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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175화 (175/424)

175화

제32장 팔레트(5)

흉부외과 당직실.

“흥- 흐음- 흐흠~”

아영은 콧노래를 부르며 입·퇴원 기록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방금 막 중환자실 라운딩을 다녀온 참이었지만 아영은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사랑보다 더 강력한 진통제가 있을까?

준후만 생각하면.

준후와 연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아영의 몸과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드르르륵.

당직실 문이 열리고 2년 차 준식이 나타났다.

“오늘은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럴 일이 있으니까요.”

“치사하게 뭔지는 말 안 해줄 거야? 사람 궁금하게 만들고 입 싹 닿으면 안 되지.”

“저…… 준후랑 사귀기로 했어요.”

아영이 쑥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교제 사실을 밝히는 일이 다소 유치하게 느껴졌다.

중·고등학생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 어, 잘됐네. 축하한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

말과 달리 준식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준식이 과거 준후에게 몇 번 당한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점심시간인데 내려가 봐. 오늘은 식당 밥 먹어.”

“그럼 당직실 비는데요?”

“내가 지키고 있을 게. 요새 속도 안 좋다면서? 빵이랑 라면 같은 것만 먹으면 위에 탈 난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괜찮아. 괜찮아. 나도 시간이 있어서 이러는 거야.”

준식의 강권에 아영은 피식 웃으며 당직실을 빠져나왔다.

흉부외과를 나가겠다.

대신 신경외과로 전과하겠다.

준후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괴롭히던 준식에게 이렇게 선언했던 이후.

준식은 지금까지도 아영에게 꼼짝을 못했다.

아영만큼 싹싹하고 일 잘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흉부외과 레지던트 지원자는 아영 한 명뿐이었으니까.

지이이잉.

복도를 가로지르는데 때마침 전화가 울렸다.

의외로 스테이션 콜이 아니었다.

친구의 전화였다.

-야, 이아영! 메신저 프로필 사진 무슨 일인데? 이런 소식 있으면 언니한테 빨리빨리 보고 했어야지?

혜진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따발총처럼 말했다.

“미안. 보고가 늦었네. 뭐랄까, 현실감이 잘 안 느껴져서.”

-준후랑 사귀기로 한 거야?

“응. 맞아.”

-대박 사건! 사실 난 네가 고백을 안 할 줄 알았어. 준후랑 그냥 친구로 남을 줄 알았는데.

“나 고백 안 한 거 맞아.”

-엥? 고백도 안 했는데 어떻게 사귀어?

“고백은 준후가 했어.”

준후가 고백하던 당시를 떠올리며 아영은 흐뭇하게 웃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건 기적이었다.

자신에게 1도 관심 없어 보이던 준후가 먼저 고백을 하다니…….

-완전 서프라이즈네. 이래서 사람은 오래 살고 봐야 하나 보다.

“그러게. 프로필 사진도 준후가 올리자고 했어. 비밀 연애는 하기 싫다고.”

-어쨌든 축하해. 앓던 사랑니가 쏙 빠진 기분이다. 이제 두 다리 뻗고 자겠어.

“고마워 혜진아. 다 너랑 태섭이 덕분이지, 뭐.”

-알면 오프 때 한 턱 쏴라.

“한 턱이 뭐야 네 턱은 쏴야지. 네가 좋아하는 소고기 먹으러 가자.”

혜진과 재잘재잘 통화를 나누며 도착한 지상 1층 식당.

아영은 통화를 끊고 점심 식사를 했다.

식판에 담긴 식당 밥은 맛있었다.

병원 밥은 끔찍하기로 소문이 자자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환자식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아영은 흉부외과 병동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스테이션을 지나 복도를 통과하는 도중.

맞은편에서 낯선 얼굴을 마주했다.

청년은 아영보다 키가 아주 조금 더 컸다.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눈매가 쳐져 선한 인상을 풍겼다.

“아영 씨 맞죠? 반가워요.”

청년이 씽긋 웃으며 아영에게 악수를 청했다.

청년의 뜻밖의 행동에 아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신지…….”

“아.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신경외과 3년 차 최시호라고 해요. 준후 선배예요.”

“안녕하세요. 이아영입니다.”

시호의 통성명을 듣고 아영은 시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시호의 손은 차갑고 단단했다.

“평소 준후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오늘부로 준후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면서요?”

“아. 네.”

아영이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게 바로 공개 연애의 부작용인 것 같았다.

어디를 가나 준후와의 교제 이야기부터 나오니 원…….

앞으로 한 달 정도는 똑같은 말을 수십 번 반복해야 할 것 같았다.

“보아하니 아영 씨도 준후처럼 선하고 성실해 보이네요.”

“안 그래도 그런 이야기 자주 들어요.”

