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166화 (166/424)

166화

제31장 진전(1)

쥐 죽은 듯 고요한 당직실.

반쯤 걷힌 창가의 커튼 사이로 푸르스름한 새벽빛과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당직실 한구석에서 준후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준후의 표정은 경건하기 그지없었다.

준후의 가부좌는 미동조차 없었다.

마치 오욕칠정을 벗어난 신선 같았다.

이윽고 준후의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갔다.

가부좌가 풀리면서 가장 먼저 터져 나온 것은 한숨이었다.

복용했던 천산환의 기운을 흡수하고.

모처럼 1시간 가까이 운기조식을 펼치며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닦았건만 준후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음흉한 시호.

이틀 뒤로 다가온 피아니스트 명한의 각성 수술.

이 두 가지가 준후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준후는 휘휘 고개를 저었다.

껌처럼 붙어버린 잡념을 떼어내려고 애썼다.

미래를 걱정을 한다고 해서 걱정이 사라지지는 않는 법.

중요한 건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준후는 책상에 앉아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간은 새벽 2시.

병동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까지 준후는 새로운 무공을 익힐 계획이었다.

무공의 이름은 정안(正眼).

직역하자면 올바른 눈이라는 뜻을 가진 무공이었다.

정안은 준후가 알고 있는 유일한 동술(瞳術)인데 동술이라 하면 눈을 사용하는 무공이었다.

만화에서 나오는 사륜안이니, 마안이니, 윤회안이니 떠들어대는 기술 말이다.

물론 준후가 수련할 정안은 그렇게 사기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정안은 타인의 심리를 살짝 조작하는 무공이었다.

타인을 격려하거나.

타인에게 용기를 불어넣거나 하는 방식으로.

바꿔 말해서 정안은 사악한 의도로는 사용할 수 없었다.

사악한 동술은 사파인의 몫이었다. 환각을 보여주거나, 정신을 세뇌하거나 등등.

일단 정안으로 명한 씨를 안정시키는 게 최우선이겠지.

익히고 나면 앞으로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고.

준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의 비급을 읽고서 각성 수술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환자의 멘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환자의 멘탈이 흔들릴 때.

안정제를 투여하는 것이 꼭 정답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렇다면 준후는 무공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정안을 사용한다면.

안정제 없이 환자를 안정시킬 수 있을 테니까.

나아가서는 긴장한 동료들의 마음을 풀어줄 수도 있을 테고.

준후는 책상에 놓인 탁상 거울을 가만히 응시했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눈동자에 담았다.

내공이 몰리면서 눈동자가 난로처럼 뜨거워졌다.

정안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안심하세요. 누구도 당신을 해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보호를 받고 있어요.

제가 당신을 지키고 있습니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도 당신의 마음은 고요해질 수 있습니다.

준후는 주술을 외우듯.

속으로 중얼거리며 정념(正念)에 집중했다.

정념(正念)을 내공과 함께 발산하는 것이 정안의 핵심이었다.

올바른 마음을 전신에 그득 채우고 준후는 눈동자에 담긴 내공을 거울로 쏘아냈다.

순간 준후의 눈동자가 잠깐 호수처럼 파란 벽안을 띠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눈은 다시 본래의 갈색으로 돌아왔다.

정안에 실패한 것이다.

실제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도 준후의 마음은 그리 편안해지지 않았다.

평소 관심 없던 무공을 수련해서 그런가.

영 느낌이 안 오네.

뭐가 문제지?

정념에 진심이 담기지 않아서 그런가. 아니면 눈으로 발산하는 내공이 부족했나?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준후는 잇달아 정안을 펼쳤다.

당연하게도 결과는 모조리 실패였다. 동술은 그리 만만한 무공이 아니었다.

이걸 이틀 안에 완성할 수 있을까.

시간이 너무 촉박한데.

초조함이 밀려들었지만 준후는 그 초조함마저 수련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자신을 마음을 진정시키는 방식으로도 정안을 사용했던 것이다.

