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제32장 팔레트(3)
본가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야산.
새벽 시간이라 하늘이 캄캄했다.
외로운 초승달이 등대처럼 밤을 지키고 있었다.
평소 산책을 즐기는 사람이 많은 곳이었지만 시간이 워낙 일러 사람의 그림자조차 구경할 수 없었다.
준후는 느릿느릿 야산 공터 중턱까지 올랐다.
샛길로 빠져 고등학생 때부터 자주 찾았던 비밀 공터로 이동했다.
쓰으으읍.
후우우우.
준후는 차가운 새벽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가 크게 내쉬었다. 꼭두새벽부터 무공을 수련했다.
서씨세가에 전해지는 청룡권법이었다.
허공을 찌르는 주먹이 매서웠다.
하늘로 치솟는 발차기가 강맹했다.
몸동작은 물 흐르듯 유연했지만 공격 자세와 방어 자세는 절도가 넘쳤다.
청룡권법은 강직함과 유연함.
직선과 곡선의 미를 모두 갖춘 전천후 권법이었다.
한 시간 가까이 무공을 펼치고 나서야 준후는 휴식을 취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모처럼 땀을 잔뜩 흘리고 원 없이 몸을 움직였더니 속이 뻥 뚫렸다.
병원에서는 무공을 수련하는 시간을 갖기 힘들었고 수련할 장소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벤치에 앉아 쉬면서 준후는 가만히 달을 올려다보았다.
초승달 위로 아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제저녁,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아영에게 고백을 했던 것이다.
충동적인, 직관적인 선택이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의사이기 전에 준후도 사람이었다.
사랑하고, 또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 근본적인 본능을 극복하기보다는 이제 그 본능과 더불어 살아가고 싶었다.
의술도, 사랑도 둘 다 챙겨보자.
나라면 할 수 있어.
준후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사람은 천 소저 하나면 족했다.
아영에게도 같은 몹쓸 짓을 할 수 없었다.
그 길로 준후는 달빛의 배웅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었다.
천산환을 복용하고 운기조식을 펼쳤다.
곡간의 곡식처럼 쌓이는 내공이 준후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무림만큼은 아니지만.
준후가 보유한 내공은 꽤 많았다.
0.3갑자 정도는 되었다.
현대에서 0.3갑자의 내공을 운용할 수 있다는 건 준후가 지상 최강의 병기라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운기조식을 마치고 준후는 책상에 앉았다.
탁상 거울을 빤히 쳐다보았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이 눈동자로 몰려들었다. 두 눈동자가 얼핏 호수처럼 파란빛을 띠었다.
준후가 정안(正眼) 수련에 들어갔던 것이다.
게임으로 치면 정안은 디버프 해제 스킬이었다.
동료들과 환자의 멘탈을 관리하는 스킬이었다.
준후가 가진 정념(正念)을 내공으로 형상화해 동료와 환자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으니까.
그딴 능력이 왜 필요해?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리 있는 지적이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지적이기도 했다.
수술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동료들의 역할 또한 중요했다.
동료들이 불안, 초조, 긴장을 느낀다면 그 감정은 자연스레 수술이나 어시스트에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사건과 사고는 환자 회복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준후는 그런 점을 미리 방지하고 싶었다.
만만치 않네.
평소에 수련을 안 하던 무공이라서 그런가?
30분 정도 정안을 수련하고서.
준후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내공을 과하게 운용한 탓일까.
불이라도 난 것처럼 눈동자가 뜨거웠다. 사막처럼 눈동자가 메마른 느낌이었다.
준후는 문득 정안을 전수해 주던 은거기인 강백통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자네는 글러 먹었어. 정안을 터득하기에는 오성이 모자라.
-제 어떤 점이 부족한 겁니까?
준후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오성, 그러니까 재능이 없다는 말은 강백통에게 처음 들어본 준후였다.
내색은 안 했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에게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나?
-제자의 모자란 부분을 깨우쳐주는 것이 스승님의 역할 아닙니까?
-허허허. 이제 와서 내 탓을 하시겠다?
강백통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가자미눈으로 준후를 응시했다.
-탓이 아니라 원인을 여쭤보는 것입니다. 제 아둔한 머리로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정안은 말이야. 보통 무공하고 궤가 달라. 사람에 따라서는 하루 만에 터득할 수도 있지.
-하루요?
준후가 기겁하며 되물었다.
세상천지에 단 하루 만에 터득할 수 있는 무공이 존재할 수 있나 싶었던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나도 반나절 만에 익혔는걸?
-그럼 그 반나절 만에 익힌 비법을 알려주십시오. 저는 강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원수 적일도에게 복수할 수 있습니다.
