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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181화 (181/424)

181화

제34장 완성(1)

짧고 빠른 보폭으로 준후는 본관 지하 1층으로 향했다.

지하 1층은 식당, 편의점, 미용실, 빵집 등등의 편의 공간이 몰려 있었다.

현재 시각은 오후 4시.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임에도 지하 1층 복도는 행인들로 북적거렸다.

의사 가운, 간호사복, 환자복, 정장, 캐주얼 복장들이 한데 뒤엉켜 있었다.

마치 병원에 있는 사람들을 한 자리에 압축해 놓은 것 같았다.

준후가 서둘러 찾은 곳은 중식당이었다.

내부로 들어가 테이블을 훑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하얗고 매끈한 피부.

오뚝한 코와 절벽처럼 깎아지는 턱선.

50대 초반이지만 30대 초반처럼 보이는 뱀파이어 외모의 소유자가 바로 스승 박재현이었다.

“교수님, 조금 늦었습니다. 신 교수님하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느라…….”

준후가 재현의 반대편에 앉으며 말했다.

“암. 당연한 일이지. 수술 끝나고 스태프들끼리 자축할 시간도 없으면 되겠니?”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녀석도. 너희 과장님한테 너를 빌린다고 미리 이야기해뒀단다. 그러니까 마음 편히 쉬어.”

역시 재현은 일 처리가 깔끔했다.

재현과의 미팅으로 자리를 오래 비운다는 핀잔을 들을까 봐 미리 손을 써둔 것이다.

“배고플 텐데 먹고 싶은 걸 시켜보렴.”

“저는 짜장면 먹겠습니다.”

“하긴 평소에 라면 말고 다른 면 요리는 먹긴 힘들겠지. 나도 짜장으로 하마.”

재현이 종업원을 불렀다.

간짜장 곱빼기 2개와 탕수육 대(大)자를 주문했다.

“수술 스케줄도 바쁘실 텐데 참관까지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준후는 감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재현은 6개월 치 외래 진료가 미리 다 차 있었고 수술 스케줄도 빡빡했다.

그런 숨 가쁜 상황에서 참관을 왔다?

이는 준후에게 엄청난 투자를 한 것이었다.

“준후, 네 솜씨를 꼭 직접 보고 싶었거든. 달걀막을 봉합할 때부터 알아봤는데 명불허전이더구나.”

“쑥스럽습니다. 스승님이나 다른 교수님에 비하면 아직 멀었죠.”

“자동차 사이드 미러에 적힌 문구를 아니?”

“그건 갑자기 왜…….”

“네 목표는 네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단다.”

재현의 농담 섞인 칭찬에 준후는 피식 웃었다.

재현에게는 수술뿐만 아니라 환자를 다루는 자세, 유머러스함 등등.

배울 게 참 많았다.

준후도 나중에 재현 같은 서전이 되고 싶었다.

“그나저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구나.”

“네. 말씀하세요.”

“각성 수술 중간에 환자가 공황 발작을 했잖니?”

“네.”

“진정제를 투여도 안 했는데 환자가 알아서 진정이 되더구나.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말이야.”

“…….”

“수술방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니?”

질문하는 재현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번 수술의 맹점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다.

신 교수나 치프 찬영, 소독 간호사.

수술을 함께 했던 세 사람은 환자가 알아서 진정했다는 사실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천운이 따랐다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현은 아니었다.

“글쎄요. 딱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저희가 환자를 안정시키려고 뭔가를 한 것도 아니고요.”

준후는 오리발을 내밀었다.

정안을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한다고 한들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 같았다.

무공과 내공에 관한 일이라면.

준후는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내 생각에는 준후 네가 뭘 한 것 같은데?”

“제가요? 그럴 리가요.”

“각성 수술 중에 발생한 공황 발작이 저절로 극복되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그렇다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이 있다는 건데…….”

“…….”

“그런 사람이 있다면 환자를 직접 상대하고 있던 준후, 너밖에 없지 않겠니.”

재현의 추론은 정교하면서도 집요했다.

그래서 준후는 놀랐다.

준후에게 남다른 능력이 있다는 걸 구체적으로 캐물은 사람은 재현이 최초였다.

