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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174화 (174/424)

174화

제32장 팔레트(4)

신경외과 오전 컨퍼런스 룸이 시작되었다.

진행은 평소와 같이 치프가 맡았다.

치프는 빔 프로젝트와 연결된 모니터로 각종 문서와 차트들을 띄우며 회의를 진행했다.

레지던트들은 피곤에 찌든 눈빛으로 자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3분의 1은 졸린 닭처럼 고개를 꾸벅거렸다.

생기가 없는 건 교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교수가 한 하품이 전염병처럼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수술이 있는 날에는 수술을 하고.

수술이 없는 날에는 외래 진료와 연구 및 논문 준비로 바쁜 일과를 보내는 교수들이었다.

-교수가 되면 정년이 보장되고 편하다.

……라는 말은 신경외과에서 결코 통용되지 않았다.

신경외과가 전쟁터인데.

전쟁터에서 쉽고 편안하고 안전한 곳이 어디 있을까.

하루하루를 버티듯이 살아가는 스태프들을 훑어보며 준후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어제도 오늘과 같고.

오늘도 내일과 같으리라는 생각에 서글퍼지기도 했다.

어쩌면 스승 재현의 급진적인 주장이 옳은 건지도 모른다.

환자를 살리는 일보다 의료 시스템을 개혁하는 일이 더 급선무라고 했던 주장 말이다.

이대로라면 먼 훗날 외과는 공룡처럼 멸종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 다들 정신 좀 차립시다.”

수술 환자 스케줄 정리가 막 끝났을 때, 과장이 박수를 치며 주의를 끌었다.

“아침부터 이렇게 쳐져서야 되겠어요? 오늘도 파이팅해야지.”

“네. 과장님.”

“네. 과장님.”

과장의 억지스러운 응원에 몇몇 레지던트들이 영혼 없이 대답했다.

“아, 참 신 교수.”

“네. 말씀하십시오.”

“각성 수술 준비는 잘 되고 있죠?”

과장이 눈을 빛내며 뇌종양 전문의 동훈을 바라보았다.

“별 탈 없이 진행 중입니다. 절제 범위도 정해놓았고 내일 수술만 남았습니다.”

“내가 기사 좀 깔아놨거든요?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 보면 대여섯 개 정도 나올 겁니다.”

과장의 말에 준후는 휴대폰으로 번개같이 피아니스트 명한의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피아니스트 유명한, 신원대 신경외과에서 각성 수술받아. 각성 수술이란 무엇인가.]

[세계 탑 피아니스트. 신원대 신경외과에서 고난이도 각성 수술 시행.]

과연 며칠 전만 해도 찾아볼 수 없었던 기사들이 눈에 띄었다.

이게 다 과장의 솜씨라니…….

과장의 언론 플레이와 쇼맨십 능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문제는 이런 기사들이 수술 스태프들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그렇군요. 고생하셨습니다.”

동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뭐, 고생이야 내가 아니라 신 교수가 하는 건데 이쯤이야. 어쨌거나 날 실망시키지는 말아요. 이번 수술은 특히 보는 눈이 많으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걸로는 안 되고 꼭 성공시켜요.”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성공률 100퍼센트의 수술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허, 이제 와서 약한 소리 하면 쓰나. 내가 이런 소리 들으려고 신 교수를 데려온 줄 알아요?”

과장의 목소리가 앙칼졌다.

과장이 동훈을 쥐 잡듯이 잡자 컨퍼런스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럼 꼭 성공시키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그렇고말고.”

확답을 듣고서야 활짝 웃는 과장이 준후는 얄미웠다.

본인도 집도를 하면서 어쩜 교수한테 저렇게 무리한 요구를 한단 말인가.

참고로 과장의 전공은 성인 뇌혈관 쪽이었다.

잠시 후 우중충한 분위기 속에.

오전 컨퍼런스가 끝나고 회진마저 끝났다. 스태프들은 각자의 스케줄에 따라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서준후. 어딜 도망가! 아영이랑 펼친 로맨스를 들려줘야지.”

민경이 숙직실 쪽으로 이동하려는 준후를 붙잡았다.