-네 눈빛에 화(火)가 가득하구나. 마음을 가라앉히거라. 흔들리는 마음으로는 중심을 잡을 수 없어.
준후를 바라보는 강백통의 눈동자가 파란빛을 띠었다.
강백통의 푸른 눈을 마주한 순간.
준후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적일도를 향했던 맹렬한 살심(殺心)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던 것이다.
이것이 정안의 위력인 듯싶었다.
설마하니 원수를 향한 적개심마저 사르르 녹여 버릴 줄이야.
-대단하십니다, 스승님.
-엣헴. 당연한 소리 들어봐야 별로 기쁘지도 않아.
-지금 활짝 웃고 계십니다만…….
-내가? 네 눈깔이 잘못된 거겠지.
강백통이 헛기침하며 말을 계속했다.
-그렇게 통사정을 하니 작은 단서라도 주마. 내가 봤을 때 말이야. 너는 솔직하지를 못해.
-저는 강해지고 싶고 복수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더 솔직할 것이 있습니까?
-그런 솔직함을 말하는 게 아니란다. 너는 네 욕망에는 솔직할지 몰라도 네 감정에는 솔직하지 않아.
-…….
-정안에 담아야 할 정념은 단순히 올바른 생각이 아니야. 네 진심까지 담긴 생각이어야 하지.
-…….
-내가 방금 너를 진정시켰을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 같으냐?
-제가 미혹을 바로잡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길 바라셨을 겁니다.
준후는 나름 모범답안을 내놨지만 강백통의 표정은 여전히 못마땅하기만 했다.
대답 대신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쯧쯧쯧. 정안 수련은 포기하는 걸로 하자꾸나.
그날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준후도 그날 이후로 정안을 수련하지 않았다.
회상을 마치고 준후는 거울 속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준후는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 * *
오전 5시.
무척 이른 시각이었지만 준후는 식탁에서 부모님과 아침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준후가 일찍 출근하고.
아버지도 택배 일 때문에 새벽 출근을 하기 때문이었다.
모처럼 맛보는 집밥은 꿀맛이었다.
밑반찬만 네 가지였고, 돼지고기가 잔뜩 들어간 얼큰한 김치찌개는 연신 밥공기를 불렀다.
병원에서 끼니를 때우기 바빴던 것과 달리.
준후는 아침부터 밥 2공기 반을 비웠다.
“준후야, 천천히 먹어. 그러다가 체할라.”
“도저히 멈출 수가 없는데요?”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고 준후는 머쓱하게 웃으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병원 밥이 확실히 별로긴 한 모양이구나. 이렇게 허겁지겁 먹는 걸 보면.”
“병원 밥이 별로인 것도 있지만 어머니 요리 솜씨가 워낙 좋아서 그런 것도 있죠.”
“우리 아들, 말도 예쁘게 하는 거 봐.”
준후의 넉살에 어머니 입가에 웃음꽃이 피었다.
“두 분 다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죠?”
“없단다. 영양제도 잘 챙겨 먹고 건강 검진도 꾸준히 받고 있잖니.”
“아빠도 딱히 아픈 데 없단다.”
단순히 준후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준후는 그제야 한 시름을 덜었다.
인턴 생활과 레지던트 생활을 하면서 준후는 아무래도 집안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병원에 있었고.
쉬는 날이라고 해도 일정이 있으면 집에 못 들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부모님께 꼭 연락을 드리고 있긴 했지만 그것도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아 참. 저 아영이랑 사귀기로 했어요. 어제부터요.”
“정말? 잘 됐구나! 아영이라면 안심이지.”
“허허. 이제 우리 아들도 남자 구실 좀 하겠는걸?”
어머니와 아버지가 준후의 교제를 축하해 주었다.
준후가 아영의 이야기를 간간이 했었고, 아영이 집에도 놀러 온 적이 있어서 부모님도 아영을 알고 있었다.
특히 어머니가 아영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서 준후에게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아영을 며느리 삼았으면 좋겠다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연애 좀 하다가 확 결혼해 버리렴.”
“벌써 결혼 이야기를 하세요?”
준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7년이나 알고 지냈는데 서로 간 볼 필요 없잖니? 내 사람이다 싶으면 빨리 결혼하는 것도 답이야.”
“거, 준후 부담스러워서 체하겠어. 벌써부터 김칫국이나 마시기는…….”
“당신이 그런 말 할 자격이나 있어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 살벌한 눈빛에 국을 마시던 아버지가 콜록콜록 헛기침을 했다.
준후가 모르는 무언가가 부모님 사이에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여유가 될 때 들어보면 좋으리라.
