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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182화 (182/424)

182화

제34장 완성(2)

당직실에서 나누는 대화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오늘은 그나마 여유가 있는 날이었다.

웬일인지 응급실 콜이 잠잠했다.

수술 스케줄이 30분에서 1시가 정도 잠깐 뜬 동료들도 많았다.

일과 시간에 다 같이 모이기 힘든 만큼 이야기는 화기애애하게 이어졌다.

분위기 메이커는 단연 민경이었다.

민경에게는 재주가 있었다.

거미줄처럼 화제를 엮고 쭉쭉 뻗어 나가는.

민경 덕분에 화제는 준후의 발가락 양말에서 의사들의 필수템으로 옮겨졌다.

“난 누가 뭐래도 크룩스가 최고인 것 같아.”

시호가 먼저 의견을 냈다.

크룩스는 미국의 신발 브랜드지만 지금은 신발의 한 종류로 불렸다.

호치키스나 코카콜라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형태는 구멍이 송송 뚫린 샌들이었다.

“통풍 잘 되고 발도 편하고 얼마나 좋아? 디자인도 삼선 슬리퍼에 비해 세련됐고.”

“하긴 요즘은 PK(의대 실습생)도 크룩스 신고 다니더라고요. 저 때는 눈치 보여서 못 신었는데.”

“민경이 네가 벌써 라떼 찾을 군번이었나?”

시호가 민경을 응시했다.

시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2년 차면 찾을 만하죠. 그렇지 준후야?”

“저는 빠지겠습니다. 극혐이니까요.”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왜 그래? 삐지지 마. 너답지 않게.”

민경이 급하게 준후를 달랬다.

“경수 너는 필수템이 뭐야?”

민경이 경수에게 화살을 돌렸다.

넷 중에서 경수는 가장 말이 적었다. 오늘만 그런 게 아니라 평소에도 그랬다.

심지어 동기인 준후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준후가 일을 도와준다고 해도 거절하고 추궁과혈을 해준다고 해도 경수는 거절했다.

마치 좌우명이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겠다’인 것 같았다.

“저는 파스입니다.”

“그게 다야? 뭐 추가적인 설명은 없어?”

“이유야 다 아실 텐데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요?”

경수의 대답이 쌀쌀맞았다.

경수는 주변 동료들을 훑더니 뒷목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경수의 뒷목에 파스가 붙여져 있었다.

“하여간 경수, 얘는 붙임성이 영 빵점이야. 접착제로도 못 붙일 것 같아.”

“그것도 다 개성이지. 그래서 세상사는 게 더 재미있는 거 아니겠어?”

시호가 의외로 경수를 두둔하고 나섰다.

“파스도 많이 쓰긴 하죠.”

준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장시간 수술을 하는 외과의는 거북목, 디스크, 손목 통증 등을 달고 살기 마련이었다.

파스는 사용하기 쉽고 효과가 빠른 진통제로 외과 레지던트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만약 준후가 무림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자세 교정이나 체력을 회복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준후의 몸에도 주렁주렁 파스가 붙어 있었을 것이다.

“민경 선배는 뭐가 필수템이에요?”

“나는 커피하고 에너지 드링크. 더 정확히 말하면 카페인이겠지. 일단 한잔하면 서너 시간은 버틸 수 있으니까.”

“요즘은 너무 드시는 것 같던데요? 좀 줄여야 하지 않아요?”

준후가 걱정을 섞어 물었다.

“보통 하루에 4잔 정도는 먹지 않아?”

“4잔도 어떤 4잔이냐에 따라 다르죠. 음료마다 카페인 함량이 다 다른데. 카페인 하루 권장 섭취량이 400mg인 건 아시죠?”

“알아. 근데 안다고 다 실천할 수 있는 건 아니지.”

민경이 휘휘 고개를 저었다.

준후는 카페인 음료를 되도록 자제하는 편이었다.

카페인은 당장 각성 효과를 주지만 그건 나중에 쓸 집중력을 당겨오는 것에 불과했다.

이것을 카페인 크러쉬라고 했다.

다들 비슷한 경험을 해봤으리라.

커피를 마시고 대여섯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몸이 축축 처지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경험을.

집중력이 떨어지면 또 커피를 먹는데, 이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그럼 우리 철인 준후의 필수템은 뭘까나? 이제 막 연애를 시작했으니까 아영이라고 대답하려나? 어우, 느끼해.”

