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제33장 포물선(5)
“네?”
명한이 말한 긴 문장을 듣고 동훈은 귀를 의심했다.
환청을 들은 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명한은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수술 중단을 요청하고 몸을 파르르 떨기 바빴다.
심지어 수술 중인 머리에 자신의 손을 얹으려는 끔찍한 시도까지 했다.
그런데 명한이 달라졌다.
웅변대회에 나온 것처럼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드러냈다.
눈빛과 목소리에 힘이 가득했다.
사람이 이렇게 순식간에 바뀔 수 있는 걸까?
“저를 믿어주세요. 최선을 다해서 수술에 협조하겠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환자분은 진정이 필요합니다.”
“전 이미 진정했어요.”
“일시적인 현상일 확률이 높습니다. 아무런 처치와 약물 없이 공황 발작은 갑자기 좋아지지 않아요.”
동훈은 중심 정맥관과 연결된 수액에 주사기를 가까이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공황 발작 이후 존재감이 옅었던 준후가 나섰다.
“교수님. 환자분을 믿어보는 건 어떨까요?”
“믿음이라면 그동안 충분했지. 우리 믿음을 저버린 건 오히려 환자야. 공황장애를 수술 전날까지 숨겼다고.”
동훈은 환자가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결과적으로 저희를 속인 셈이 되었지만 그 마음만큼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환자는 각성 수술을 통해 무사히 피아니스트로 복귀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말 한번 잘했구나. 무사히 복귀하려면 순순히 진정제 주사 맞고 수술받아야지.”
“교수님. 삼 세 번이라는데 딱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저도 부탁드립니다.”
준후가 간곡하게 부탁하고 찬영이 지원사격을 했다.
환자도 나름 평온해 보였기에.
명한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들고 있던 주사제를 드레싱 카트에 순순히 내려놓았다.
“기억해. 참는 건 단 한 번뿐이야. 또 발작이 일어나면 그때는 무조건 진정제 투여할 테니까.”
“…….”
“그리고 지금 참관용 수술방에 전화해서 과장님께 전해. 이건 누가 뭐래도 내 수술이고, 오늘 수술은 무조건 각성 수술로 진행한다고.”
“네. 교수님.”
명한의 전갈을 받은 준후가 수술방 입구에 설치된 전화기로 이동했다.
짧게 통화하고 복귀했다.
“과장님이 노발대발하시던데요? 수술 끝나면 가만 안 두겠다고.”
“그러든가, 말든가.”
동훈은 과장에 대한 신경 스위치를 꺼버렸다.
적어도 수술방 안에서는 그 누구도 동훈을 터치할 수 없었다.
이번 수술의 선장은 누가 뭐래도 집도의니까.
책임도, 보람도, 후회도 전부 자신이 지는 것이었으니까.
“고 선생님이 환자 좀 봐줘요. 혹시 또 손을 올릴 수도 있으니까. 준후는 다시 매핑하고.”
동훈의 오더에 스태프들이 다시 원위치로 향했다.
동훈의 귀에 모처럼 수술방에 흐르는 피아노 연주곡이 들렸다.
수술에 집중하다 보니.
10분여간 우여곡절을 하다 보니 음악 소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명한이 직접 연주했다는 곡은 꽤 비장했다.
덕분에 수술이 성공해도, 실패해도 나름의 비장미(悲壯美)가 있을 것 같았다.
“환자분 준비되셨습니까?”
“네. 얼마든지.”
“그럼 수술 시작합니다. 지금은 기분이 어떠세요?”
미세 현미경에 눈을 가까이 한 동훈은 라디오 안테나처럼 생긴 탐침으로 뇌종양의 좌하단부를 자극했다.
“왼쪽 얼굴이 살짝 땡깁니다. 누가 잡아당기는 것 같아요.”
전자 건반을 연주하던 명한이 대답했다.
“뇌종양 LDQ(종양을 사분면으로 했을 때 좌측 하단 부)에 왼쪽 안면 신경. 이쪽은 제거해도 괜찮을 것 같다.”
“매핑했습니다. 교수님.”
“지금은 어떠세요?”
“어깨 쪽 피부가 따끔한데요?”
“역시 팔과 관련된 신경이 넓게 분포해 있군요. 준후야, 매핑.”
“네. 교수님.”
신경 자극기를 활용한 매핑은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최소 20분을 생각하고 있었건만.
10분 만에 종료되었다.
환자가 워낙 적극적으로 매핑을 도왔기 때문이다.
언제 진정제를 사용해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던 자신이 동훈은 우스워졌다.
몇몇 신경은 손상되겠지만 이만하면 훌륭하군.
피아노 연주와 관련된 신경은 전부 살릴 수 있겠어.