부모님이 정겹게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단란한 아침 식사가 끝났다.
준후는 씻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 후 아파트 단지를 나섰다.
* * *
계절은 바야흐로 가을.
그중에서도 9월 초였다. 아침 바람이 퍽 선선했다.
출근하는 준후는 평소와 달리 백팩을 메고 있었다.
백팩 안에는 피아니스트 명한의 각성 수술을 위한 필살기가 담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각성 수술이 성큼 내일로 다가왔다.
이번 수술만큼은 준후도 꽤 부담이 됐다.
무려 과장이 예의주시하고 있는 수술이었으니까.
각성 수술의 실패를 과장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수술의 난이도를 떠나서 말이다.
과장은 원래 그런 인간이었다.
열심히 준비한 만큼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지하철역 근처 번화가에 도착한 준후는 가까운 빵집을 찾았다.
빵을 구입한 후 1번 출구 앞을 서성거렸다.
10분쯤 지났을까.
이쪽으로 오는 아영을 발견하고 준후는 손을 흔들었다.
하루 만에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 관계가 발전한 탓일까.
아영을 똑바로 마주하는 게 어쩐지 쑥스러운 준후였다.
살갗이 간질간질거리는 기분이 드는 준후였다.
“좋은 아침.”
“응. 준후 너도 좋은 아침. 오늘도 일찍 왔네?”
“뭐, 습관이니까. 이거 받아.”
준후는 아영에게 빵이 담긴 봉지를 내밀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아영은 빵순이였다. 아침 식사는 대부분 빵으로 해결했다.
“와. 서비스 좋은데?”
“고작 이 정도로? 내가 앞으로 너한테 해줄 게 얼마나 많은데.”
“뭔가 아직도 꿈같아. 준후 너랑 네가…….”
아영이 부끄러워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아영의 두 뺨은 어느새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 물들어 있었다.
“아 참. 아영아 우리 사진 찍을까?”
“갑자기 웬 사진?”
“연애를 시작했으면 연애 시작한 티를 내야지. 이쪽으로 와 봐.”
준후는 아영과 다정하게 서서 휴대폰으로 셀카 한 장을 찍었다.
그리고 사진을 메신저 프로필 사진으로 올렸다.
그 과정을 지켜보던 아영은 퍽 놀란 눈치였다.
“이래도 돼?”
“뭐가?”
“연애하는 거 밝히면 주변에서 안 좋은 소리 들을 수도 있잖아. 레지던트 주제에 연애할 시간이 있냐고 시비 걸 수도 있고.”
“우리 병동에선 나한테 그런 소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준후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
기왕 연애를 시작했으면 남들 앞에서 떳떳하고 싶다고.
아영을 숨기고 싶지 않다고.
“너 의외로 과감한 구석이 있다? 계속 숨길 줄 알았는데.”
“왜? 싫어? 부담스러우면 하지 말까?”
“아니? 그래서 오히려 좋다고.”
아영이 빙긋 웃었다.
아영 역시 준후와 찍은 사진을 메신저 프로필로 설정했다.
아영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준후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우물우물 빵을 먹으며 이야기하는 아영이 준후는 못내 사랑스러웠다.
어제 고백을 한 것은 과연 두고두고 잘한 일이었다.
“이따 연락할게. 오늘 하루도 파이팅.”
“나도. 사랑해.”
“으…… 닭살.”
준후의 사랑 고백에 진저리치는 아영과 헤어진 후.
준후는 신경외과 병동을 찾았다.
고작 하루를 쉬었을 뿐인데.
병동의 풍경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간호사들이 근무 중인 스테이션.
복도를 따라 늘어선 병동들.
얼핏 보이는 환자들과 보호자들 등등.
숙직실에서 환복을 하고 준후는 당직실로 이동했다.
오늘은 웬일인지.
당직 근무자인 경수와 2년 차 민경, 3년 차 시호가 한 자리에 있었다.
준후를 향한 세 사람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뭐야? 서준후 너 연애 시작했냐? 오늘부터 1일은 뭐냐? 느끼하게?”
“아영이면 인정이지. 근데 솔직히 아영이가 아깝다. 준후는 연애 상대로는 영 빵점인데.”
경수와 민경이 호들갑을 떠는 가운데.
시호는 묵묵하게 본인의 휴대폰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준후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뚫어져라 살피는 것 같았다.
이윽고 시호가 고개를 들어 준우를 응시했다.
“여자친구 예쁘네. 둘이 잘 어울린다.”
말투는 무난했지만 시호의 눈가와 입가에는 무언가 섬뜩한 기색이 숨어 있었다.
시호의 관심만큼은 어쩐지 달갑지 않은 준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