“나도 궁금해지는데?”

민경과 시호가 눈을 빛내며 준후의 대답을 기다렸다.

경수도 말은 안 했지만 준후를 향해 이목을 집중했다.

사실 준후는 필수템이 넘쳐났다.

문제는 그 필수템이 상식을 벗어났다는 데에 있었다.

영양제와 운기조식.

공부 효율을 높여주는 뇌신경 점혈법.

내공을 증가시키는 천산환.

타인의 처치나 수술을 한 번 보고 따라 하는 초식화 능력.

내공을 활용한 각종 검사법.

그밖에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무공 등등.

다만 이것들을 솔직히 말했다가는 미친놈이나 괴물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그래서 준후는 가장 온건한 대답을 준비했다.

신고 있던 크룩스에서 발을 뺀 후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제 필수템이라면 역시 발가락 양말이죠. 제 인생은 발가락 양말을 알기 전과 알고 난 후로 나뉠 것 같아요.”

준후의 대답과 행동에 당직실은 한 번 더 발칵 뒤집어졌다.

민경이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서준후! 극혐!”

* * *

동료들과의 대화는 20분가량 더 이어졌다.

의사들의 필수템 이후의 화제는 아영이었다. 준후의 연애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민경은 그 어느 때보다 대화에 적극적이었다.

누가 먼저 고백했냐?

스킨십은 어디까지 했냐.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신경외과 의국에서 준후가 가장 먼저 연애를 할 줄은 몰랐다.

아영에게 잘해라.

아영이 눈에서 눈물이 흐르면 준후, 너는 피눈물을 흘릴 거다 등등.

민경은 대화 도중 종종 시호를 힐끔 쳐다보았다.

별것 아닌 행동이었지만 준후는 알았다.

민경이 시호를 좋아하고 있음을.

민경이 준후의 연애를 입에 담으면서, 민경 자신과 시호의 핑크빛 연애를 상상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준후는 그 점이 오히려 못마땅했다.

준후는 시호를 좋아하지 않았다.

시호에게서 사파인 특유의 음침함과 섬뜩함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설령 민경의 뜻대로 시호와 맺어진다고 해도.

민경은 행복하지 못하리라.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질 확률이 높으리라.

그렇다고 이를 직설적으로 말할 수도 없어 준후는 답답했다.

“수술 스케줄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경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야, 같이 가. 나도 스케줄 있는 거 알잖아. 그럼 신경외과 에이스 둘이서 오붓한 시간 보내.”

두 사람이 떠나면서 당직실이 휑해졌다.

준후와 시호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먼저 운을 뗀 것은 의외로 준후였다.

“선배 왜 그러셨어요?”

“갑자기 뭘?”

“저한테 거짓말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무슨 거짓말? 민경이랑 경수 빠지니까 아주 대놓고 덤벼드네? 나한테 억하심정이라도 있니?”

준후의 추궁에 시호는 손톱만큼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각성 수술 전, 스크럽 할 때 제 운세를 봐주셨죠?”

“그랬지.”

“그거 순 엉터리던데요?”

준후의 목소리에 비난하는 기색이 깃들었다.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당장 눈앞의 현실로 고통받을 수 있다고 하네?

당시의 시호는 준후에게 분명 그렇게 말했다.

뭐랄까, 각성 수술이 망할 것 같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하지만 준후가 나중에 검색해 본 결과 준후의 운세는 시호가 말한 것과 정반대였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집니다. 포기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세요.

각 포털 사이트에 있는 띠별 운세, 별자리 운세는 하나같이 준후의 오늘 운이 대길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시호는 준후의 운세를 거짓으로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준후는 그 의도를 왠지 알 것 같았다.

일종의 가스라이팅이 아니었을까.

준후가 힘들 때.

또는 수술 중 어려움이 발생했을 때.

그 운세를 떠올리고 일을 포기하도록 심리를 조작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았을까.

이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교묘하고 악의적인 계략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확인한 네 운세는 별로 안 좋았어.”

“그럼 휴대폰 줘보세요. 검색 내역 남았을 테니까 확인해 보면 알겠죠.”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네.”

“찔리는 게 있습니까?”

“그럴 리가. 난 불필요한 검색 내역은 바로바로 지우는 성격이거든. 아마 흔적은 안 남았을 거야.”

“…….”

“뭐, 그래도 정 원한다면 확인해 봐도 좋고.”

