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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170화 (170/424)

170화

제31장 진전(5)

워터파크는 생기가 넘쳤다.

평일과 방학 시즌이라서 가족 단위 손님보다 젊은 손님이 많았는데.

삼삼오오 모여 바쁘게 어트랙션으로 향하거나 수영을 즐기기 바빴다.

스피커에서는 워터파크의 흥겨운 테마곡이 연신 흘러나왔고.

워터파크의 자랑거리 중 하나라는 실외 파도 풀장에서 벌써부터 신나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해?”

“잠깐 잡생각이 들어서.”

곁에서 걷던 아영의 질문에 준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잡생각 아니잖아. 환자 생각하는 거지? 준후 넌 환자 생각할 때 말이 없어.”

“들켰네. 귀신은 속여도 아영이 너는 못 속이겠다.”

“내가 서준후 하루 이틀 보나?”

아영이 살짝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아영의 말이 옳았다.

준후는 환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모레 있을 각성 수술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스승님 수술을 참관하며 얻은 깨달음을 명한의 수술에 어떻게 적용할까 하는 궁리 중이었다.

“기왕 놀러 왔는데 힘을 좀 빼보는 건 어때?”

“이상하게 그게 잘 안 되네.”

“쉬는 시간이 꼭 노는 시간 같지? 게으름 피우는 것 같지?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

아영의 지적이 송곳처럼 준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나 안 보는 사이에 독심술이라도 배웠어?”

“그럴지도?”

아영이 씽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언제 책을 봤는데, 푹 쉬거나 멍을 때릴 때 오히려 뇌가 생각들을 정리해서 뇌의 효율이 좋아진대.”

“…….”

“쉬는 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면 죄책감 없이 쉴 수 있지 않을까?”

“한 수 배웠습니다. 스승님.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준후는 장난스럽게 아영을 쳐다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두 뺨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아영.

준후가 본인의 몸을 훑어본다고 착각한 모양인데 그 반응 때문에 준후도 살짝 쑥스러워졌다.

아영이 비키니를 입고 있어서.

평소처럼 쳐다보는 게 살짝 부담됐던 것이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고 할까.

“흠흠. 비키니 잘 어울린다. 근데 그래서 눈을 못 마주치겠어.”

“너무 노출이 많은 걸 입었나 봐. 사람들이 막 쳐다봐서 민망해. 다른 사람들 보라고 입고 온 건 아닌데.”

“그럼 누구 보라고……?”

“누…… 누구긴 누구겠어? 당연히…… 혜진이지! 혜진이가 평소에 자기 몸매 자랑을 많이 해서 기를 꺾어주고 싶었거든.”

말을 마친 아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준후도 아영을 따라 웃었다.

준후의 시선은 여전히 아영 너머에 매점을 향하고 있었다.

10여 분을 걸어 도착한 파도 풀.

일행은 구명조끼를 걸치고 풀장으로 입수했다.

발목 근처에서 잘박거리던 물살이 금방 허벅지, 허리, 가슴까지 차올랐다.

“다들 수영은 할 줄 알아?”

“난 할 줄 알아.”

“나도.”

“칫, 나만 맥주병인가?”

준후의 질문에 아영과 혜진, 태섭이 차례대로 대답했다.

수영을 못하는 이는 태섭뿐이었다.

“비록 수영은 못해도 물장난이라면 국가 대표지. 받아라!”

태섭이 괴성을 지르며 양손을 휘저었다.

태섭이 일으킨 하얀 물보라가 준후를 덮쳐왔다.

하지만 준후는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물보라를 가볍게 피해냈다.

무림에서 마두의 서슬 퍼런 살초(殺招)를 맞상대했던 준후였다.

물장난을 피하는 것은 눈을 깜빡거리는 것만큼 쉬웠다.

“어쭈 피해? 다들 공격! 서준후를 물리쳐라!”

“공격!”

“공격!”

태섭의 지휘 아래 아영과 혜진이 준후에게 물을 튕겨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물보라를 일으키고.

또 손으로 물을 퍼서 준후를 향해 쏘았지만 준후는 환상적인 움직임으로 전부 피했다.

휘리리릭.

휘리리릭.

손으로 물을 저어가며 방향을 바꾸고.

또 고개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준후는 물 한 번 먹지 않았다.

“셋이서 연합을 먹으시겠다? 그래도 소용없을걸?”

준후는 해룡신장에 제3초식인 장강대해를 펼쳤다.

내공을 머금은 손바닥이 활짝 펼쳐졌다.

손바닥이 물살을 밀어내자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집채만 한 파도가 만들어졌다.

그것도 아영과 혜진, 태섭을 다 덮칠 만한 크기의.

파도를 바라보는 세 사람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철썩~

세 개의 거대한 파도가 덮치면서 아영과 혜진, 태섭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폭삭 내려앉았다.

“간악한 마두들. 너희들의 죄를 너희가 알렸다.”

“마…… 마두가 뭔데?”

“어우. 물 제대로 먹었다. 콜록. 콜록.”

“항복. 항복.”

