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177화 (177/424)

177화

제33장 포물선(2)

벅. 벅. 벅.

소독용 싱크대에서 준후는 스크럽을(수술 전 소독) 하고 있었다.

질감이 억센 소독용 솔이 손가락이며, 팔이며, 팔뚝 등을 힘차게 문지르고 지나갔다.

그 탓에 습진까지 생겼지만.

솔질을 하는 준후의 손길은 여전히 거칠었다.

감염을 주의하는 일은 언제 얼마나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스크럽을 하는 동안.

준후는 오늘 각성 수술 과정을 되새김질했다.

오늘 기상해서부터 대략 서른 번 가까이 한 작업이었다.

물론 지루하고 따분한 일이었다.

반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준후는 반복과 숙달의 미덕을 무림에서 배워왔다.

몸과 뼈에 새긴 무언가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스크럽하는 표정 한번 살벌하네. 누가 보면 의사가 아니라 킬러인 줄 알겠는걸?”

익살맞은 목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갱의실 쪽에서 시호가 다가오고 있었다.

준후와는 정반대로 수술을 다 끝내고 나오는 길인 듯했다.

시호의 등장에 준후는 살짝 긴장했다.

최근 분원에서 복귀한 3년 차.

복귀 직전 수술에서 환자가 사망하고 직후 수술에선 응급 척추 질환 환자의 허리를 완전히 갈아버릴 뻔한 선배.

준후는 시호에게서 위험한 냄새를 맡았다.

“따지고 보면 킬러하고 의사도 종이 한 끗 차이죠. 실력이 없거나 돈밖에 모르거나 아니면 환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데서 쾌락을 느끼는 의사들은 킬러라고 봐야죠.”

“그럴 수도 있겠네.”

“선배는 의사와 킬러 중 어느 쪽이세요?”

“그거 엄청 실례되는 질문 아닌가?”

“죄송합니다. 농담이 과했나 보네요.”

준후는 순순히 사과했다.

은근히 떠봤는데 먹히지 않았다.

“지금 각성 수술 준비 중이지?”

“네.”

“어깨가 무겁겠다. 과장님도 참관한다고 하시던데.”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그러려니 해야죠.”

“혹시 운세 좋아해?”

“갑자기 운세를요? 전 그런 거 안 믿습니다.”

“나도 안 믿어. 그냥 재미로 보자는 거지. 재미로.”

시호가 준후의 생년월일을 물어본 후 휴대폰으로 준후의 띠별 운세를 확인했다.

그러더니 준후의 등 뒤로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당장 눈앞의 현실로 고통받을 수 있다, 라고 하네?”

“…….”

“준후 네게 어떤 환상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환상 같은 거 없습니다. 저는 그저 외과의로서 환자의 건강과 보호자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을 뿐이니까요.”

“어쩌면 그게 환상일 수도 있지. 어줍지 않은 정의감이랄까.”

계속되는 시호의 귓속말이 뱀처럼 준후의 귀를 휘어 감았다.

뭔가 끈적하고 어두운 느낌이었다.

설마 이게 시호의 작전인가?

수술 전 내 멘탈을 흔들어놓는 것이?

이 모든 게 의도된 바라면 시호는 가스라이팅까지 하는 악질일지도 몰랐다.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고생하고 행운을 빈다.”

시호가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준후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준후는 그 모습이 더 섬뜩했다.

시호와 헤어진 후, 준후는 세면대에서 수술실로 나왔다.

소독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수술모, 수술 장갑, 마스크, 장갑, 루뻬(광학안경)등을 착용했다.

전쟁으로 치면 완전무장을 한 것이다. 그제야 수술이 코앞이라는 실감이 났다.

지이이잉.

휘이이잉.

3번 수술방 문이 열리고 천장에서 소독 가스가 살포되었다.

하얀 연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준후는 수술방에 입장했다.

숨을 들이마시자 독한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차가운 공기가 살갗을 스쳤다.

감염 예방을 위해 수술방은 20-23도를 유지했다. 온도가 높으면 균이 번식하기 쉬웠다.

조명이 밝혀진 무대처럼.

환자가 누워 있는 수술대는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천장에 달린 무영등 때문이었다.

“도욱아, 수술 준비는 어디까지 했어?”

준후는 막 물품실에서 나오는 신경외과 인턴 도욱에게 물었다.

“중심 정맥관 잡았고요. 수술 도구랑 장비 세팅도 거의 다 끝나갑니다.”

“그럼 같이하자. 도와줄게.”

“안 그러셔도 되는데…….”

“대한민국에 안 되는 게 어딨어?”

농담을 한 준후가 도욱을 도와 수술 준비를 하는데 마취의가 수술방에 들어왔다.

마취의는 주사제를 재더니 환자의 중심정맥관에 마취제를 투여했다.

펜타닐과 프로포폴일 것이다.

