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제32장 팔레트(2)
워터파크의 실내 수영장은 퍽 넓었다. 천장은 까마득하게 높았고 구불구불한 길은 그 끝이 한눈에 보이지 않았다.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어트랙션도 5개나 보유하고 있었다.
실내라서 그럴까.
수영장에서 노는 청춘남녀들의 꺄르륵 웃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졌다.
“안 그래도 중간보고 듣고 싶었는데. 준후가 알아서 빠져주네.”
혜진이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4인용 벤치에 앉았다.
혜진 옆에 아영이 앉았고.
혜진의 맞은편에 태섭이 앉았다.
비밀 결사대이자 고백 원정대의 인원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어때? 준후는 입질 좀 있어?”
“어휴. 말도 마라. 철벽이야, 철벽.”
태섭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얼레? 언제는 너만 믿으면 된다면서? 이제 와서 약한 소리 하면 안 되지.”
“준후가 어디 보통내기냐? 깡패들 팍팍 때려눕힌 거에서 감이 안 와?”
“그거랑 아영이 고백하고는 상관없거든?”
말을 마친 혜진이 아영을 쳐다보았다.
아영은 수줍은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7년간의 짝사랑을 정리하고.
준후에게 진심을 고백하려는 아영이었다.
지금 아영이의 심정이 얼마나 조마조마하고 초조할지는 의대 단짝 친구였던 혜진마저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준후가 뭐라고 했는데?”
“좋은 소식이 하나 있고. 나쁜 소식이 하나 있다. 뭐부터 들을래?”
“좋은 소식부터 들려줘.”
“일단 준후도 아영이한테 마음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아.”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잘 됐다 아영아.”
혜진은 방긋 웃으며 아영과 양 손뼉을 마주쳤다. 고지가 코앞에 있는 기분이었다.
“근데 준후도 아영이한테 마음이 있으면 게임 끝난 거 아닌가? 대체 나쁜 소식은 뭐야?”
“말하자면 복잡한데…….”
태섭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준후는 아영이란 사귈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엥? 그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마음이 있으면 사귀는 거 아닌가?”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준후 자식 웃기는 짬뽕이야.”
태섭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설명에 나섰다.
태섭에 따르면 준후는 아영에게 잘해줄 자신이 없다고 한다.
앞으로 의술에 매진하면 아영에게 소홀히 하고 아영을 챙겨주지 못할 것이 뻔하기에.
차라리 사귀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했단다.
“준후 논리대로라면 외과의는 연애도 못 하고 결혼도 못 하냐? 말이 안 되잖아.”
혜진의 언성이 살짝 올라갔다.
준후의 답변이 어쩐지 핑계처럼 들렸다.
혜진의 생각에는 준후가 ‘못’하는 것과 ‘안’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뭐…… 노력하면 이해는 할 수 있겠더라.”
“그 요상한 사고방식을?”
“준후는 이상주의자야. 환자가 됐든 의술이 됐든 목표가 있으면 거기에 최선을 다해야 직성이 풀리는 애라고.”
“…….”
“연애도 같은 선상에 있단 뜻이지. 설령 아영이를 좋아하더라도 아영이에게 최선을 다할 수 없으면 연애를 안 하는 거야. 왜일 것 같아?”
“최선을 다할 수 없어서?”
“그래, 그런 애라고. 준후는.”
태섭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혜진이 아영의 고백을 도와달라고 했을 때.
또 오늘 워터파크장에 도착했을 때 보였던 태섭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태섭은 직감한 것 같았다.
무슨 수를 써도 준후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말 같지도 않은 소리고 궤변이야. 난 절대 이해 못 해.”
“네가 이해하고 말고는 상관없어. 중요한 건 아영이의 판단이지.”
태섭의 시선이 아영에게 머물렀다.
“아영아 이래도 고백할 거야? 미안한데 고백한다고 해도 성공 확률은 높아 보이지 않아.”
“그래도 해야지. 우리가 여기 왜 모였는데.”
“혜진이 넌 빠져. 아영이한테 묻고 있잖아.”
“여기까지 왔으면 충고할 자격은 충분하거든?”
혜진은 흥분한 나머지 따발총처럼 말을 쏘아냈다.
태섭에게 아영의 고백이 실패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마음의 둑으로 막아두었던 감정이 단번에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영아. 고백은 무조건 해야 돼. 성공하면 성공해서 좋은 거고. 실패하면 실패해서 좋은 거야.”
“…….”