태섭과 혜진이 아영이 한마디씩 했지만 준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물장난을 치다 보니 모처럼 동심(?)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경화수월.

준후는 내친김에 상승 무공을 펼쳤다.

경화수월은 준후가 가장 즐기는 장법 중 하나였다.

준후가 물살을 밀어내며 손바닥을 뻗었는데 그 손이 마치 10개로 분열된 것만 같았다.

그만큼 손속이 빨랐던 것이다.

크고 작은 열 개의 파도가 휘몰아치면서 세 사람은 한 번 더 된통 당했다.

시간 차로 사방에서 쏟아지는 파도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셋이서도 준후 하나를 감당하는 건 역부족이었다.

* * *

준후는 야외 벤치에 앉아 젖은 몸을 말리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태섭이 앉아 있었다.

아영과 혜진은 간식거리를 사러 간다며 잠깐 자리를 비웠다.

“네가 무슨 포세이돈이냐? 뭐 그렇게 큰 파도를 만들고 지X이야?”

태섭이 질린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좀 심하긴 했지?”

“뭐, 그래도 네가 신난 것 같아서 보기는 좋더라. 오늘 같은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맞을 거야. 아마도.”

준후의 기억으로도.

오늘처럼 아무 생각 없이, 아이처럼 놀았던 것은 처음이었다.

무림을 경험하고 현대에 돌아온 이후부터.

준후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삶을 살아왔다.

항상 바쁘게 무공을 수련하거나.

내공을 쌓거나.

의학 지식을 공부하기에 바빴다.

“이렇게 잘 노는 놈이 그동안은 왜 그렇게 안 놀았대?”

“안 놀아 버릇해서 그런 가 봐.”

“그럼 이제라도 버릇을 들여 봐. 노는 낙이라도 있어야 각박한 인생사를 버티지 않겠냐?”

“그러게. 가끔은 이런 것도 좋네.”

과연 한바탕 놀고 나니 준후는 속이 후련했다.

마음에 붙어 있던 감정의 찌꺼기를 다 털어낸 기분이었다.

“그건 그렇고 아영이 오늘 끝내주지 않냐?”

“아영이야 뭐, 원래 인기 많으니까.”

“뻔한 소리 하지 말고. 우리 솔직하게 한번 말해보자.”

“여기서 얼마나 더 솔직해질 수 있는데?”

“아영이가 너 좋아하는 건 알지?”

태섭이 돌직구를 날렸다.

그 말에 준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나랑 아영이 사이에 연애 감정 따위는 없어. 우린 돈독한 친구 사이일 뿐이야.”

“그건 네 생각이고. 아영이한테 직접 물어봤어?”

“제정신이야? 그런 걸 왜 물어봐?”

“슬쩍 떠볼 수도 있지. 원래 연애는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건데.”

“됐어.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말자.”

“싫은데? 난 재미있는데?”

태섭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준후 쪽으로 몸을 내밀며 준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마치 아영에 대한 이야기로 끝장을 보겠다는 태도였다.

이 녀석이 오늘따라 왜 이러지?

점심을 잘못 먹었나?

“서준후, 그거 알아? 넌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치사한 놈이야.”

“말이 좀 심하다?”

“왜? 내가 틀린 말 했다고 생각해? 난 아닌 것 같은데?”

태섭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말해 봐. 네가 정말 몰랐다고? 아영이가 널 좋아하는 걸 몰랐다고?”

“…….”

“그렇게 일 잘하고 눈치 빠르고, 환자와 보호자까지 챙기는 놈이 여태까지 아영이 마음을 몰랐다는 게 말이 돼? 너랑 아영이가 알고 지낸 것도 벌써 7년이 넘었거든?”

“…….”

“의대 6년에, 인턴 1년 포함해서 말이야. 그 정도면 달팽이도 아영이 마음은 알겠다. 이래도 내 말이 심했어?”

태섭의 속사포 같은 공격에 준후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사실은 준후도 알고 있었다.

아영이 자신에게 연정을 품었다는 사실을.

준후는 알면서도 그 마음을 일부러 모른 척해왔다.

“너 혹시, 아영이가 싫어?”

“싫을 리가 없잖아?”

“싫은 게 아니면 오늘 화끈하게 고백해. 언제까지 아영이 애태울 건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 난 주변 사람을 따뜻하게 챙길 자신이 없어. 의술에 매진하고, 또 치료에 매진하다 보면 아영이는 결국 뒷전이 될 거야.”

준후는 아영에게서 무림의 천 소저를 보았다.

천 소저는 준후의 약혼자였는데.

복수에 눈이 먼 준후는 천 소저를 한 번도 제대로 챙긴 적이 없었다.

아영과 교제를 한다면…… 아영도 천 소저처럼 자신 때문에 고통받을 게 불 보듯 뻔했다.

“어휴. 평소 너답지 않게 답답하다. 고구마를 한 열 개는 먹은 거 같네.”

태섭이 혀를 내두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쉽게 쉽게 가자. 그래서 아영이한테 고백할 마음은 있어?”

“아니. 없어.”

