치료하면 단번에 우리 과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어.”
“…….”
“기사도 빵빵 터지고 뉴스에도 나갈 거란 말이야.”
“…….”
“심지어 일반 수술도 아니고 각성 수술이면 말 다했지. 안 그래?”
“…….”
“하지만 말이야. 수술에 실패하면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어. 우리 과 평판이 곤두박질칠 거란 말이지.”
“…….”
“그러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 수술 성공시켜. 실패는 용납하지 않을 걸세.”
“진짜 과장님하고 똑같은데? 크크크크크.”
“하하하하.”
준후의 성대모사가 끝나자 찬영과 동훈이 배를 잡으며 낄낄거렸다.
준후가 평소 과장의 화법을 그대로 복사했기 때문이다.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이 멈추질 않는구나.”
동훈이 끅끅거리다가 손가락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하지만 지금이야 이렇게 웃고 떠들어도 막상 수술을 하면 엄청 부담이 될 거야. 수술에 실패하면 나뿐만 아니라 너희까지 과장님한테 찍힐 테니까.”
“그건 너무 끔찍하네요. 교수님.”
“어쩔 수 없어. 우리가 과장님 성격을 바꿀 순 없으니까.”
찬영에 말에 동훈이 혀를 찼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금방 무거워졌다.
이번 각성 수술은 유달리 난이도가 높았으며 과장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니까.
“자. 이제 슬슬 브레인 매핑을 해보자꾸나.”
브레인 매핑이란 말 그대로 뇌에 지도를 그리는 일이었다.
뇌의 구역별 신경 분포를 수술 전에 살펴보고 종양의 절제 범위까지 논의하는 작업이었다.
딸칵.
동훈이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 뇌종양을 크게 확대했다.
“환자가 피아니스트라는 걸 감안하면 아무래도 음악을 듣는 귀와 피아노를 치는 팔과 관련된 신경을 최대한 보존해야겠지.”
“…….”
“우선 팔과 손과 관련된 영역은 이 부분이다. 1차 운동신경이 분포되어 있어.”
마우스 포인트의 색깔이 빨간 점으로 변했다.
빨간 점이 전두엽에 걸쳐진 뇌종양에 원을 그렸다.
“그럼 이 부분은 절제하면 안 되는 겁니까?”
찬영이 물었다.
“그럴 리가. 그럼 종양을 제거하는 의미가 없잖니.”
“하지만 이 부분을 절제하면 팔과 관련된 손상이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좋은 질문이구나. 준후,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동훈의 시선이 준후를 향했다.
“자세한 건 환자를 각성시킨 후에 파악해야겠지만…… 제 생각에는 3분의 2 정도 제거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근거는?”
“환자는 피아니스트니까 팔과 손을 쓰는 신경의 범위가 보통 사람보다 넓지 않습니까? 그 점을 감안했습니다.”
“나랑 의견이 똑같구나.”
동훈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반면 찬영은 현 상황을 이해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야? 준후 너 각성 수술 따로 공부했어?”
“네. 미리 봐뒀습니다.”
준후는 스승 박재현의 비급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이를 달달 외우기도 했다.
적어도 뇌종양에 관해서라면.
준후는 웬만한 교수 뺨치는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무공으로 발달한 손놀림에.
깊이 있는 의학 지식이 더해지면서.
준후는 1년 차임에도 하루가 다르게 완성형 신경외과의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래? 환자 관리하고 1년 차 공부하는 것도 빡셌을 텐데…… 그럼 나머지 3분의 1은 어쩌고?”
“감마 나이프 수술로 제거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 맞다. 감마 나이프가 있었구나.”
찬영이 무릎을 탁 쳤다.
이 녀석 수술 어시스트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의학 지식까지 빠삭하네?
찬영은 준후의 답변에 감탄했다.
치프인 자신이 모르는 걸 준후가 안다는 사실에는 의외로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았다.
준후가 범상치 않다는 사실은 이제 의국 스태프라면 누구나 알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 예상 수치란다. 실제 수술에 들어가면 절제 범위는 더 넓거나 적어질 수도 있어.”
“네. 교수님.”
“네. 교수님.”
“어쨌거나 각성 수술의 승부처는 이곳이란 걸 잊지 마라. 정상 신경을 건드리면 환자의 팔은 마비될 테니까.”
동훈의 설명이 이어졌다.
동훈은 추가로 청각과 관련된 신경과 몸 감각과 관련된 신경의 절제 범위도 언급했다.
해당 영역도 환자의 피아노 연주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동훈의 설명이 길어지면서.
준후의 이마에 생긴 주름이 깊어갔다.
뇌종양이 워낙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져 있었다. 어느 곳 하나 손쉽게 절제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준후는 뇌종양을 일종의 난공불락으로 느꼈다.
재현 교수님이라면…….
스승님이라면…….
이 환자에게 어떤 판단을 내리셨을까.
준후는 문득 재현의 생각이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