과거 각성 수술은 마취 약물 및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국소 마취로 진행되었다.

뇌가 통증을 느끼지 못하니.

두피만 마취하고 수술을 진행했다.

즉 환자가 수술의 시작과 끝을 전부 경험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환자의 정신 건강을 보호할 수 있게 전신 마취가 가능해졌고.

환자를 원하는 때 각성시키고.

원하는 때 재울 수도 있었다.

“선생님, 삭두 좀 해주세요. 두피 마취해야 해서요.”

“알겠습니다.”

마취의의 부름을 받고 준후는 수술대로 향했다.

드레싱 카트에 올려져 있던 면도칼을 손에 쥐었다.

강호연파.

산명수려.

풍광명미.

청풍검법의 5초식부터 7초식을 사용해 준후는 환자의 머리를 깔끔하게 밀었다.

검법의 이치를 담은 면도칼의 움직임은 현란하고 유려했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준후가 면도칼을 가로로 눕히고 올려 긋자 환자의 앞머리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다른 부위의 머리카락도 벌초하는 잡초처럼 속절없이 베어져 나갔다.

서걱.

서걱.

단 1분 만에 환자의 머리는 스님 머리처럼 푸릇푸릇해졌다.

“와, 삭두를 이렇게 잘하는 선생님은 또 처음 보네.”

준후를 지켜보고 있던 마취의가 혀를 내둘렀다.

“예전에 머리 미용이라도 배웠어요?”

“아뇨. 그럴 리가요.”

“기술만 익히면 나중에 바버샵 같은 거 차려도 되겠는데요?”

마취의의 말에 준후는 피식 웃고 말았다.

마사지사에 이어 헤어디자이너라…….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의사를 관두더라도 할 직업은 넘쳐나는 것 같았다.

파르라니 깎은 환자의 머리를 소독하고.

마취의가 환자의 두피에 국소 마취체를 투여했다.

그리고 다시 커튼 뒤 마취실로 복귀했다.

“도욱아. 준비 다 끝났지?”

“네. 선배. 이걸로 끝입니다.”

도욱이 또 한 대의 드레싱 카트를 끌고 오며 대답했다.

“바쁠 텐데 폴리(도뇨관, 소변줄)만 후딱 꼽고 가라.”

“아 참. 선배. 폴리를 왜 마취 끝나고 꽂으라고 하셨던 거예요?”

“환자가 엄청 예민해. 아마 의식이 말짱한 상태로 성기를 보였으면 멘탈이 나갔겠지.”

“아하. 그렇구나. 근데 또 질문이 있는데…….”

“얼마든지 물어봐.”

“이 환자는 왜 폴리를 꼽죠? 굳이 안 꼽아도 될 것 같은데.”

도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준후도 한 때는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신경외과는 뇌압을 감소시킬 때 이뇨제(소변이 잘 나오게 하는 약물)를 사용해.”

“…….”

“뇌압 상승으로 고이는 뇌척수액도 어쨌거나 체액의 일종이니까. 그걸 소변으로 빼주는 거지. 그럼 뇌압이 낮아져.”

“아…… 그러니까 폴리 없이 이뇨제를 투여하면 수술대가 지린내 천지가 되겠네요.”

“그렇지. 감염의 위험성도 있고.”

“답변 감사합니다. 역시 선배는 척척박사시네요.”

원하는 대답을 듣고서 도욱이 환자에게 폴리를 꼽았다.

A턴으로 인정받는 도욱은 실패 없이 단번에 폴리를 꼽았다.

카테터가 엄한 부위에 들어가는 일도 없었다.

도욱이 떠난 후.

준후는 가만히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중심 정맥관에 연결된 호스들.

환자 감시 장치와 연결된 수액 호스들.

방금 막 꼽은 폴리 카테터 등등.

환자는 마치 호스들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하얀 환자의 얼굴은 무영등 불빛 때문에 밀랍처럼 보이기도 했다.

준후의 시선은 한참 동안 환자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공황장애를 숨겼던 건 살짝 괘씸했지만 생각해 보면 꼭 나쁘게 볼 것도 아니었다.

환자가 그만큼 각성 수술을 원했다는 뜻이니까.

피아노의 세계로 복귀하고 싶었다는 뜻이니까.

누구에게나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은 있기 마련이었다.

준후도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보면 준후와 명한은 꼭 닮았다.

명한은 피아노에 외골수였고.

준후는 의술에 외골수였다.

명한이 피아노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준후도 의술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명한은 피아니스트가 된 준후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약속할게요.

당신이 피아니스트의 삶을 되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단 한 순간도 당신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당신도 잘 이겨내 줘요.

이번 수술은 우리가 함께 극복해야 할 테니.

준후가 속으로 각오를 다질 때.

지이이잉.

수술방 문이 열리고 집도의 동훈과 치프 찬영, 소독 간호사가 입장했다.

각본 없는 드라마의 주연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끝은 누구도 몰랐다.

