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제34장 완성(3)
각성 수술이 끝난 후 이틀 뒤.
준후는 당직실에서 차트 작성 및 오더 입력을 하고 있었다.
손가락은 오늘도 불을 뿜었다.
타다다닥.
타다다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따발총 연발 소리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그만큼 속도가 빨랐음에도 오탈자는 하나도 없었다.
“진짜 볼 때마다 신기하다. 너는.”
곁에 있던 동기 경수가 준후를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뭐가?”
“빨리 치는 건 둘째 치고 오탈자가 전혀 없잖아. 키보드 칠 때.”
“생각 없이 그냥 치는 것 같지? 여기는 내 전쟁터야.”
“이제는 싸울 때가 없어서 키보드랑 싸우냐?”
“그럴지도 모르지.”
준후는 피식 웃고 말았다.
경수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해 못 하겠지만 전쟁터라는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빠르고 정확한 타자.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었던 건 무림에서 익힌 다양한 수공(손을 사용한 무공)과 지공(손가락을 사용하는 무공) 덕분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수공과 지공을 사용할 때 준후는 항상 목숨이 위태로웠다.
검객이었던 준후가 수공과 지공을 사용한다는 건 손에서 검을 놓쳤다는 뜻이고.
손에서 검을 놓쳤다는 건.
그만큼 적수가 만만치 않고 위기에 몰렸다는 뜻이었다.
그래서일까.
수공과 지공을 발휘하는 타자를 칠 때면 준후는 어쩐지 쫓기는 느낌이 들었다.
괜히 필사적이 되었다.
이는 무림에서 얻은 직업병.
또는 무림에서 얻은 후유증이나 트라우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폭풍처럼 전산 업무를 끝내고 준후는 탁자에 놓여 있던 약통을 꺼냈다.
비타민 B, 비타민 C, 타우린을 챙겨 먹었다. 전부 피로 회복에 관련된 영양제였다.
“넌 영양제 안 챙겨 먹냐?”
준후가 경수에게 물었다.
“난 그런 거 안 챙겨 먹어도 건강해. 우리 나이에 무슨 벌써부터 영양제야?”
“건강은 미리미리 챙겨야지. 그럼 지금까지 영양제 한 번도 안 먹어 봤어?”
“부모님이 챙겨주실 때만 잠깐 먹어 봤다.”
경수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먹어도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던데…… 난 사람들이 왜 그렇게 영양제를 챙겨 먹는지 모르겠다.”
“이것저것 먹다 보면 그중에 효과가 오는 게 있어. 그런 걸 먹으면 돼.”
“굳이 그런 수고를 하라고?”
“수고할 보람이 있을걸?”
준후는 영양제에 대해 호의적인 편이었다.
운기조식을 통해 영양제의 영양소를 온전히 흡수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영양제를 과대평가 하지도 않았다.
영양제는 만능이 아니었다.
부실한 식사에 따른 영양부족을 거드는 역할이랄까.
제일 좋은 건 누가 뭐래도 균형 잡힌 식단이었다.
외과의의 특성상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 힘들어서 문제지만.
“딴 건 몰라도 유산균은 꼭 챙겨 먹어라.”
“유산균은 왜?”
“너 한 번 화장실 가면 엄청 오래 있다가 오잖아. 변비 아니야?”
준후의 지적에 경수가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면역 시스템에 70-80퍼센트를 장이 책임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게 괜히 중요한 게 아니지.”
“네. 네. 니 똥 굵습니다.”
“그래. 이젠 니 똥도 제발 굵어져라. 난 라운딩 돌고 올게. 집 잘 지키고 있어.”
준후는 당직실을 나와 숙직실을 찾았다.
평일 오후였으므로 숙직실은 텅 비어 있었다.
준후는 숙직실 한구석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창가에서 흘러드는 따뜻한 초가을 햇살을 맞으며 운기조식을 펼쳐나갔다.
쓰으으읍.
숨을 들이마시자 공기 중에 떠도는 생기가 몸 안으로 들어왔다.
준후는 그 생기를 기경팔맥이라는 통로로 차분하게 흘려보냈다.
그 과정에서 방금 섭취한 영양제의 영양 성분들이 온몸에 골고루 퍼져 나갔다.
후우우우.
숨을 뱉으면서 생긴 압력으로 생기를 하단전에 밀어 넣었다.
아랫배가 희미하게나마 묵직해졌다.
내공이 축적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15분 정도 반복하자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이것이 지금의 준후를 만들어준 사기 조합, 운기조식과 영양제 조합이었다.
