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제31장 진전(3)
환자의 질환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준후는 먼저 환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재현이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쓸어내렸다.
“환자가 유명한 피아니스트였구나. 이름 그대로 유명한 분이지. 나도 이름은 알고 있을 정도니까.”
“저는 검색해 보고 알았습니다.”
“그럴 수 있어. 사람마다 관심 분야는 다 다르니까. 그나저나 너희 과장님이 도끼눈을 뜨고 너희를 보고 있겠구나.”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수술이 잘못되면 잡아먹을 기세입니다. 우리 과의 평판을 떨어뜨렸다고 말입니다.”
준후는 진저리치며 대답했다.
과장의 가느다란 뱀눈.
특유의 짜증 나는 말투가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그런데 교수님은 저희 과장님을 잘 아세요?”
“알다마다. 그 양반이 속 좁다는 거 학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
“저희 과장님은 유명한 게 아니라 악명이 높았군요.”
“뭐, 그런 셈이지.”
“휴대폰 보여드리겠습니다.”
준후는 재현에게 선뜻 휴대폰을 내밀었다.
휴대폰에는 어느새 명한의 차트가 떠올라 있었다.
요즘은 휴대폰으로도 환자의 의무기록과 PACS(의료영상저장전송시스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시대가 많이 좋아진 것이다.
하지만 이 편리함이 반드시 축복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병원 전산이 휴대폰과 연결되면서 의사는 더욱 쉴 수가 없었다.
“그래, 어디 볼까?”
재현이 준후가 건넨 휴대폰을 받아 차트를 살피기 시작했다.
재현은 과연 명한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을까.
치료 계획은 어떻게 세울까.
준후는 스승의 판단이 무척 궁금했다.
한 5분쯤 지났을까.
각종 차트와 MRI까지 다 살핀 재현이 준후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재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만만치 않은 케이스구나. 고생이 많겠어.”
“네. 교수님이 주신 자료에도 없었던 케이스입니다. 그래서 교수님의 의견이 더더욱 궁금했고요.”
“내 의견이라…….”
재현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건 듣지 않는 편이 낫겠구나.”
“어째서입니까? 저는 듣고 싶습니다.”
준후가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재현의 의견이라면 필시 망망대해에 등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스승의 거절이 준후는 낯설고 의외처럼 느껴졌다.
“너는 집도의인 동훈 교수의 뜻을 따라야지. 내 말이 아니라.”
“교수님의 방식을 알고만 있는 것도 안 되는 겁니까?”
“모르는 게 훨씬 좋아 보이는구나. 괜히 수술에 선입견이 생길 수 있어.”
“…….”
“무엇보다 이번 수술은 각성 수술이란다. 신경 자극술을 펼쳐보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확정할 수 없지.”
“교수님의 뜻이 그렇다면 더 여쭙지 않겠습니다.”
“예상외로 쉽게 포기하는구나. 오늘은 싱거운 느낌인걸?”
“교수님이 생각을 알려주시지 않는 데는 다 큰 뜻이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저는 그 뜻을 믿습니다.”
준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입을 다문 재현을 원망하거나 재현에게 서운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무림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준후는 사제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라고 생각했다.
일단 누군가를 스승으로 삼았다면 스승을 믿고 끝까지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승을 의심하는 순간.
신뢰는 깨지고 가르침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릴 테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의 짐이 좀 덜어지는구나. 그런 태도라면 내가 왜 이렇게 나왔는지 금방 깨달을 수 있을 거야.”
재현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준후를 향한 재현의 눈빛은 한층 부드러워졌다.
덕분에 준후는 자신이 정답을 말했음을 알았다.
“케이스가 많이 어렵긴 하다만…… 동훈 교수님과 네가 함께라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거란다.”
“네. 교수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화제를 바꿔보자. 네가 오늘 수술을 참관하면서 뭘 느꼈는지 궁금하구나.”
“귀가 살짝 따가우실 수도 있을 겁니다.”
넉살과 함께 준후의 설명이 이어졌다.