수련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후유증이 밀려왔다.

모래사막에 던져진 것처럼 눈동자가 빡빡하고 건조하고 뜨거워졌다.

날카롭던 집중력도 동나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흐물흐물해져 갔다.

하지만 준후는 정안을 포기하지 않았다.

준후가 무림에서 조화경의 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다 포기하지 않는 끈기 덕분이었다.

포기해야 할 것.

또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

이 두 가지를 잘 구분해서 자신의 열정을 쏟아부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고 준후는 정안에 매진했다.

준후가 퍼뜩 정신을 차린 것은.

갑자기 경수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창가에서 오렌지빛 먼동이 비칠 때였다.

“야, 너 거울 보고 뭐하냐?”

준후가 고개를 돌리니.

당직실 문 앞에서 경수가 팔짱을 낀 채 준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에 한심하다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너 잘생긴 건 아는데. 그렇다고 자기 얼굴을 거울로 보면서 취하는 건 오버 아니야? 너 나르시시스트였어?”

정안을 수련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이상한 오해를 사 버린 준후였다.

* * *

그 날 오전.

사복 차림의 준후는 제원대 병원 참관용 수술실에 앉아 있었다.

어제 재현에게 연락해서 각성 수술을 앞두고 있다고 말하자 재현은 흔쾌히 준후를 제원대 병원으로 초청했다.

마침 재현이 오늘 각성 수술을 집도한다고 했던 것이다.

마침 준후는 오늘이 오프였고 말이다.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무언가 운명의 계시 같았다.

명한의 각성 수술을 실패하지 말라는.

영광이네.

국내 최고의 신경외과의인 스승님의 수술을 이렇게 빨리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이야.

그것도 타 대학 출신의 레지던트인 내가.

준후는 수술방을 비추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앞으로 펼쳐질 스승의 집도가 기대되고 흥분돼서.

오랜 기다림 끝에 각성 수술의 막이 올랐다.

집도의 자리에 선 스승의 모습을 본 준후는 그 모습이 매우 늠름하게 보였다.

거대한 산이 수술대를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무림에서는 기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었다. 높은 경지에 오른 고수들만이 은연중에 뿜어낼 수 있다는.

각성 수술의 초반은 다른 뇌종양 수술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두피 절개.

두개골 절개.

경막, 지주막, 연막의 절개 등등.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준후는 모든 감각을 재현에게 쏟아부었다.

재현이 사용하는 수술 도구.

재현이 수술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

수술 부위에 접근하는 방식 등을 꼼꼼하게 초식으로 만들어서 암기해두었다.

수술 과정을 초식화해서 암기하는 것.

이는 지금까지 준후가 급성장할 수 있도록 도운 재능 중 하나였다.

보통은 집도의의 수술을 통째로 외울 생각은 못 하기 마련이었다.

수술 과정이 워낙 긴 데다가 복잡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백 개의 초식을 외워 온 준후의 입장에서는, 그러니까 무림을 다녀온 준후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지금부터인데.

스승님이라면 뭔가 다른 비책이 있겠지?

준후는 눈을 빛내며 천장에 달린 모니터를 주시했다.

마취의가 각성제를 투입하면서 환자가 의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두개골이 열리고 뇌가 드러난 환자가 의식을 차리는 모습은 어쩐지 괴기스러운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환자분 정신이 드세요?”

수술방과 참관용 수술방을 연결한 스피커에서 재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네. 아직 몽롱하지만 괜찮습니다.”

환자가 대답했다.

환자는 40대 남성으로 3cm x 3cm 크기의 신경교종이 전두엽 후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환자의 직업은 프로 야구 선수였다.

“여기가 어디죠?”

“병원이고 수술하는 곳 아닙니까?”

“좋습니다. 기분은 좀 어떠세요? 긴장되거나 떨리지는 않으세요?”