“환자를 진정시킨 방법, 말해줄 수 없겠니?”

“말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제가 한 게 없으니까요.”

“괜찮아. 나한테는 털어놔도 돼.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건 의외로 마음의 짐이 된단다.”

재현의 말투가 너그러웠다.

순간 준후는 자신이 무림에서 겪은 일과 무림에서 얻는 능력을 고백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재현이라면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을까.

솔직히 준후도 외롭긴 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지 못했던 복두장이처럼 답답하기도 했다.

무림에서의 경험은 엄연히 준후의 반쪽인데.

준후는 그 반쪽을 지금까지 계속 숨겨야만 했다.

“저는…….”

준후는 물컵을 만지작거리다가 힘겹게 운을 뗐다.

“제게는…… 교수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특별한 능력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모양이구나. 괜찮아, 죄책감 같은 건 가질 필요 없어.”

“…….”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알아두거라.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난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

“그리고 힘들 땐 언제든 내게 기대도 된다는 것.”

준후가 진실을 숨겼음에도 재현은 여전히 준후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준후 입장에서는 그런 재현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막말로 준후가 무언가를 숨긴다며 섭섭함을 드러낼 수도 있는 재현이었는데 재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스승님.

저는 아직 진실을 말씀드리는 것이 두렵고 불안합니다. 괴물 취급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다 털어놓겠습니다.

스승님과 제 사이에 있는 그 벽을 허물겠습니다.

부디 그때를 기다려주세요.

준후는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켰다.

대화가 끝나고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데 마침 음식이 나왔다.

준후는 재현과 식사를 했다.

6시간의 대 수술을 마치고 먹는 식사는 꿀맛이었다.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음식에 먹히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식사를 마치고.

준후는 지하 3층 주차장까지 재현을 배웅했다.

“교수님.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렴.”

“교수님이 보내주신 뇌종양 논문을 다 봤습니다. 혹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까요?”

“그 많은 걸 벌써 다 봤다고?”

“네.”

“최소한 1년 반은 걸릴 줄 알았는데 놀랍구나.”

재현이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준후는 이성과 사고를 다루는 전전두엽.

그리고 언어와 문자를 담당하는 브로카·브로니케 영역을 점혈법으로 자극해 공부 효율과 공부 속도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심지어 기억 중추인 해마를 자극해서 필요한 정보를 원하는 때 불러올 수도 있었다.

학습력이 특출나고 남다른 것은 운명과도 같았다.

“다음으로 공부하고 싶은 분야는 어디니?”

“뇌혈관 질환입니다.”

“뇌 파트에서 환자가 제일 많은 뇌종양. 그다음에 뇌혈관 질환이라…….”

“…….”

“응급 상황에 대처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역시 스승님이십니다.”

준후 역시 재현에게 감탄했다.

재현은 준후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뇌종양 파트와 달리 뇌혈관 파트는 응급 질환이 많았다. 색전증이나 혈전증으로 뇌혈관이 막히면 응급으로 혈관을 개통해야 했다.

“좋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뇌혈관 질환 논문을 정리해서 보내주마.”

“감사합니다.”

“그놈의 감사는 하루에 몇 번이나 하는 거니?”

재현이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무 고마워할 필요 없어. 이것도 결론적으로 다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

“어째서…….”

“네가 무럭무럭 자라서 나를 대신해야 나도 빨리 은퇴할 테니까.”

“그런 무서운 말씀 마십시오. 저와 제원대 스태프들, 그리고 환자와 보호자들을 다 기절하게 만들게 아니시라면.”

장군과 멍군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비록 만나지는 얼마 안 됐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끈끈한 사제의 정이 있었다.

삐비빅!

재현이 차 키를 누르자 승용차의 운전석이 열렸다.

“아 참. 선물이라고 하기는 부끄럽지만 내 걸 사는 김에 네 것도 같이 샀단다.”

“…….”

“받으렴.”

재현이 내민 선물을 받으며 준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이게 왜 여기서 나와?

* * *

드르르륵.

재현의 배웅을 마치고 준후는 신경외과 당직실로 복귀했다.

긴 수술을 마치고 와서 그런지 당직실이 낯설었다.