“열 받네 진짜. 그럼 차라리 오늘 헤어질 때 사귈 마음 없다고 딱 잘라서 말해. 나도 가슴 아프지만 그게 아영이를 위한 길인 것 같다.”

“…….”

“너 아까 사람에게는 누구나 지옥이 있다고 했지?”

“그래. 기억나.”

“근데 그거 알아? 아영이한테는 네가 지옥이었다.”

태섭이 팔짱을 낀 채 벤치에 등을 기댔다.

말은 안 했지만 준후의 판단에 크게 실망한 기색이었다.

준후는 크게 한숨을 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공은 한때 조화경에 달했었는데 애정 문제는 삼류 무사만도 못하구나.

* * *

아영과 혜진은 도넛 가게에서 도넛과 커피를 사서 준후와 태섭에게 돌아가는 길이었다.

“준후는 내 생각을 안 하는데, 나 혼자 괜히 설치는 거 아닐까?”

아영이 걱정을 담아 중얼거렸다.

준후에게 고백하기 위해 혜진과 태섭에게 SOS를 보냈지만 아영은 어쩐지 자신이 실수한 것만 같았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데…….

괜히 고백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사이만 어색해질 것 같았다.

“그럴 리 없어. 아영이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데. 세상에 너를 마다할 남자는 없어.”

“정말 그럴까?”

“그렇다니까! 아까 준후 신나게 노는 거 못 봤어? 아영이 네가 곁에 있으니까 그렇게 즐거웠던 거야.”

“…….”

“그리고 지금쯤이면 태섭이가 양념 엄청 치고 있을걸? 태섭이가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끝내주잖아?”

혜진이 손을 입 근처에 두고 손가락을 접었다가 폈기를 반복했다.

태섭의 말빨이 좋다는 걸 어필하는 제스쳐였다.

“뭐…… 그러면 다행이지만.”

“자신감을 가져. 오늘 넌 최고야.”

혜진이 아영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아영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고마워. 혜진아. 네 도움이 없었으면 이렇게까지 못했을 거야.”

“친구 좋다는 게 뭐니? 다 도와주고 도움받는 거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데 누군가가 불쑥 껴들어 앞을 가로막았다.

험상궂은 얼굴의 사내 4명이었다.

개중 두 명은 동물이 그려진 문신까지 하고 있었다.

사내들은 두 사람의 몸을 게걸스럽게 훑더니 입맛을 다셨다.

“이봐, 예쁜이들 시간 좀 있어?”

민머리의 사내가 말을 걸었다.

“어휴. 멘트 한 번 저질이네요. 어디서 삼류 영화라도 보고 수작거시는 거예요?”

“…….”

“그리고 기분 나쁘니까 그만 쳐다보실래요?”

“혜진아. 괜히 자극하지는 말자.”

아영이 혜진을 만류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괄괄할 성격의 혜진은 아영과 생각이 달라 보였다.

“고분고분하게 굴면 만만하게 생각할 거야. 나만 믿고 있어.”

“어쭈? 예쁘다고 튕기는 거야? 뭐, 성깔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렇죠? 형님들?”

“암. 그렇고말고.”

민머리의 말에 뒤에 있던 사내들은 깔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더 할 말 없으니까 비키세요.”

“못 비키겠다면?”

“그쪽이 워터파크에 전세라도 냈어요?”

혜진이 앙칼지게 대답하고 사내를 비켜 가려고 했다. 그러자 사내가 또다시 혜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혜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가긴 어딜 가? 어차피 놀러 온 처지에 같이 좀 놀면 어디 덧나나?”

“우웩. 여기 있는 어떤 사람이 당신들하고 놀아요? 눈알이 삐지 않고서야.”

“X발. 봐주니까 끝도 없이 기어오르네. 말은 좀 곱게 하자. 응?”

“오는 행동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고울 거 아니에요.”

“혜진아. 그만해.”

아영이 혜진의 손목을 붙잡으며 만류했다.

계속 이런 식의 대화가 이어지면 싸움이 크게 번질 것 같아서 불안했다.

“이쪽 아가씨는 그래도 예의를 아네. 아가씨라도 우리랑 놀자고.”

덥석!

민머리 사내가 목표를 바꿔 아영의 손목을 붙잡았다.

힘으로 아영과 혜진을 떼어내고 아영을 강제로 끌고 가려고 했다.

“야, 그 손 안 놔? 진짜 뒈지고 싶어?”

“이거 놓으세요!”

“왜 그래? 좋으면서 싫은 척…… 아아악!!!!”

민머리 사내가 갑자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자기 손목을 부여잡았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어리둥절하던 아영은 어느새 준후가 자신 곁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준후가 나타나서.

아영을 붙잡고 있던 민머리 사내의 손을 떼어내고 사내의 손목을 비틀어 버렸던 것이다.

“왜 이렇게 늦나 했더니 머저리들이 달라붙었구나. 이제 괜찮아. 내가 해결할게.”

준후가 앞으로 나서서 방패처럼 든든하게 아영과 혜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딱 봐도 너희는 구제 불능이다. 말로는 안 될 것 같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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