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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167화 (167/424)

167화

제31장 진전(2)

응원가를 들은 순간, 준후는 감탄을 넘어선 전율마저 느꼈다.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등골이 찌릿하게 울려왔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몰랐다.

수술이 장난이냐고.

경건하고 신성해야 할 수술방에 왜 응원가 따위를 틀어 놓냐고.

하지만 이는 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준후가 보기에 응원가를 재생한 재현의 판단은 치밀하고 섬세했다.

응원가를 튼 목적.

그것은 동요하는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환자가 낯선 수술방을 익숙하고 친숙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준후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참관용 모니터를 응시했다.

“선생님. 응원가는 왜?”

놀란 환자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마음이 편히 먹으시라고요. 선수로 복귀하기 위해서 수술받는 것 아닙니까?”

“당연히 그렇죠.”

“응원가를 들으면서 환자분의 복귀를 기다리는 팬들을 생각하세요. 그럼 힘이 날 겁니다.”

“확실히…… 응원가가 없는 것보단 있는 게 훨씬 낫네요.”

수술을 두려워하던 환자의 표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치솟았던 심박과 혈압도 차차 정상 범위로 돌아왔다.

“자. 받으세요.”

“와, 이런 것까지 준비하셨어요?”

“이런 것까지 준비해야 수술에 실패가 없죠.”

재현이 씽긋 웃으며 환자에게 내민 것은 야구 배트 모양의 인형이었다.

환자는 머뭇거리다가 인형을 손에 쥐었다.

인형을 진짜 배트라도 되는 양.

허공에 가볍게 휘둘러댔다.

배트는 분명 사전에 소독이 된 후 반입되었으리라.

“진정되셨으면 지금부터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네. 가시죠. 그럭저럭해 볼 마음이 생겼습니다.”

흔쾌히 대답하는 환자.

수술이 무서워 뒤로 미루던 좀 전과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대단해.

이게 국내 최고의 신경외과의인 스승님의 마법이구나.

환자를 대하는 솜씨가 예술이야.

하나부터 열까지 환자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았다면.

응원가에 야구 배트 인형 같은 건 준비할 수가 없었을 텐데…….

실제로 우리는 명한 씨를 위해 준비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준후는 재현의 각성 수술을 보러오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울 수 있었고 그것들을 명한의 각성 수술에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환자가 평정심을 되찾으면서.

본격적인 각성 수술의 막이 올랐다.

“지금은 느낌이 어떠세요?”

재현이 신경 자극기로 뇌종양과 정상 대뇌 피질을 자극하며 물었다.

“발목이 좀 찌릿합니다.”

“왼쪽인가요? 오른쪽인가요?

“왼쪽입니다.”

“여기는 왼쪽 발목과 연결된 신경이 분포해 있군요. 그럼 여기는 어떠세요?”

“왼쪽 손가락이 떨립니다. 엄지랑 검지 쪽이요.”

“지금 상태에서 배트 인형을 휘둘러보실래요?”

환자가 재현의 지시를 따라 허공에 배트 인형을 휘둘렀다.

후우우웅.

“스윙할 때 느낌은 어떠세요?”

“불편하긴 하지만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닙니다.”

“좋습니다. 지금처럼만 해주세요.”

재현은 환자와 오랫동안 문답을 하고서 집도의 자리를 벗어났다.

MRI 영상이 출력되고 있는 모니터 앞에 서서 마우스를 손에 쥐었다.

포인터로 종양을 절제할 범위를 그렸다.

공교롭게 범위가 별 모양이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샤크스라 행복합니다~

반복되는 응원가에 정신이 사나울 법도 하건만 재현은 여유만만하게 종양 절제술을 펼쳤다.

재현의 집도는 야무졌다.

오른손에는 보비(전기 소작기)가 들렸고 왼손에는 초음파 분쇄기가 들려 있었는데.

양손이 날실과 씨실처럼 정교하게 뇌종양을 절제해 나갔다.

손 떨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재현이 수술 도구를 사용할 때마다 대뇌의 일부를 잠식한 종양이 거침없이 떨어져 나갔다.

그 와중에도 정상 피질과 신경 세포가 손상되는 일은 없었다.

무공과 내공으로 날아다니는 준후였지만.

