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169화 (169/424)

169화

제31장 진전(4)

“다 왔습니다.”

“네. 고생하셨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택시비를 지불하고 준후는 택시에서 내렸다.

현재 시각은 오후 2시.

도착한 곳은 경기도에 위치한 워터파크로 출입구는 입장객으로 붐볐다.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입장객의 대부분은 청춘남녀였는데 곳곳에서 꺄르륵 소리의 즐거운 웃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가을이면 날씨가 선선해서 워터파크를 찾는 사람이 적을 줄 알았건만 그건 준후의 착각이었다.

휘이이잉.

바람에 등이 떠밀리듯.

준후는 매표소로 이동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 중에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영, 혜진, 태섭.

바로 오늘 워터파크에서 준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의대 동기들이었다.

* * *

[준후야, 우리 언제 오프 맞춰서 워터파크 안 갈래?]

아영에게 메신저가 온 것은 한 달 전.

준후가 당직 근무를 서던 어느 새벽녘이었다.

[워터파크? 글쎄, 난 안 될 것 같은데? 병동 일이 워낙 바빠서.]

[원래 바쁠 때일수록 더 잘 쉬고 바깥바람 쐬어야 하는 거 아닐까? 사람이 숨 쉴 구멍도 있어야지!!!!]

[난 병원에서도 숨 잘 쉬어ㅋㅋㅋㅋ]

[바보,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의사 서준후 말고 인간 서준후에게도 신경을 써주자는 말이야.]

아영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확실히 준후는 의사이기 전에 한 명의 사람이었다.

평범한 사람처럼 다양한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단, 의술이라는 목표에 매진해서 모든 욕망을 통제하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수영 싫어해?]

[아니.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편이야. 물도 좋아해. 심지어 좋아하는 사자성어가 상선약수야.]

[혹시 윤리 시간에 배웠던 그 상선약수?]

[맞아.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그럼 더더욱 가야겠네! 우리 준후 워터파크에서 물 좀 먹자. 물 좀 먹다 보면 도를 깨울 칠지도 몰라.]

[알았어. 간다 가ㅋㅋㅋ 스케줄 확인하고 내일 연락 줄게.]

[약속한 거다? 야호!!! ㅋㅋㅋ]

그 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준후가 오프 날짜를 알려주자 나머지는 아영이 번개처럼 처리했다.

미리 할인하는 워터파크 입장권을 찾아 구매하고.

같이 갈 동기들을 모집하고.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등등.

아영은 의외로 추진력이 좋았다.

“오전부터 어디를 그렇게 쏘다녔냐? 일찍 놀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준후가 일행에게 다가가자.

일행 중 한 명인 태섭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말 못 할 사연이 있었지.”

“칫. 네 사연은 하나도 안 궁금하거든? 말하고 싶으면 라디오에나 보내라. 수영복은 챙겨왔고?

“아니. 빌려야 해.”

“그럼 백 팩에 든 건 뭔데?”

태섭이 준후가 등에 멘 가방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기 전에 살 게 있었거든.”

준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백 팩에 들어 있는 물건은 모레 있을 각성 수술에 필요한 필살기였다.

스승의 수술을 참관한 후 구입한 물건들이었다.

“네가 무슨 스파이라도 되냐? 왜 이렇게 비밀이 많아?”

“내가 원래 양파 같은 남자잖아.”

“염병. 확 볶아버릴라!”

태섭의 농담에 준후를 포함한 일행이 깔깔깔 웃었다.

이 자리에 모인 네 사람은 꽤 친한 편이었다.

대학 시절, 조별 과제를 같이한 적도 있었고 동아리 활동도 겹쳤었다.

성호 형이 있었으면 더 즐거웠을 텐데.

준후는 무의식적으로 든 생각에 팔찌를 쓰다듬었다.

성호의 부재를 느낀 순간.

가슴 한쪽이 아려왔지만 기꺼이 견뎌내었다.

이 상처는 준후가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할 상처였다.

동시에 준후가 환자와 보호자의 치료에 무뎌지지 않도록 도울 안전장치이기도 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환자를 보다 보면.

아무래도 환자나 보호자의 아픔에 둔감해지기 마련인데.

성호를 잃고서 준후는 환자나 보호자의 아픔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상처를 입은 사람만이 다른 상처 입은 사람을 온전히 보듬을 수 있는 이치였다.

“그나저나 사람 한번 많네.”

준후는 워터파크 출입구를 훑으며 말을 이었다.

“평일에 가을이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은 몰랐어.”

“준후 넌 몰랐겠지만 이것도 적은 편이다.”

“진짜?”

“주말 여름이었으면 거의 출근길 지하철 수준으로 사람이 꽉 찼을걸?”

“맞아. 이 정도면 양호하지.”

아영의 말에 혜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평일에도 노는 사람이 꽤 많구나.”

“방학 시즌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호모 루덴스란 말도 있잖아. 놀이하는 인간.”