준후가 매핑한 MRI 영상을 보며 동훈은 흡족하게 웃었다.
지도가 있으니 길을 잃을 위험이 없고 길을 잃을 위험이 없으니 두려움도 없었다.
이번 수술은 벌써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환자분 고생하셨습니다. 이렇게 잘 해주실 거면서 아까는 왜 그렇게 저희를 고생시키셨습니까?”
동훈이 환자에게 물었다.
“글쎄요. 저도 신기합니다. 잠깐 준후 선생님하고 눈을 마주쳤는데…….”
“…….”
“순간 뭔가 신내림을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신에게 꾸지람을 들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정신이 번쩍 들었죠.”
“음악의 신이 환자분을 도운 모양이군요.”
동훈은 믿지도 않는 신을 들먹였다.
그것 말고는 환자가 진정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재워드리겠습니다. 나머지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푹 주무세요.”
마취의가 다시 프로포폴과 펜타닐을 투여하면서 명한의 두 눈이 스르륵 감겼다.
* * *
이게 어찌 된 일이지?
팔짱을 낀 채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수술을 지켜보고 있던 성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훈이 자신과 재현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서.
제멋대로 수술을 진행해서.
성덕의 심사는 뒤틀릴 대로 뒤틀려 있었다.
그런데 웬걸?
진정제를 투여하지 않고도 브레인 매핑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든 결과였다.
뇌혈관 전공인 성덕이 보기에도.
이번 수술은 글렀다는 느낌이 팍팍 왔었으니까.
“박 과장. 이런 케이스가 있어요? 공황에 빠진 환자가 혼자서 공황을 극복하는 경우가?”
“저도 처음입니다. 발작이 일상적인 공간이 아닌 수술방에서 일어나면 감당을 못하는 게 보통인데 말입니다.”
“허…… 이게 무슨 횡재람?”
활짝 벌어진 성덕의 입술이 귀까지 걸렸다.
최악의 상황이 최선의 상황으로 돌연 바뀌어 버렸다.
각성 수술.
진정제를 사용한 각성 수술.
비각성 수술.
명한에게 펼칠 수 있는 수술은 크게 세 가지였는데 그중 가장 좋은 수술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박 과장 말을 안 듣기를 잘했는데. 비각성 수술했으면 매핑을 못했을 거 아니에요?”
“…….”
“매핑을 못했으면 연주와 관련된 신경도 온전하지 못했을 거고.”
“그랬겠죠.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의견이 항상 옳은 건 아니라고.”
“괜찮아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으니까. 이제부터는 별일 없겠죠?”
“신 교수 실력이면 문제없을 겁니다.”
“어휴. 밥을 안 먹었는데도 든든하네. 미안한데 잠깐 통화 좀 할게요. 수술이 성공할 것 같으니까 기자들한테 미리미리 언질을 줘야지.”
성덕이 자리에서 일어나 재현과 거리를 벌렸다.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재현은 그런 성덕을 지켜보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어쩜 저렇게 약삭빠를까.
동훈을 잡아먹을 것 같이 굴던 건 까맣게 잊고.
수술이 잘 풀리니 비각성 수술 조언을 했던 자신에게 눈치를 주고.
기세등등하게 기자들에게 전화를 한다라…….
성덕은 봐도 봐도 정이 안 가는 인물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특이한 케이스야.
진정제를 투여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상태가 이렇게 극적으로 호전될 수가 있지?
우연으로 치부하기는 힘든데…….
재현의 시선은 모니터 속 준후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환자가 발작을 일으킨 후.
준후는 환자를 밀착 마크하고 있었다.
환자의 증상이 갑자기 호전됐다면 준후가 무언가 수를 쓴 게 분명했다.
수술 끝나면 물어봐야겠어.
* * *
브레인 매핑이 끝난 후 본격적인 뇌종양 절제술의 막이 올랐다.
스태프들은 미세 현미경을 통해 뇌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세 현미경의 높은 배율 덕택에.
호두처럼 생긴 뇌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보였다.
뇌를 지나가는 크고 작은 혈관들.
미로처럼 복잡하게 엉켜 있는 신경들.
자글자글한 주름과 볼록하게 솟은 뇌의 이랑과 푹 꺼진 뇌의 고랑 등등.
“준후야. 매핑을 보고 경계를 그어 봐라.”
“네. 교수님.”
준후는 스칼펠(scalpel, 칼날을 끼우는 블레이드와 손잡이로 이루어진 도구, 흔히 메스라고 부름)을 오른손에 쉬었다.
왼손으로 15번 블레이드를 스칼펠에 끼웠다.
딸칵!
15번은 주로 성형외과에서 사용하는데 섬세한 절개에 안성맞춤인 칼날이었다.