“나중에 들려드릴게요. 저 바빠요.”

“회진도 막 끝났는데 바쁠 게 뭐 있어? 설마 아영이랑 사랑의 문자라도 주고받게?”

민경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음흉하게 물었다.

“네.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달달하구만. 내가 이번은 특별히 봐준다.”

“제발 좀 그래 주세요.”

민경과 대화를 마치고 준후는 숙직실로 뛰어갔다. 락커룸에 넣어둔 백팩을 챙겨 병동 복도를 가로 질렀다.

각성 수술의 집도의 동훈과 긴히 할 말이 있었다.

* * *

“교수님. 외래 내려가시는 길이죠?”

“그런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동훈은 가운을 휘날리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준후를 바라보았다.

고개도 갸웃거렸다.

준후가 서두르는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다.

“혹시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려무나.”

동훈은 가까운 창가 쪽으로 이동했다.

창가에서 흘러드는 햇살에 동훈의 왼쪽 얼굴이 따스해졌다. 문득 내려다본 아침의 병원 풍경은 고즈넉했다.

“아침부터 뭐가 그렇게 바쁘니? 누구 보면 응급 수술이라도 잡힌 줄 알겠다.”

동훈이 마주 선 준후를 응시하며 물었다.

“명한 환자, 각성 수술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그래? 저번에 브레인 매핑도 했겠다. 딱히 덧붙일 건 없을 텐데?”

“사실 제가 어제 박재현 교수님의 각성 수술을 참관하고 왔습니다.”

“허…… 대단한 열정이구나.”

동훈이 감탄하며 혀를 찼다.

레지던트에게 오프는 황금과도 같은 날이었다.

일 분 일 초가 소중한 그 시간에 다른 병원 신경외과에서 수술을 참관했다니…….

보통의 레지던트라면 상상조차 못 할 발상이었다.

“거기서 뭔가 보고 온 게 있는 모양이구나.”

“네. 그렇습니다. 박재현 교수님은 종양의 절제 범위를 결정하는 것만큼 환자를 안정시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거야 그렇지.”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환자를 수술 중에 깨운 후 환자가 연주한 피아노곡을 트는 건 어떨까요?”

준후의 설명이 이어졌다.

재현이 집도한 각성 수술은 환자가 야구 선수였는데.

재현이 해당 프로팀의 응원가를 틀어 환자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고 전했다.

“으음…… 그런 생각은 못 해봤는데…….”

동훈은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역시 국내 최고이자 국내 최초의 트리플 전공(뇌, 척추, 정위신경) 신경외과의라서 그럴까.

재현은 각성 수술도 남달랐다.

“환자 안정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우리한테는 불편하지 않겠니? 정신이 사나울 것 같은데 말이야.”

“…….”

“특히 난 조용한 수술 환경을 좋아한단 말이지.”

“시끄러운 응원가도 아니고 잔잔한 피아노 연주곡이면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

“일단 환자만 안정되면 연주곡을 꺼도 될 거고요.”

“듣다 보니 괜찮은 생각 같구나. 그렇게 진행하자꾸나.”

동훈이 선뜻 고개를 끄덕이고 한 손으로 준후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레지던트 1년 차임에도.

교수인 자신을 찾아와 할 말을 다하는 준후의 배짱이 마음에 들었다.

수술의 완성도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는 준후의 자세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교수님. 한 가지 더 제안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응? 또?”

“네.”

준후가 손에 쥐고 있던 백팩을 들어 올렸다.

안 그래도 동훈은 아까부터 저 백팩의 정체가 궁금했다.

쉬는 날이었다고 선물을 사 왔을 것 같지는 않은데…….

저 백팩 안에는 대체 무엇이 들었을까.

“이것도 수술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사 왔습니다.”

준후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포터블 전자 건반이었다.

쉽게 표현하면 휴대 가능한 소형 피아노라고 해야 할까.

새 제품이라서 그런지.

하얀 건반과 까만 건반은 깨끗하고 반질반질 윤이 났다.

“이건 대체 왜 샀니?”