태섭이 대꾸했다.

“갑자기 여기서 잘난 체를?”

“나도 먹물 좀 뿌려보고 싶었다. 왜 떫어?”

“뭐, 조금?”

“그나저나 여기서 제일 위험한 사람이 너거든? 오늘은 좀 작작하자. 응?”

“내가 왜?”

“너 환타(환자 타는 의사, 환자를 불러오는 의사)인 거 다른 의국까지 소문 쫙 퍼졌잖아.”

태섭이 팔짱 낀 채 말을 계속했다.

“제발 워터파크에서는 환자 만들지 말자. 만약 여기서 CPR 하는 상황 생기면 다 네 탓이다?”

“너까지 누명 씌우지 마. 안 그래도 억울해 죽겠으니까.”

“잡담은 그만하고 슬슬 들어가자.”

아영과 아영에게 팔짱을 낀 혜진이 앞장서고 그 뒤를 준후와 태섭이 따랐다.

“태섭아. 나 궁금한 게 있다.”

준후의 시선이 앞서가는 두 사람에게 떨어질 줄 몰랐다.

“뭔데?”

“아영이란 혜진이는 왜 서로 팔짱을 끼고 걷냐?”

“으음…… 친근함의 표시 아닐까?”

“안 끼고 걷는 여자들도 많은데?”

“끼고 걷는 여자들도 많아.”

태섭의 말을 듣고 보니 또 맞았다.

아영과 혜진처럼 서로 팔짱을 낀 여성들도 제법 있었다.

“뭐야? 천하의 서준후도 스킨십이 그리웠나 보지? 그럼 형님이 큰맘 먹고 팔짱이라도 끼워줄까?”

“어디 한번 해봐. 팔을 분질러 줄 테니까.”

“준후, 넌 쓸데없는 거 궁금해하지 말고 정말 제대로 된 걸 궁금해하는 게 어때?”

“제대로 된 호기심이 뭔데?”

“진짜 모르는 거냐,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냐?”

태섭이 문득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준후를 쳐다보았다.

마치 태섭은 준후가 모르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은 술에 물 탄 것처럼 안 끝날 거다. 각오 단단히 해.”

태섭의 목소리가 어쩐지 비장했다.

* * *

워터파크 탈의실.

태섭은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챙겨 온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뭐,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데?

측면에 붙은 벽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태섭은 씨익 웃었다.

오늘을 위해 지난 한 달 동안 다이어트를 빡세게 해왔다.

그 덕분일까.

몸에 근육은 없었지만 상체가 제법 호리호리하게 잘 빠졌다.

굳이 티를 걸쳐 뱃살을 가릴 필요가 없었다.

태섭은 아닌 척하면서.

탈의 중인 다른 남성들을 쓱 훑었다.

짙어지는 미소.

자신의 몸이면 워터파크에서 상위 10퍼센트 안에는 들어갈 것 같았다.

후후후. 이만하면 좋은 만남을 기대해도 될까나.

“왔냐? 좀 늦었네?”

“어. 나 말고도 수영복 대여하는 사람이 꽤 많더라고.”

준후가 뒤늦게 탈의실에 합류했다. 입고 있었던 옷을 벗고 빌린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런데 준후의 맨몸을 보고.

태섭은 큰 충격을 받았다.

병원에서 가운을 걸친 준후는 말라깽이 같은 인상을 풍기곤 했다.

조금 과장하면 수수깡 같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탈의 중인 준후의 몸은 뜻밖에 탄탄했다.

헬스를 한 근육질의 몸매는 아니었지만 뭔가 이소룡처럼 다부지면서도 보기 좋은 근육을 가졌다.

어깨도 수영선수처럼 넓었으며 상체가 멋들어진 역삼각형을 띠고 있었다.

크으으윽-

얼굴은 져도.

몸에서는 안 질 거라 자신했는데!

혼자서 쓰라린 1패를 추가 적립한 태섭이었다.

“야, 너 몸 좋다? 따로 운동하냐?”

“글쎄. 따로 운동을 한다기보다는 근육 쓰는 법을 안다고 해야 할까? 그걸 알면 평소에 사소한 동작에도 근육을 단련할 수 있지.”

“예를 들면?”

“메스를 쥐었다고 가정해 볼게.”

탈의를 마친 준후가 오른손으로 가상의 메스를 잡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오른팔의 전완근(손목부터 팔꿈치까지 이어진 근육)이 불끈 튀어 올랐다.

굵직굵직한 혈관이 도드라졌다.

“이런 식으로 메스를 사용하면서 근육도 키울 수 있어.”

“헬창이냐? 스크럽하면서 근육도 키우게?”

“억지로 하는 건 아니고. 난 저절로 이렇게 돼.”

“잘났다. 잘났어. 네 똥꼬 칼라다.”

태섭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의대 재학 시절부터 준후는 뛰어나면서 별난 아이였다.