“그냥 살짝 불쾌한 느낌 정도입니다. 근데 지금 제 머리가 열려 있는 것 맞죠?”

“네. 우리가 흔히 화날 때 머리 뚜껑이 열린다고 하잖아요? 딱 그 상태입니다.”

“…….”

“직접 경험해 보니까 어떠세요?”

“생각보다 별거 없는데요?”

재현의 농담에 환자가 피식 웃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준후는 재현의 입담에 큰 감명을 받았다.

심각한 뇌종양을 집도하는 도중에.

심지어 환자의 의식이 깨어 있음에도 재현은 수술방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환자를 다룰 줄 아는 것이었다.

명의는 단순히 수술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환자와 유대관계를 쌓고 환자의 기분까지 관리할 줄 알아야 진짜 명의가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준후도 명한과 더 친해지고.

수술 도중에 의식을 차린 명한과 좀 더 대화를 적극적으로 나눠야겠다고 결심했다.

각성 수술은 특히나 환자와 스태프 사이의 호흡이 중요했으니까.

아이스 브레이킹 형식의 대화는 무려 10분 동안 진행되었다.

“그런데 선생님, 수술은 무사히 잘 끝나겠죠? 전 선수 생활 오래오래 하고 싶습니다.”

“암요. 당연히 그래야죠. 그러기 위해서 제가 여기 서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건 알지만…… 하아…….”

갑자기 한숨을 내쉬는 환자.

준후는 뭔가 일이 틀어졌음을 즉감했다.

재현의 노력에도 환자의 멘탈에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다.

환자의 낯에 떠오른 불안감을 준후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수술이 아프지는 않죠?”

“안심하세요. 뇌 자체는 통증을 못 느낍니다.”

“그럼 통증은 왜 느끼는 건가요?”

“뇌 표면에는 통증을 느끼는 감각 세포가 적습니다. 뇌는 그저 다른 부위에서 전달되는 통증을 전달받는 것뿐이에요.”

“뇌는 요물이군요.”

“그래서 더 매력적이죠. 의식이 명료해지니 슬슬 환자분도 불안하시죠?”

환자의 속을 꿰뚫어 본 재현이 한마디 했다.

정곡을 찔린 환자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시경도 수면으로만 받는데…… 괜히 각성 수술을 하겠다고 했나 싶기도 하고.”

“괜찮습니다. 환자분은 충분히 이겨내실 수 있어요. 수술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자…… 잠깐만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습니다.”

환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재현이 각성 수술을 진행하는 만큼 동의한 환자는 평균보다 멘탈이 뛰어난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도 막상 수술이 시작되면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과연 섬세한 피아니스트인 명한이 각성 수술을 견딜 수 있을까.

준후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각성 수술이 당장 내일로 잡혔기에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수술이 준후는 결코 남 일 같지 않았다.

“구현아, 안 되겠다. 시작하자.”

수술이 지지부진하자 재현이 결국 칼을 빼 들었다.

“네 교수님.”

“서…… 선생님. 시작이라니요. 전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 됐다니까요?”

“수술을 시작하겠다는 뜻이 아니에요. 안심하세요.”

재현이 환자를 다독이는 동안.

세컨드 어시스트인 구현이 드레싱 카트에 놓인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실로 쌩뚱맞은 행동이었다.

스승님은 대체 무슨 속셈인 걸까.

수술도 아니면 대체 뭘 시작한다는 걸까.

레지던트가 수술방에 휴대폰을 반입하도록 허락까지 하고.

호기심을 느낀 준후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수술방에서 돌아가는 양상에 정신을 집중했다.

이윽고 레지던트가 만지작거리던 휴대폰을 다시 드레싱 카트에 내려놓으면서 뜻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샤크스라 행복합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던 수술방에 신나고 흥겨운 응원가가 울려 퍼졌다.

환자가 소속된 프로야구팀, 한전 샤크스의 응원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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