준후와 다소 떨어져 앉아 있던 시호가 준후에게 다가와 선뜻 휴대폰을 내밀었다.

시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기에 준후는 건네받은 휴대폰의 검색 내용을 확인했다.

과연 뒤져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치밀한 인간.

내가 이렇게 나올 것까지 계산했던 건가.

허탕을 친 준후의 미간이 구겨졌다.

“거봐. 내가 뭐랬어.”

휴대폰을 도로 건네받은 시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근데 준후야. 혹시 너 피해망상 있는 거 아니지?”

“말씀이 너무 지나치시네요.”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내가 네 운세를 거짓으로 말할 이유가 없잖아?”

“그 이유를 저는 모르겠지만 선배는 잘 알고 있겠죠. 어쨌거나 거짓말을 한 건 사실이니까.”

“참나.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악질이구나?”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순간 당직실의 분위기가 살얼음 위를 걷는 듯 팽팽해졌다.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준후가 창이라면 시호는 방패였다.

드르르륵.

때마침 당직실 문이 열렸다.

4년 차이자 치프인 찬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희 둘이 뭐 하냐?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혹시 싸워?”

“아니에요. 잠깐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그렇지 준후야?”

“네. 별거 아닙니다.”

“으음…… 뭐 너희 둘이 그렇다면야.”

“저는 수술 스케줄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시호가 먼저 당직실을 떠났고.

찬영은 준후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근데 준후야.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뭔가 멱살이라도 잡을 분위기였는데?

“네. 없었어요. 저희가 싸울 이유가 없잖아요.”

“하긴 너도 워낙 성격이 좋고 시호도 워낙 무던하니까. 난 또 혹시 구 에이스랑 신 에이스가 신경전을 펼치는 줄 알았잖아.”

“환자 보기도 벅찬데 저희끼리 싸워서야 되겠어요?”

준후는 편안한 말로 찬영을 안심시켰다.

효과가 있었을까.

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지만 겉과 달리 준후의 속은 이미 시호를 향한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준후는 분명 또렷하게 느꼈다.

자신을 향한 시호의 새까만 악의를.

시호는 준후가 지금까지 상대한 악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동안 상대했던 악인들이 1차원적이고 본인의 욕망을 숨기지 못했던 반면.

시호는 자신을 숨길 줄 알았다.

등 뒤에서 사람을 조종했으며 심지어 주변에서 선망까지 받고 있었다.

남을 괴롭히는 방법 또한 교묘했고 말이다.

실로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수였다.

* * *

“크크크큭.”

병동 복도를 걷던 시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광소를 터뜨렸다.

즐거웠다.

너무나 즐거웠다.

준후와 나눈 대화가 못 견디게 즐거웠다.

놀랍게도 준후는 시호의 마음과 수법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런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다.

보통은 시호가 마음먹고 한 사람의 심리를 조작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그 늪에서 꼼짝없이 허우적거렸다.

시호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그런데 준후는 무려 두 번이나 시호의 손길을 피해냈다.

척추 응급 수술을 할 당시.

시호가 환자의 척추를 엉망으로 갈아버리려고 할 때.

준후는 용감하게 나서서 시호를 저지했다.

그리고 오늘은 은근히 시도한 가스라이팅의 실체까지 밝혀냈다.

실로 흥미로운 녀석이었다.

시호는 인생이 너무 쉽게 풀려서 재미가 없었는데.

그 재미없는 인생에 나타나 준 준후가 심히 반가웠다.

어쩌면 준후야말로 자신을 완성시켜 줄 구세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빛 속에서 어둠은 더 짙어지기 마련이기에.

“선생님. 무슨 즐거운 일이 있으신가 봐요? 엄청 웃고 계시는 데요.”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간호사가 걸음을 멈추고 시호에게 말을 걸었다.

시호는 얼굴을 가리던 손을 거두고, 광소를 거두고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방금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거든요.”

“무슨 농담이요? 저도 알고 싶어요.”

“워낙 시시껄렁한 농담이라 선생님한테는 재미없을 겁니다. 근데 선생님, 오늘 머리핀 바꾸셨네요?”

“어머.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관심이 있으면 다 보이기 마련이죠.”

시호의 달콤한 대답에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오늘도 수고하세요. 저는 이만.”

시호는 격려하듯이 간호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다시 병동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가운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용 소독 스프레이를 꺼내 간호사의 어깨를 만졌던 손바닥에 뿌렸다.

치이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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