“실패하면 준후 말고 다른 애 만나면 되잖아. 너 좋다는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김혜진, 선 넘지 말라니까? 실패할 고백은 상처만 될 수도 있어. 상대의 의도를 알았으면 마음은 혼자서도 충분히 정리할 수 있고.”
“……됐다. 너랑 싸워서 뭘 하냐. 싸우려면 준후 머리끄덩이를 잡아야지.”
할 말은 말았지만 혜진은 전부 가슴 한 켠에 묻어두었다.
아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표정 변화도 전혀 없었다.
얼핏 담담해 보이지만 아영이 크게 동요하고 있음을 혜진은 알았다.
아영은 괜찮은 ‘척’을 할 때.
항상 이런 모습을 보이곤 했다.
“나 빼고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시나?”
양반은 못 된다고 때마침 준후가 벤치로 다가와 아영 옆에 앉았다.
“별일 아니야. 뭐 타고 놀까 이야기 중이었어.”
아영이 준후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 모습에 어쩐지 필사적인 구석이 있어서 혜진은 가슴이 아팠다.
* * *
준후는 튜브를 낀 채 동굴 탐험 어트랙션을 타고 있었다.
동굴 탐험 어트랙션은 동굴처럼 외관을 꾸민 수영장인데.
튜브를 착용하고 좁은 물길을 따라 둥둥 떠다니기만 하면 되는 어트랙션이었다.
어트랙션 자체는 싱거운 편이었지만 꽤 많은 사람이 이용했다.
사람이 반, 물이 반이었다.
“아영아. 표정이 안 좋은데? 피곤해?”
준후가 곁에 있는 아영에게 물었다.
실내 수영장에 들어온 후부터.
아영의 표정에 생기가 없었다.
웃음기가 사라지고 입꼬리가 축 처져 있었다.
“오랜만에 노니까 체력이 안 받쳐주나 봐. 당직 때 가벼운 운동이라도 할까 봐.”
“그럼 다행이고. 참고로 아까 시비 붙었던 건달들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우리를 절대 못 건드릴 테니까.”
“응. 아까는 말 못 했는데 고마워.”
“아니야.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걱정을 끼쳤는데.”
대화는 짧게 끝났다.
아영이 준후보다 조금 더 앞서 나갔으므로 준후는 아영의 뒷모습만 봐야 했다.
-너 아까 사람에게는 누구나 지옥이 있다고 했지?
-…….
-근데 그거 알아? 아영이한테는 네가 지옥이었다.
아까 태섭이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가 떠오르자 준후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틀린 말이 아니라서 더 그랬다.
아영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준후는 줄곧 그 사실을 방치해 왔다.
아영에게 몹쓸 짓을 했다.
사귀든가, 말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칼을 빼 들어야 했는데 준후는 그러지 못했다.
아마도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영에게 잘해줄 수는 없지만.
아영이 계속 자신의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속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섭의 일갈은 또 옳았다.
‘서준후, 그거 알아? 넌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치사한 놈이야’라고 했던 태섭의 일갈 말이다.
준후의 시선은 오랫동안 아영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준후는 아영의 마음도 궁금했다.
준후가 역용술을 써서 조폭들을 혼내주느라 자리를 비웠을 때.
태섭은 준후의 속내를 아영에게 전달했을 것이다.
그때 아영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준후의 방관에 다시 한번 상처받았을까.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무덤덤하게 받아들였을까.
아니, 중요한 건 아영이가 아니야.
중요한 건 내 결단이야.
오락가락하고 갈팡질팡하는 내 마음부터 바로잡아야 해.
그게 우선이야.
준후는 입술을 깨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생각의 물살에 떠밀리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 * *
일행이 서울로 돌아온 것은 오후 7시쯤이었다.
해는 일찍 떨어졌고 바람은 선선했다. 도로는 퇴근하는 차량으로 꽉 막혔는데 동맥 경화라도 걸린 것 같았다.
네 사람은 영등포 인근 호프집에서 저녁 식사 겸 술자리를 가졌다.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고 시끌벅적했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나중에 또 시간 맞춰서 보자. 모처럼 동기들이랑 놀고 나니까 속 시원하네.”
“너희 둘은 같은 방향이지? 조심해서 들어가.”
9시쯤 끝난 술자리.
든든했던 아군 태섭, 혜진과 헤어지고 아영은 준후와 지하철에 올랐다.
지하철에서 준후와 무슨 말을 나눴는지 아영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심하게 취했던 건 아니었고.