“환자를 수술 중에 깨우고 신경 자극술을 할 때 전자 건반을 사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냥 손만 움직여 봐도 될 텐데?”

“그래도 환자가 직접 건반을 연주를 해보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

“환자가 건반을 연주해 보면 청각과 관련된 신경이라든가, 또는 연주에 필요한 감정에 관련된 신경까지 보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준후의 똑 부러진 대답에 동훈은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뭐랄까.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기분이랄까.

준후가 환자를 이리도 세심하고 꼼꼼하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피아노 연주곡을 트는 일이야 그러려니 하겠거늘.

설마 전자 건반까지 구입해 올 줄이야.

준후의 행동에 동훈은 오히려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자신이야말로 수술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서.

“그래. 네 말이 옳다. 연주는 손가락만으로 하는 게 아니지.”

동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확실히 건반을 연주 중인 환자에게 신경 자극술을 펼친다면 말이다. 연주에 관련된 종합적인 신경을 보존할 수 있을 것 같구나.”

“…….”

“피아노 연주곡도 틀고 건반도 사용하자꾸나. 대신.”

“대신이라면…….”

“수술방에 전자 건반을 반입하기 전에 꼼꼼히 소독하거라. 그 역할은 네게 맡기마.”

“물론입니다.”

준후가 경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다소 주제넘고 건방진 이야기를 했는데 너그럽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녀석, 예의도 바르기는. 사실 내가 너한테 고마워서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기분이란다.”

동훈이 껄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준후 네 덕분에 수술의 완성도가 한층 올라갈 것 같구나. 수술 끝나면 과장님께 큰소리쳐도 되겠어.”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변경 사항은 내가 찬영이에게 미리 일러둘 테니 너는 두 번 말할 필요 없어. 고생했고 그만 가보 거라.”

“네. 교수님. 수고하십시오.”

동훈은 멀어지는 준후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준후를 곁에서 지켜볼수록 감탄만 나오는 동훈이었다.

저게 어딜 봐서 레지던트 1년 차란 말인가.

환자를 대하는 자세와 태도.

완벽한 수술을 위한 집념 등등.

조금 과장해서 준후는 벌써 완성된 명의의 반열에 오른 것만 같았다.

하긴 이러니까 제자를 두지 않겠다고 공언한 재현이 준후를 몰래 제자로 삼았으리라.

아쉽구나.

아쉬워.

부임이 조금만 빨랐어도 준후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마음 같아서야 당장에라도 준후를 재현과 떼어놓고 싶었지만 동훈은 날뛰는 욕심을 가까스로 제어했다.

그것은 재현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준후가 앞으로 더 활약한다면 지금 이 마음조차 지켜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신 교수님. 각성 수술 때문에 어깨가 무거우시겠습니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곽민석이 서 있었다.

민석은 성인 및 소아 뇌혈관 질환을 전공하는 조 교수였다.

과장의 왼팔쯤으로 동훈이 굴러온 돌이라면 민석은 박힌 돌쯤 되었다.

“우리 과장님이 성과에 좀 예민한 편이어야죠.”

“생판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러려니 하렵니다.”

“그게 잘 되겠습니까? 과장님 닦달을 만만하게 봤다간 큰코다칠 걸요?”

“어째 제가 큰코다치길 바라는 늬앙스입니다만?”

“아휴. 절 뭘로 보시고. 저 말입니다. 다른 교수님의 불행을 기뻐할 만큼 막돼먹은 사람 아닙니다.”

민석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속내를 모를 리 없는 동훈이었다.

민석은 동훈의 파멸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내년에 민석이 동훈을 제치고 부교수에 임명될 수 있을 테니까.

두 사람은 뼈가 있는 말로 팽팽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는 총만 들고 있지 않았지, 전쟁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곽 교수님도 외래 내려가는 시간이 좀 늦으셨습니다?”

“저요? 과장님이 따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요. 잠깐 불려갔습니다.”

“혹시 무슨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하하하. 그건…… 일급 기밀이라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민석이 농담조로 에둘러 거절 의사를 밝혔다.

여우 같은 놈.

각성 수술만 성공해 봐.

지금처럼 실실거릴 순 없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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