“말솜씨도 있으시네. 만나서 반가웠고 앞으로 얼굴 보면 종종 아는 체하죠.”

“그럼요. 앞으로도 준후 잘 부탁드릴게요.”

“저야말로 준후 잘 부탁드려요.”

시호가 붙잡고 있던 아영의 손을 놓고 저만치 멀어져갔다.

아영은 그런 시호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잠깐 한 마디 섞은 것뿐이지만.

시호는 퍽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다.

웃는 모습이 자연스럽고 대화도 부드럽고 친근하게 잘 이끌어갔다.

시호라면 분명 준후에게 힘이 되어줄 듯했다.

드르르륵.

아영은 당직실로 복귀해 차트 작성 중인 준식의 곁에 앉았다.

“선배도 식사하셔야죠.”

“안 그래도 방금 먹었어.”

“또 라면 드셨어요? 선배도 저랑 교대로 식당에서 식사하시지.”

당직실에 떠도는 라면 냄새를 맡은 아영이 말했다.

“난 속이 튼튼해서 상관없어.”

“근데 선배, 혹시 신경외과 컨설팅(협진) 내셨어요?”

“신경외과는 갑자기 왜?”

“신경외과 3년 차가 우리 병동에 왔길래요.”

타과 레지던트가 흉부외과 병동을 찾는 일은 빈번했다. 심장·폐 질환 환자라고 해서 심장·폐만 안 좋은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난 신경외과 컨설팅 낸 적 없는데? 아마 다른 사람도 없을걸?”

“컨설팅도 없는데 그럼 왜 우리 병동에……?”

방금 마주쳤던 시호를 떠올리며 아영은 생각에 잠겼다.

설마 날 보러 온 건가?

* * *

응급실 E구역.

이 구역은 KTAS(Korean Triage and Acuity Scale, 한국형 응급환자 분류 도구)에서 5등급으로 분류된 환자가 모여 있는 구역이었다.

참고로 5등급이란 환자의 증세가 가장 경증인 단계였다.

준후는 E구역의 한 침상 앞에 서 있었다.

곤란하다는 듯 이마에 손을 얹은 채, 눈앞의 환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 아! 공습경보! 공습경보!”

환자가 발작하듯 외치며 몸을 뒤흔들었다.

수액줄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경찰력 총동원. 서울 경찰청장 어디 갔어? 청장, 서울 청장.”

“환자분 계속 이러셨나요?”

“네. 구급차에 실려 온 이후로 계속이요.”

준후 곁에 서 있던 간호사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진료도 제대로 못 했겠네요?”

“그럼요. 응급실 선생님도 혀를 내두르시던데. 만취해서 아예 대화가 안 돼요. 정맥 라인도 간신히 잡았어요.”

간호사의 노티에 준후는 쓰게 웃었다.

환자는 60세 남성으로 만취한 취객이었다.

술을 얼마나 퍼마셨는지.

근처에만 가도 알콜 냄새가 진동했다.

그렇다고 환자를 내버려 둘 수도 없는 게 환자의 좌측 관자놀이에 열상(찢어진 상처)이 있었다.

술 마시고 넘어져서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친 듯했다.

그래서 두부 외상으로 인한 뇌출혈, 뇌진탕 등의 소견을 배제할 수 없었다.

“참전 용사라고 보기에는 조금 젊으신 것 같은데. 혹시 군인이셨나?”

준후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공습경보를 외치는 것을 보아하니 그쪽과 관련된 업무를 보며 트라우마가 생긴 듯했다.

“아니요. 군인하고 경찰 쪽은 전혀 상관없는 분이에요.”

“선생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전에도 술 먹고 실려 온 적 있거든요. 그때는 비교적 정신이 멀쩡했었어요.”

“그럼 그냥 진상이네요?”

“네. 진상에도 VIP가 있다면 완전 VIP죠.”

“아! 아! 공습경보~ 공습경보~”

환자가 다시 공습경보를 외치며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환자가 팔다리를 버둥거리면서 침상이 흔들거렸다.

한편 주변에 있던 환자와 보호자들은 이쪽을 향해 불안한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이분 수쳐(봉합) 못할 것 같은데. 억제대부터 가져올까요?”

“아니요. 필요 없습니다. 일단 수쳐 세트만 가져다주세요.”

“그러다가 선생님을 치기라도 하면요?”

“그럴 일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준후는 간호사를 안심시킨 후 스테이션으로 보냈다.

그리고 환자에게 다가가 환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준후의 눈동자에 내공이 담기면서 눈동자가 파란 호수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날뛰는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잡념을 버리고 천천히 호흡에 집중하세요.

내면의 고요함을 들여다보세요.

정념(正念)을 눈동자에 담아.