당직실에는 민경, 경수, 시호가 먼저 와 있었는데 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고생 많았다. 각성 수술 끝내고 오는 길이지?”

“치프가 네 칭찬 엄청 하고 갔어. 어시스트 너무 잘했다고.”

시호와 민경이 한마디씩 했다.

무뚝뚝한 동기 경수는 준후를 한 번 힐끔거리고 말았다.

“뭐, 1년 차 치고 잘한다는 뜻이죠. 그런데 셋이 그러고 있으니까 뭔가 삼총사 같은 느낌인데요.”

준후가 웃으며 말했다.

오더 입력 중인 경수가 좌측 날개. 그 옆에 앉은 민경이 우측 날개.

둘 사이에 있는 시호의 위치가 절묘했다.

“삼총사는 너무 없어 보니까 삼대천황 정도로 합의 보자.”

“무슨 삼대천황인데요?”

“그건 앞으로 정해봐야지. 준후 너도 머리 좀 식혀.”

“네. 그러려고요.”

준후는 냉장고로 이동해 아이스크림 하나를 꺼냈다.

빈 의자에 털썩 앉아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오늘은 준후도 꽤 피곤했다.

각성 수술 자체도 워낙 까다롭고 어려웠던 데다가 중간에 환자가 공황발작을 일으키면서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덕분에 정안을 터득하긴 했다만).

그래서 몸과 머리가 나른하고 피곤했다.

이따 시간을 내서 영양제를 먹고 운기조식으로 피로를 날려 버릴 필요가 있었다.

“오늘은 너답지 않게 많이 피곤해 보인다?”

“말도 마세요. 죽겠으니까.”

“희귀한 일이네. 천하의 서준후가 녹초도 다 되고. 그래서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니?”

“그냥 녹차 맛을 좋아해서요.”

준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이스크림을 크게 베어 물었다.

무림에서 준후는 차를 많이 마셨다. 현대인이 커피를 마시는 것만큼 자주 차를 마셨다.

준후가 녹차를 좋아했던 것은.

녹차를 마시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약간의 각성 효과도 있어서였다.

녹차에 카테킨과 카페인이 들어서 그랬다는 건 현대에 돌아와서 알게 되었다.

그렇게 쉬는 동안.

준후는 신고 있던 크룩스 바깥으로 발을 내놓았다.

서 있는 시간이 워낙 많아서 발이 아프고 뜨거웠던 탓이었다.

“어휴, 서준후. 극혐!”

별안간 민경이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왜 그러세요? 선배? 준후가 왜요?”

“깜짝이야. 간 떨어질 뻔했다.”

경수와 시호가 민경에게 관심을 보였고 준후는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한 따름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극혐이래?

“저…… 저 흉측한 걸 봐.”

민경이 검지로 가리킨 것은 준후의 발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준후가 신고 있는 발가락 양말이었다.

“준후, 너 발가락 양말 같은 거 신니?”

“선물로 받은 거예요. 편하고 좋던데요?”

민경의 의도를 알아차리고서야 준후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주차장에서 헤어질 때 재현이 선물한 것은 다름 아닌 발가락 양말이었다.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꼭 신어보렴. 신세계가 펼쳐질 테니까.

재현의 말을 듣고 준후는 오는 길에 발가락 양말로 갈아 신었다.

과연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면 재질에서 느껴지는 포근함.

시원시원한 통풍감.

편안하고 안정적인 발가락 틈.

스승의 머스트 잇 아이템이 발가락 양말이라는 건 의외였지만.

스승의 간택을 받을 만큼 발가락 양말은 그 효과가 우수했다.

그래서 준후는 앞으로 발가락 양말만 신기로 했다.

“너 무좀 있는 거 아니지?”

“꼭 무좀이 있어야 발가락 양말을 신나요? 오히려 발가락 양말이 무좀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는데.”

“그래도 보기에 너무 흉측하잖아. 으…….”

민경이 진저리치며 대답했다.

“이게 왜 흉측해요? 보기만 좋은데.”

“네 발가락이니까 그렇지.”

“그럼 이러면 어때요?”

준후는 민경을 놀리기 위해 일부러 발가락을 힘차게 꼼지락거렸다.

그러자 민경이 또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다.

“서준후, 극혐! 완전 극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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