* * *

수술 준비가 끝났으므로 스태프들은 일사불란하게 제 위치에 섰다.

집도의 동훈은 수술대와 가장 가까운 오른편에 섰다.

소독 간호사는 동훈의 곁을 지켰다.

소독 간호사 옆에는 수술 도구가 가지런히 놓인 드레싱 카트가 놓여 있었다.

동훈의 맞은편에는 퍼스트 어시스트 찬영.

찬영의 곁은 세컨드 어시스트 준후가 자리했다.

본격적인 수술에 앞서 동훈은 맞은편 2층에 위치한 참관용 수술실을 올려다보았다.

약속한 대로 참관용 수술실에 재현이 있었다.

과장은 미리 잡힌 수술 스케줄이 있어 아마 참관이 늦어질 것 같았다.

국내 최고 신경외과의 수술 참관이 동훈은 긴장되기도 하고 든든하기도 했다.

긴장됐던 건 혹시나 자신의 못난 모습을 보일까 봐, 였고.

든든했던 건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이 벌어지면 재현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재현을 향했던 시선을 거둬드리고.

동훈은 수술을 함께 하는 스태프들을 훑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들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뇌수막종에 대한 각성 수술을 시작하겠습니다.”

동훈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가장 먼저 나선 사람은 준후였다.

준후는 환자의 머리를 소독하고 그 위에 방포를 덮었다.

소독액이 마르자 준후는 펜으로 환자의 머리에 원을 그리고 원을 관통하는 수평선도 그었다.

피부 절개 및 견인 범위를 사전에 표시해둔 것이다.

자나 컴퍼스를 사용한 것도 아니거늘, 준후의 표식은 완벽 그 자체였다.

원은 동그라미 그 자체였고.

수평선은 수평선 그 자체였다.

어쩜 저렇게 손 떨림이 없고 손놀림이 정확할까.

손에 관련된 처치만 놓고 보면 준후는 벌써 완성형 외과의처럼 보였다.

“10번 블레이드.”

소독 간호사에게 받은 메스로.

동훈은 환자의 우측 측두부에 3센티미터 길이의 가로 절개창을 냈다.

깃털을 단 듯 손이 가벼웠는데.

이런 날에 동훈은 수술을 실패해 본 적이 없었다.

오늘은 예감이 좋았다.

어시스트들의 도움을 받아 동훈은 환자의 머리를 열어나갔다.

우선 두피와 골막을 절개했다.

절개가 끝나자 준후가 평소처럼 환상적인 비율의 견인 실력을 뽐냈다.

준후가 견인기로 절개창을 상하로 벌리자 수술 시야가 평야처럼 탁 트였다.

“burr hole(두개 천공술) 세팅. 드릴.”

동훈의 손에 의료용 드릴이 쥐어졌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드릴로 두개골에 구멍을 뚫자 새하얀 골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두개골에 총 4개의 구멍을 뚫고.

개두기를 사용하자 환자의 두개골이 완전히 드러났다.

동훈은 초음파 분쇄기로 경막, 지주막, 연막을 잇달아 절제했다.

평소 밥 먹듯이 하는 일이라 실수는 없었다. 신경과 혈관은 알아서 동훈의 손을 빗겨 나갔다.

가뜩이나 동훈의 감이 좋은데.

치프 찬영과 준후의 어시스트까지 환상적이었다.

두 사람은 물심양면으로 동훈을 도왔다.

수술 시야를 확보하고.

ICP(뇌압 감시 장치)를 삽입하고.

미세 현미경의 배율을 조절하고.

출혈이 발생하면 번개처럼 출혈 거즈를 사용하거나 썩션을 하는 등등.

그 덕분일까.

동훈은 마치 자신의 팔이 여섯 개라도 된 것만 같았다.

오늘은 특히 더 기합이 단단히 들어갔는걸?

기대해 봐도 좋겠어.

동훈은 특히 준후의 어시스트에 집중했는데 준후의 활약은 초반부터 남달랐다.

양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한 손으로는 동훈을 돕고 한 손으로는 찬영을 도왔다.

내비게이터(항법장치)로 변화된 뇌 구조를 갱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술 부위에 손이 많으면 자칫 수술이 산만해지거나 손이 수술 시야를 가리는 경우가 있는데.

준후는 이를 미꾸라지처럼 피해갔다.

본인의 실력을 뽐내는 것과 동시에 동료들과 호흡하는 법까지 벌써 익힌 것이다.

누가 이 아이를 레지던트 1년 차라고 생각할까.

약 1시간에 걸친 과정 끝에.

종양 제거를 위한 사전 작업이 끝났다.

환자의 머리가 완전히 열리면서.

호두처럼 생긴 뇌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훈은 마취실 커튼 뒤에 있는 마취의를 응시했다.

“선생님. 각성 유도제 투입해 주세요.”

각성 수술은 지금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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