준후는 환자와 오랫동안 눈을 마주쳤다. 최근 수련 중인 정안(正眼)을 펼쳤던 것이다.

터득을 할 수만 있다면.

약물이나 주사제보다 더 빠르고 강력하게 환자를 진정시킬 수 있는 동술이 정안이었다.

“…….”

정안을 받아낸 환자가 일순간 난동을 멈췄다.

귀신에 홀린 듯이 준후를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성공한 건가?

준후가 자축의 샴페인을 터뜨리려던 그 찰나.

환자가 한 마디 툭 내뱉었다.

“네가 경찰청장이냐?”

“아…….”

준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정안을 터득하는 길을 아직 멀고도 험했다.

정안에 성공했다면 제아무리 취객이라도 잠든 아이처럼 얌전했을 것이다.

“네가 경찰청장이냐고?”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준후는 주변을 살핀 후 왼손으로 환자의 머리를 가볍게 받쳤다.

그리고 붕 뜬 환자의 목 뒤쪽을 수도로 쳤다.

턱!

풍부혈에 충격이 가해지면서 환자는 순식간에 의식을 잃었다.

난리를 치던 몸이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그제야 환자와의 끔찍했던 실랑이가 마무리되었다.

부디 공습경보가 없는 꿈속에서 편히 쉬기를.

준후는 의식을 잃은 환자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내공 뇌혈관 조영술을 펼쳤다.

사전에 촬영한 엑스레이상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엑스레이만으로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내공 뇌혈관 조영술도 익숙해졌던 터라.

준후는 1분 만에 검사를 마쳤다.

본래 뇌혈관 조영술은 검사 준비부터 결과가 나오기까지 무려 1시간이 걸리는데.

준후의 손에서는 1분 만에 끝나 버렸다.

다행히 환자의 머리는 멀쩡했다.

뇌혈관이 터지지도.

뇌막이 찢어지지도.

뇌척수액이 과다하게 정체되지도 않았다.

“어머? 환자분이 그새 잠들었네요?”

침상으로 복귀한 간호사가 쥐죽은 듯 누운 환자를 발견하고 놀란 부엉이 눈을 했다.

“공습경보를 알리느라 많이 피곤하셨던 모양이에요.”

“그러게요.”

준후의 농담에 간호사가 키득키득 웃었다.

“혹시나 몰라서 억제대도 가져왔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네요.”

간호사의 말에 준후는 드레싱 카트에 놓인 억제대를 내려다보았다.

억제대는 일종의 단단한 끈이었다.

환자가 난동을 피우면 환자의 팔다리를 침상에 묶어 놓는 용도였다.

의료진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대부분의 보호자들은 억제대 사용을 극도로 싫어했다.

너희들이 뭔데 우리 남편, 아버지를 침대에 묶어 놓느냐.

인권 침해 아니냐.

너희 가족이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야만적으로 묶어 놓을 거냐 등등.

하지만 보호자들은 알아야 했다.

억제대를 사용하지 않으면 환자가 수액줄을 스스로 뽑거나 의료진에게 폭행을 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다만 준후의 경우 억제대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무림의 삶을 경험한 덕분에.

진상 환자들을 손쉽게 기절시킬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수쳐 시작할게요.”

준후는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수술용 장갑을 착용하고 환자의 열상을 꿰맸다.

단순 단속 봉합.

한 땀 한 땀 매듭을 짓는 가장 기초적인 봉합술을 펼쳤다.

현란한 손짓에 탄생하는 매듭들.

매듭 위 남은 봉합사를 자르는 찰칵찰칵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소리.

총 10바늘이 눈 깜짝할 사이에 꿰매졌다.

매듭 간의 간격이 자로 잰 듯 일정했다.

매듭은 한 치의 삐뚤어짐 없이 수평을 이루었다.

“와, 선생님. 누가 보면 성형외과 전공인 줄 알겠네. 봉합 솜씨가 대단하신데요?”

“대단하기는 선생님이 더 대단하죠.”

“제가요?”

“그럼요. 하루에도 이런 환자를 수십 명씩 보시잖아요. 선생님이야말로 살아 있는 부처님입니다.”

“저 기독교인인데요?”

“어…… 그럼 뭐라고 해야 하죠?”

“무슨 뜻인지 아니까 됐어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치료가 끝났다.

지이이잉.

그런데 응급실을 벗어나기 무섭게 콜폰이 울렸다.

번호를 보니 신경외과 스테이션 콜이었다.

-선생님, 여기 병동인데요.

“네. 말씀하세요.”

-내일 각성 수술 있는 피아니스트 환자 있잖아요. 지금 흉통하고 호흡 곤란을 호소하셔서요. 빨리 올라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당장 올라가겠습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하필이면 이 시점에…….

준후는 보법까지 밟아가며 병동으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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