그리고 그런 부분은 인턴과 레지던트를 거치는 도중에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아마 신원대에서 준후를 모르는 사람은 찾기 힘들 것이다.

신규 직원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다 갈아입었으면 가자.”

“그래.”

태섭은 준후와 탈의실을 나왔다.

따뜻한 가을 햇살을 맞으며 아영과 혜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기 지루해서 주변을 살피는데 뭇 여성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여성들이 꼭 이쪽을 한 번 힐끔거렸다.

하지만 태섭이 우쭐했던 것도 잠시뿐이었다.

여성들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준후를 훑고 있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잘 생기고 일까지 잘하는 사람은 어떤 기분으로 사냐?”

“너랑 다를 바 없어.”

“많이 달라 보이는데?”

“누구나 마음속에는 지옥이 있어. 살면서 고통받는 건 똑같아. 재산이 얼마가 있든, 부와 명예가 넘쳐나든, 그런 건 상관없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어. 기본적으로 생로병사를 피할 수 없잖아? 또 1조가 있어도 2조를 벌고 싶은 게 사람 욕심이고, 정치인이 되면 대통령도 하고 싶은 게 사람 욕심이지.”

말을 마친 준후가 씁쓸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누구나 마음속에 지옥이 있다면.

준후의 마음속에도 지옥이 있다는 뜻일 텐데.

태섭은 준후의 마음속에 지옥이 있다는 걸 이해하기 힘들었다.

대체 준후가 뭐가 모자라서?

“그럼 네 마음속에 있는 지옥은 뭔데?”

“워터파크에서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해줄게.”

“야, 얼렁뚱땅 넘기지 말고 말해 봐.”

“저기, 아영이랑 혜진이 나온다.”

준후가 태섭의 말을 잘라먹었다.

아무래도 준후는 더 대답을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아영아, 혜진이가 방패라도 돼? 왜 그렇게 숨어 있어?”

이쪽으로 다가오는 아영과 혜진을 보며 태섭이 익살맞게 물었다.

아영이 혜진의 등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좀 부끄러워서…….”

“그럼 계속 그러고 있으려고?”

“역시 안 되겠지?”

아영이 부끄러워하며 혜진의 곁에 섰다.

아영의 수영복을 본 순간.

태섭은 아영이 부끄러워한 이유를 단박에 알았다.

아영이 파격적인 비키니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 얌전한 아영의 성격을 생각하면 예상 밖의 선택이었다.

아무래도 아영 또한 ‘그 작전’을 위해 작정을 한 듯했다.

“정태섭. 그 입 좀 다물지?”

“내가 입을 벌리고 있었나? 갑자기 숨이 안 쉬어져서. 하하하.”

혜진의 찌릿한 눈빛을 받고서 태섭이 멋쩍게 웃었다.

비키니를 입은 아영은 아름다웠다.

실제로 근처를 지나가던 남성들은 아영을 발견하곤 눈을 반짝거리곤 했다.

외모와 몸매가 사람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적어도 워터파크에서 만큼은 중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 오늘 아영이 미쳤는데?”

태섭이 팔꿈치로 준후의 옆구리를 건드리며 물었다.

“난 모르겠는데?”

“엥? 그게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

“아영이는 가운 입었을 때가 제일 예뻐.”

준후가 태섭에게 속삭이듯 대답했다.

“너 돌았어? 어디 의사 가운 따위를 비키니랑 비교해?”

“제 의견도 존중해 주시죠?”

“그건 의견이 아니라 막말이거든?”

“저기요, 거기 두 분. 지방 방송 좀 꺼주세요.”

혜진의 지적에 두 사람의 다툼은 일단락되었다.

“일단 파도 풀장부터 가자. 아영이랑 준후가 앞장서.”

“그러지 뭐.”

“그래.”

아영과 준후가 앞장서고 그 뒤를 태섭과 혜진이 뒤따랐다.

“준후 반응은 어때?”

혜진이 태섭 곁에 서서 먼저 물었다.

혜진의 시선은 앞서가는 두 사람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준후 새끼, 완전 돌 아이야. 아영이는 비키니보다 가운 입은 모습이 더 예쁘대.”

“중증이네. 내가 남자였으면 아영이한테 미쳐 버렸을 텐데.”

“내 말이 그 말이야.”

“뭐? 너도 아영이한테 미쳤다고?”

혜진의 살벌한 눈빛에 태섭이 깨깽했다.

“워워. 진정해.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어쨌거나 오늘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그래서 네가 잘해야 해. 준후 마음을 막 헤집어놓으라고.”

“걱정 마. 혀로 사람 구워삶는 건 내 전문이니까.”

“실패하면 가만 안 둔다? 나 아영이 속상해하는 거 더 이상은 보기 싫어.”

“나도 마찬가지거든?”

태섭과 혜진이 비장한 시선을 교차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두 사람은 아영의 고백을 위해 뭉친 원정대의 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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