그저 대화를 나누면서도 딴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백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던 아영은 준후의 아파트 단지 근처에서 결정을 내렸다.
흐뭇하게 떠오른 달빛 아래.
운치 있게 울려 퍼지는 밤벌레 소리.
가벼운 복장으로 산책 중인 주변 사람들.
평화로운 일상이 살갗에 생생하게 와 닿는 순간이었다.
“준후야. 오늘 시간 내줘서 고마워. 그럼 조심히 들어가고 병원에서 보자.”
아영은 준후에게 고백을 하지 않기로 했다.
평화로운 일상을 지키고자 했다.
자신의 마음만 조금 아프면 일상은 무너져 내리지 않을 테니까.
“가긴 어딜 가?”
준후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당연히 집에 가야지.”
“싫은데 너 집에 들어가는 보고 갈 거야.”
“안 그래도 돼. 내가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니고.”
“여기 주변에 남자들은 다 늑대야. 나만 빼고.”
주변에 지나가는 남자들을 가리키며 준후가 넉살을 떨었다.
아영이 피식 웃었다.
그래. 고백을 안 하는 게 맞아.
이렇게 준후를 계속 가까이서 보고 웃을 수도 있으니까.
아영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준후 네가 그렇게까지 나오면 어쩔 수 없지. 같이 가자.”
“그래, 생각 잘했어.”
준후와 함께 아영은 자신의 집이 있는 빌라촌으로 향했다.
역에서 15분쯤 걷자 길이 한적해졌다. 지나가는 차도 행인도 눈에 띄게 줄었다.
“아영아. 나 할 말 있는데.”
“뭐야? 언제는 내 허락받고 했어?”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아서. 오늘 이야기는 좀 길 것 같거든.”
“괜찮아. 나 듣는 거 좋아해.”
아영이 편하게 대답했다.
“아영아. 사실은 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네가 날 좋아한다는 거.”
준후의 돌직구에 아영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윗니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백의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에도 힘이 잔뜩 들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자신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니 결국 준후가 결단을 내리려고 하는구나.
준후가 어떤 말을 할지 아영은 벌써부터 눈에 훤했다.
학창시절부터 의술과 환자밖에 모르던 준후였다.
의술과 자신 중에 준후는 의술을 택할 게 분명했다.
“……알고 있었구나.”
“미안해. 그동안 모르는 척해서. 아까 태섭이 말을 듣고 깨달았어. 내가 그동안 엄청 이기적으로 굴었다는 거.”
“…….”
“나도 솔직히 무서웠어. 내가 널 상처 입힐까 봐. 좋아한다고 마음만으로 연애가 성립되는 건 아니잖아?”
“…….”
“관계를 이어나가려면 노력이 필요한데…… 나는 그 노력을 할 수 없을 것 같았거든.”
준후가 한숨 쉬며 말을 이었다.
아영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준후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지금 준후의 얼굴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를 것 같았다.
“괜찮아. 나도 각오하고 있었어.”
“뭘 각오해?”
“나한테 신경 쓰는 대신 의술에 집중하고 싶다는 뜻이잖아.”
아영이 선수를 쳤다.
기왕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준후에게 상처를 받느니 차라리 자신의 가슴에 직접 상처를 내고 싶었다.
“난 다 이해해. 준후 널 원망하지도 않을 거고. 원래 사람은 하나를 얻으려면 나머지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법이니까.”
“아니, 그러니까 무슨 소리냐고?”
“난 다 안다니까! 다 안다고!”
북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해 아영은 소리를 질렀다.
억눌렀던 설움이 동시에 터졌다.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앞이 뿌옇게 번졌다.
뿌연 시야에 준후의 다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영아. 고개 들어.”
“싫어. 난 이게 편해.”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나 본데. 나 너한테 고백하는 거야.”
“응?”
뜻밖의 단어에 아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백이라고?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지?
“내가 앞으로 잘할게. 남들만큼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노력할게.”
“…….”
“그러니까 앞으로도 내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준후의 말에 아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달빛을 등져서 그런지 준후의 몸에서 광채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이 순간이 꿈결 같기도 했다.
“너…… 내가 아는 서준후 맞아?”
“그럼 귀신인 줄 알았어?”
준후가 빙긋 웃으며 아영을 살포시 끌어안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동안 내가 너무 비겁해서.”
“너, 나빴다고…… 진짜.”
준후의 품에서 아영은 서럽게 울었다. 7년간 쌓아두었던 눈물에 준후의 셔츠는 마를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