수많은 교수들의 집도를 지켜본 준후였지만.

준후는 재현만 한 서전을 본 적이 없었다.

자타공인 넘버 원의 품격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재현은 명의가 아니라 신의(新醫)였다.

심지어 재현만 잘난 것도 아니었다.

집도를 돕는 어시스트들의 솜씨도 발군이었다.

그들은 재현의 수술 시야를 가리지 않았다.

재현과 손이 엉키지도 않았다.

집도를 최적하기 위한 처치들을 잊지 않고 실시했다.

뇌혈관이 건조해져 출혈을 일으키지 않도록 생리 식염수를 분사하거나.

재현 얼굴에 땀을 닦아주거나.

뇌종양을 견인하거나.

거즈로 미세 출혈을 잡아주거나 등등.

수술을 지켜보면서 준후는 무림에서의 어떤 경험을 떠올렸다.

소림사를 방문했을 때.

운 좋게 백팔나한진을 두 눈으로 견식했던 때를 말이다.

생각해 보면 스태프 간의 케미가 잘 맞는 수술은 무림의 합진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한 것 같았다.

여러 사람이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면서 시너지를 일으키니까 말이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준후의 시선은 참관용 모니터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흥분과 긴장, 그리고 기대로 두 주먹은 꽉 쥐어져 있었다.

그렇게 장장 3시간이 흘렀다.

보통 완료까지 5시간이 걸리는 각성 수술이 재현과 스태프들의 활약 덕에 2시간 단축되었다.

뇌종양 절제술이 끝난 후.

재현은 2층에 위치한, 준후가 앉아 있는 참관용 수술을 올려다보았다.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수술의 무사 종료를 알리는 사인이었다.

역시 내 스승님. 멋지다, 멋져.

* * *

제원대 병원 5층 휴게실.

제원대 병원의 휴게실은 신원대 병원의 휴게실보다 볼품이 없었다.

소파는 낡아 빠졌고 크기도 더 작았다. 벽면의 벽지는 누렇게 변색이 되었다.

매너 없는 의사가 방금 왔다 갔는지 휴게실에서는 희미하게 담배 냄새도 났다.

“고생하셨습니다. 교수님.”

준후는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꺼내 소파에 앉은 재현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재현의 반대편에 위치한 소파에 앉았다.

“어때? 우리 병원까지 발품 팔러 온 보람은 있었니?”

“완전 있었습니다. 교수님 수술을 참관하는 동안 감탄하기 바빴습니다.”

“너스레 떨기는…….”

“진짜입니다. 야구 응원가를 틀고 환자에게 야구 배트 인형을 건넸을 때 소름이 돋았어요. 종양 절제하시던 모습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고요.”

준후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도 그때의 감동이 생생했다.

훌륭한 영화나 예술 작품을 보면 느끼는 황홀감을 준후는 집도를 참관하며 느꼈다.

난생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준후, 너 이제 보니 사람을 쑥스럽게 만드는 재주도 있구나. 어쨌거나 도움이 됐다니 기쁘구나.”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나도 나이를 먹긴 먹었나 봐. 수술도 빨리 끝냈는데 몸이 쑤셔.”

재현이 씁쓸하게 웃으며 목을 좌우로 스트레칭했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손목을 연신 주물러댔다.

외과의의 비애였다.

수술은 최소 3시간에서 길게는 하루를 꼬박 새우는 경우가 있었다.

수술 시간이 짧으면 하루에 3번까지 수술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살벌한 스케줄 속에서.

몸이 축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외과의는 수술 내내 허리를 꼿꼿이 펴야 하니 허리가 아프고.

미세 현미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니 눈이 뻑뻑하고.

줄곧 수술 도구를 써야 하니 손가락 마디와 손목 관절이 남아나질 않았다.

그 와중에 날카로운 정신력과 집중력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덤이었다.

외과의가 괜히 3D(Dirty, Difficult, Danger) 업종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준후가 남다른 활약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무림을 경험한 준후는 더러운 일을 많이 해봤다.

힘들고 위험한 일도 많이 해봤다.

운기조식과 영양제 조합으로 피로를 모르기도 했다.

준후는 다른 외과의와 출발선부터 달랐다.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자주 들어.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무서운 말씀 마세요. 교수님이 은퇴하시면 환자와 스태프들은 어떻게 하고요.”