준후는 수술 전후 과정을 꼼꼼하게 노티했다.
마치 수술 기록지를 읊는 것처럼.
재현의 집도를 초식화 하여 암기해 둔 준후였다.
조금 과장하자면 지금 당장 수술방에 가더라도 준후는 재현의 수술을 거의 100퍼센트 재현할 자신이 있었다.
수술에 대해 설명하고.
준후는 오늘 깨달은 바를 명한의 수술에 어떻게 응용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도 전했다.
“아주 훌륭해.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어.”
“제가 원래 산수에 능한 편이거든요.”
“원, 녀석도. 뇌종양 자료집은 많이 읽어 봤니?”
“다 읽어 봤고 4번째 복습 중입니다.”
재현에게 뇌종양 비급을 전수받은 것이 벌써 6개월 전이었다.
준후는 여유가 날 때마다, 아니, 없는 여유를 만들어가며 비급을 탐독했다.
만약 자료가 문서 파일이 아닌 책이었다면 표지와 책장은 이미 너덜너덜해졌으리라.
“최소 2년은 잡고 있었는데 벌써 끝내 버렸구나.”
재현이 입까지 벌려가며 감탄했다.
재현이 준후에게 준 자료집은 분량이 방대했다. 논문 300여 개를 압축해놓은 것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논문에는 오랜 실전 끝에 재현이 터득한 다양한 비법들까지 담겨 있었다.
절반 정도 읽었으면 칭찬해 줄 생각이었는데 벌써 4번째 복습 중이라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준후의 학습력이었다.
“못 믿으시겠으면 이 자리에서 테스트를 하셔도 좋습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단다.”
“확인하시는 게 속 편하지 않으시겠어요?”
“네가 나를 믿는 만큼 나도 너를 믿으니까.”
교차하는 두 사람의 시선이 끈끈했다.
인연을 맺은 기간은 짧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깊게 신뢰하고 있었다.
진짜는 진짜를 알아보는 법이었다.
“그럼 슬슬 새로운 자료를 보내줘야겠어. 뇌종양 다음으로 공부하고 싶은 분야는 어디니?”
재현의 질문에 준후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다음으로 정복하고 싶은 분야는…….”
* * *
준후와의 면담을 끝내고 재현은 연구동 건물을 나왔다.
계절은 바야흐로 가을이었다.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상쾌하고 신선했다.
병원 조경을 위해 심어놓은 나무들은 어느새 노랗고 빨간 옷으로 갈아입었다.
걸을 때마다 낙엽이 자주 발에 채었다.
인간의 나이를 계절로 환산하면.
재현은 막 가을에 접어든 시기일 것이다.
봄과 여름으로 젊었던 시절.
몸과 마음을 다 바쳤던 의술이 무르익어 정점에 도달했으니까.
하지만 재현은 다가올 겨울이 두렵지 않았다.
다가올 겨울은 든든한 제자 준후가 맡아줄 것이기에.
첫 만남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준후는 6개월 만에 뇌종양 자료를 독파하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테스트를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재현은 알 수 있었다.
준후에게서 목표를 이뤄낸 사람 특유의 자신감과 당당함을 엿봤던 것이다.
지금처럼만 성장해다오.
그래서 빨리 내 뒤를 이어다오.
똑같은 비극을 반복하게 만드는 대한민국의 의료 시스템을 내가 뜯어고칠 수 있게.
명의로 소문나고.
더 많은 환자를 보게 되면서.
재현은 의료 시스템의 부조리함을 처절하게 느꼈다.
환자만 치료해서는 답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준후가 도와준다면 재현은 한결 더 빠르게 대업을 이뤄낼 수 있으리라.
본관에 들어선 재현은 수술방이 있는 4층을 찾았다.
터벅터벅, 복도를 가로질렀다.
“과장님. 오늘도 일찍이십니다.”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4년 차이자 치프인 동수가 재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래. 동수구나. 푹 쉬었니?”
“잘 쉬지는 못했습니다. 전공의 시험 준비 때문에.”