사전에 매핑한 MRI 영상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준후는 메스로 뇌종양에 경계선을 그었다.
경계선을 통해 앞으로 절제할 부위와 절제하지 않을 부위를 나눠놓는 작업을 펼쳤다.
그 작업에 준후는 검법 초식을 응용했다.
천리건곤.
이는 청풍검법의 제10초식으로 직선보다 곡선에, 속도보다는 정확도에 초점을 맞춘 초식이었다.
초식의 이치가 더해지면서.
메스를 사용하는 준후의 손놀림이 멋들어지게 변했다.
손목은 굽이굽이 물결쳤고.
그 궤적을 따라 뇌종양에 매끄러운 경계가 생겨났다.
준후가 메스를 사용하는 모습은 꼭 서예가의 고결한 풍모를 닮아 있었다.
심지어 작업이 끝날 때까지.
준후의 손은 단 한 번도 끊어지지 않았다.
“와, 미쳤다. 역시 메스 쓰는 건 널 따라갈 사람이 없다.”
“허허. 예상보다 훨씬 잘해줬구나. 고생 많았다.”
작업이 끝나자 찬영이 감탄하고 동훈이 만족했다.
극찬을 받아도 아깝지 않을 만큼.
준후의 작업이 훌륭했던 것이다.
물론 무림에서 검객이었던 준후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작업이긴 했지만 말이다.
“초음파 분쇄기.”
소독 간호사에게 초음파 분쇄기를 건네받고.
동훈이 경계를 따라 뇌종양을 절제하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은은한 분쇄기 소리와 함께.
경계선 바깥에 있던 뇌종양 조각들이 갈가리 찢겨 흡착판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금부터는 할 일이 적었으므로.
준후도 한 시름을 덜었다.
준후는 뇌혈관이 건조해서 출혈을 일으키지 않도록.
항생제를 섞은 생리식염수를 분무기로 뿌렸다.
이따금 미세 혈관 출혈이 일어나면 썩션을 사용하거나 거즈로 지혈했다.
동훈을 돕는 찬영에게 제때제때 필요한 수술 도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시스트를 하면서 준후는 생각에 잠겼다.
왜 난데없이 정안이 성공했는지 돌이켜 보았다.
정답은 은거기인 강백통과의 대화에 있었다.
-정안은 말이야. 보통 무공하고 궤가 달라. 사람에 따라서는 하루 만에 터득할 수도 있지.
-…….
-정안에 담아야 할 정념은 단순히 올바른 생각이 아니야. 네 진심까지 담긴 생각이어야 하지.
과연 정안에 성공했을 때.
준후는 처음으로 정념에 진심까지 담았다.
그저 입에 발린 옳은 말이 아니라 명한에게 느낀 감정까지 전부 쏟아냈다.
공황발작을 숨긴 명한에 대한 서운함, 명한이 정신 차리길 바라는 간절함 등등.
정안에 성공하던 당시의 감정과 생각들을 준후는 가슴 깊숙한 곳에 간직해두었다.
언제라도 꺼내 볼 수 있게.
그나저나 정안의 위력이 대단하네.
공황 발작을 한 번에 멈출 줄은 몰랐는데.
게임으로 치면 상태 이상 해체 스킬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앞으로 자주 써먹겠어.
특히 잔뜩 긴장한 후배들을 가르칠 때 유용할 것 같아.
준후의 입가에 어느새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스태프들의 노력 끝에.
뇌수막종 절제술은 1시간 만에 끝났다.
텅!
은색 곡반 위로 뇌종양이 추락했다.
뇌에 남은 뇌종양의 크기는 1.6cm x 1.6cm 크기였다.
사전에 1.2cm x 1.2cm로 예상했던 절제 범위보다 더 커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훌륭한 성과였다.
덜 제거한 종양만큼.
신경이 보존되었다는 뜻이었기에.
남아 있는 종양은 방사선을 이용한 감마 나이프 수술로도 충분히 제거하기 좋은 사이즈였다.
“다들 고생 많았어요.”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수술 부위의 원상복귀가 끝나고 스태프들은 자축의 인사를 주고받았다.
마스크를 써서 입가는 볼 수 없었지만 서로를 향한 스태프들의 눈은 분명 웃고 있었다.
각성 수술은 한때 벼랑까지 내몰렸지만.
결과적으로 완벽하게 끝났다.
지이이잉.
수술방을 나온 준후는 홀가분하게 마스크와 수술모, 장갑, 가운 등을 의료 폐기물 수거함에 벗어던졌다.
정안을 완성해서.
스승이 참관한 수술을 멋지게 끝내서.
무엇보다 명한의 피아니스트 인생을 지켜줄 수 있어서 준후는 기뻤다.
지금 이 기분을 음악 기호로 표현하면 크레센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