“그냥 수술 끝나면 하는 맨날 하는 넋두리 같은 거란다. 신경 쓰지 마.”

재현이 피식 웃으며 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교수님. 제가 마사지해드릴까요?”

“마사지?”

“네. 제가 신원대 약손이거든요. 믿고 맡겨주시죠.”

“됐다. 쉬는 날에 괜히 힘 뺄 필요 없어. 마사지로 풀릴 피로 같았으면 애초에 이 고생도 안 했지.”

“속는 셈 치고 받아보세요.”

준후는 소파에서 일어나 재현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재현이 소파에 엎드리도록 만든 후.

양 엄지로 재현의 허리 주변 근육을 살살 문지르며 내려갔다.

내공이 담긴 손가락이 잔뜩 뭉친 재현의 허리 근육을 풀어줌과 동시에.

막혀 있던 경락(기가 흐르는 통로)을 개통시키기 시작했다.

11번 신도혈부터 3번 요양관혈까지 추궁과혈하자 과연 재현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무슨 조화니? 요통이 싹 가셨는걸?”

재현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방금까지만 해도.

쑤시고 욱신거리던 허리가 말짱해졌던 것이다.

뭐랄까.

허리에 차고 있던 모래주머니가 벗겨진 것 같기도 하고.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허리가 가벼워진 재현이었다.

하지만 기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준후는 재현을 다시 앉힌 뒤 목도 마사지해 주었다.

목 주변의 혈 자리를 꾹꾹 누르고.

재현의 고개를 좌우 90도 꺾으며 굳어 있던 목 관절의 범위도 넓혀주었다.

빠드드득.

빠드드득.

무시무시한 뼈 소리에 재현은 소름이 돋아 이대로 목뼈가 부러지는 줄 알았지만 그건 기우였다.

목 마사지와 스트레칭이 끝나자.

목은 개운하기 그지없었다.

이어지는 준후의 손목 마사지 또한 효과 만점이었다. 만성이었던 손목 통증까지 잠시나마 싹 가셨던 것이다.

양 손목으로 원을 그려보고 재현은 혀를 찼다.

“기분이 어떠세요?”

“허…… 아직도 얼떨떨하구나. 마사지가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는데.”

“이제 제가 신원대 약손이라는 거 믿으시겠죠?”

“암 그렇고말고. 근데 이런 훌륭한 마사지는 대체 어디서 배웠니?”

“무림…… 아니, 무리해서 배웠습니다. 친척분 중에 스포츠 마사지하시는 분이 있어서요. 고등학교 때요.”

준후는 황급하게 실언을 주워 담았다.

“어쨌거나 고맙다. 덕분에 다음 수술은 좀 편하게 집도하겠어.”

“이 정도야 뭐…….”

준후는 멋쩍게 웃었다.

사실 준후는 재현에게 추궁과혈 정도밖에 해줄 수 없어서 아쉬웠다.

준후는 그동안 재현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

비급이나 다름없는 뇌종양 자료들을 받았고.

오늘은 재현의 집도를 참관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다.

준후가 타 대학 출신 레지던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준후가 재현에게 받은 것에 비해.

준후가 재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너무 작고 초라하고 볼품이 없었다.

스승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분명 그거겠지.

내가 스승님을 뛰어넘는 신경외과의가 되는 것.

그럼 스승님도 마음 놓고 의료 시스템을 개혁하는데 매진할 수 있을 테고.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주세요.

제가 당신의 자리를 이어받겠습니다.

준후는 속으로 각오를 다지고 다시 재현의 맞은편 소파로 돌아갔다.

“교수님.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어디 보자. 다음 수술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단다. 시간이라면 널널한 편이지.”

“괜히 쉬셔야 하는데 방해가 되는 건 아닌가 싶어서…….”

“쓸데없는 걱정은 말거라. 그리고 환상적인 마사지까지 받았는데 설마 내가 맨입으로 넘어가겠니?”

재현이 농담조로 말했다.

준후도 피식 웃었다.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내일 각성 수술 어시스트에 들어갑니다.”

“그래. 잘 알고 있지. 내가 참관을 권유한 것도 그 때문이었고.

“사실 그 환자에 대해 상의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질문하는 준후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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