동수가 재현 옆에 서서 머쓱하게 웃었다. 동수는 올겨울 전공의 시험이 있었다.
“합격률이 90퍼센트 이상인데. 좀 널널하게 해도 되지 않니?”
“그동안 공부를 못했거든요.”
“하긴 너도 의국 신경 쓰랴, 내 수술 따라다니랴 고생이 많구나.”
“과장님 어시스트하는 건 영광이죠. 그런데 과장님.”
동수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참관용 수술실에 있던 친구는 누구입니까? 타 병원 레지던트죠?”
“잘 봤구나.”
“굳이 타 병원 레지던트에게 참관을 허락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인연이 있다고만 알아두려무나.”
재현은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준후가 자신의 제자라는 사실을 발설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준후는 학계의 누군가와 뜻하지 않게 적이 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재현에게 적이 많았으니까.
사람 사는 세상은 혼탁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정의를 추구하면 그 진심을 의심받고 실력이 뛰어나면 시기와 질투를 사게 되어 있었다.
재현을 싫어하는 이들은 요즘도 재현의 평판을 깎고 명예를 끌어내기 위해 호시탐탐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렇군요. 그래도 교수님 눈에 들 정도면 꽤 실력 있는 친구겠습니다.”
“암. 기대를 많이 하고 있지.”
“혹시 그 친구가 저보다 잘합니까?”
동수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동수는 실력이 좋았고 호승심도 강했다. 하지만 외과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에 감점 요인이 있었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구나. 타 대학 출신이라서.”
“그래도 느낌이란 게 있지 않으십니까?”
“오늘은 느낌이 가출한 모양인데?”
“제 편을 들어주시지 않는 걸 보니 그 친구도 만만치 않나 봅니다.”
동수가 언뜻 서운한 기운을 내비쳤다.
그럴 만했다.
동수는 1년 차 때부터 재현을 졸졸 따라다니며 제자를 자처했으니까 말이다.
“그건 그렇고 동수야.”
“네. 과장님.”
“내일 오전, 내 수술 스케줄이 어떻게 되니?”
“제 기억으로는 10시에 한 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걸 8시로 당기자꾸나.”
“너무 이르지 않겠습니까? 거의 오전 회진 끝난 직후입니다.”
“괜찮아. 그 정도는.”
재현은 급하게 수술 스케줄을 변경했다.
모레 신원대에서 있는 각성 수술을 참관하기 위해서.
* * *
재현과 헤어진 후.
준후는 신원대 병원 야외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있었다.
수많은 환자와 보호자, 병원 내 스태프들이 준후를 스쳐 지나갔다.
심지어 사이렌을 울리는 구급차도 지나갔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준후는 오늘 오전을 복기하고 있었다.
직접 참관했던 스승의 각성 수술.
각성 수술 참관 후 스승과 나눴던 대화들을.
돌이켜보면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에 얻은 것이 많았다.
명한 씨 수술이 벌써 모레구나.
준비할 수 있는 건 대충 다 준비한 것 같은데.
딱 하나만 빼고.
준후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셀카 모드로 변경했다.
휴대폰 액정에 드러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안(正眼)을 펼쳤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이 눈동자에 집중되었다.
집중된 내공으로 눈동자가 뜨거워졌다.
눈동자에 불이 난 것 같았다.
안심하세요.
누구도 당신을 해칠 수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호수처럼 고요해질 겁니다.
내공과 함께 정념을 발산하자 눈동자가 잠시 푸른 벽안을 띠었다.
하지만 유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나름 필사적이었던 정념도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마음이 편안해지기는커녕 짜증만 올라올 뿐이었다.
정안만 완성할 수 있다면.
환자가 수술 도중 패닉에 빠지더라도 진정시킬 수 있을 텐데.
안정제를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부작용도 막을 수 있을 텐데.
준후는 아쉬움을 떨쳐내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해가 하늘 꼭대기에 걸린 정오였다. 슬슬 다음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지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
확인해 보니 아영이 메신저를 보냈다.
[준후야 우리 출발했어. 이따가 거기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