준후는 상쾌한 기분으로 숙직실을 나섰다.
지금 컨디션이면 새벽까지도 거뜬하리라.
* * *
준후는 응급실에서 환자를 진료 중이었다.
환자의 이름은 강정남.
70대 노인으로 화장실에서 실신한 후 구급차에 실려 왔다.
바이탈은 이상 무(無).
혈액 검사와 소변 검사에서 고혈압과 당뇨 소견이 나왔고.
머리 엑스레이상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선생님. 저희 아버지가 왜 쓰러지신 거죠? 지병인 고혈압과 당뇨만 빼면 건강하신 분이거든요.”
딸로 보이는 보호자가 준후에게 물었다.
방금 막 의식을 차린.
병상에 누워 있는 환자는 멍한 표정이었다.
초점이 흐린 눈동자로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머리에 종양이 있다거나 혈관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죠?”
“제가 봤을 때는 다행히 별 이상은 없는 듯합니다. 쓰러지면서 머리에 외상이 생긴 것도 아니고요.”
“기절해서 실려 오셨는데요?”
보호자가 우려 섞인 눈빛으로 환자를 힐끔거렸다.
반면의 준후의 태도는 초지일관 평온했다.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온 경위를 들은 순간 딱 떠오른 것이 있었다.
“선생님, 기왕 온 김에 CT라도 찍게 해주세요.”
“아버님을 걱정하시는 건 충분히 이해하지만 걱정이 너무 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헛돈을 쓰실 필요도 없고요.”
“그래도 걱정을 안 할 수가 있나요? 쓰러진 원인을 알아야 하는데.”
“원인이라면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지금부터 알려드리죠. 환자분?”
준후의 부드러운 시선이 환자를 향했다.
“네.”
“화장실에서 볼일 보실 때, 힘을 너무 세게 주셨죠?”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의사의 감이죠.”
“사실 제가…… 사흘 동안 큰일을 못 봤거든요. 그래서 억지로 힘을 주긴 했어요.”
환자가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보호자분, 이게 환자분이 실신한 이유입니다.”
“네? 전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데요?”
어리둥절한 보호자를 위해 준후는 추가 설명을 했다.
변을 보기 위해 무리하게 힘을 주다 보면 저혈압과 뇌혈류 감소로 인해 미주신경성 실신이 올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노인 환자분께 자주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많이 놀라셨겠지만 비슷한 케이스가 많아요.”
“…….”
“화장실에서 소변이나 대변을 보다가 실려 오는 환자분들이요.”
“그럼 특별한 질환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네요?”
“그렇죠. 어르신 앞으로는 화장실에서 너무 애쓰지 마시고 차라리 변비약을 드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거 제가 별것도 아닌 일로 여러 사람을 고생시켰군요.”
환자가 민망한지 희끗희끗한 머리를 긁적거렸다.
“고생이라니요. 쓰러지셨으면 당연히 병원에 오셔야죠.”
별다른 처방 없이 준후는 환자와 보호자를 돌려보냈다.
멀어지는 부녀를 바라보며 준후는 생각에 잠겼다.
산다는 것은 생로병사.
즉,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병원에서 근무하다 보니 생로병사를 매일 피부로 느끼는 준후였다.
자신도 언젠가 나이가 들고 병들고 죽게 되리라.
다만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무엇에 의미를 두고 무엇을 성취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까.
내 목표는 최대한 많은 목숨을 살리는 거야.
최고의 신경외과의가 되어서.
뇌, 척추, 정위신경 파트를 정복하고, 나아가 사지접합 수술을 하는 수부외과, 외상외과까지 숙달하는 거야.
언젠가는 뇌사와 식물인간까지도 치료해 내야지.
준후는 모처럼 오른손목에 차고 있던 건강 팔찌를 내려다보며 각오를 다졌다.
성호와 한 약속을 지킬 때까지.
준후는 성장을 멈출 수 없었다.
신경외과 병동으로 복귀하기 위해 응급실을 나오던 중.
준후는 앞서 걷고 있는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계의 인구가 80억에 달한다는데 고작 뒷모습만 보고 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저기요. 시간 좀 있으세요?”
준후는 앞서 걷던 사람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상대는 몸을 돌려 준후를 확인하더니 화들짝 놀랐다.
“뭐야? 놀랐잖아!”
“당연히 놀라야지. 놀라게 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난 이상한 사람이 수작 거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사람은 바로 아영이었다.
대략 7년 동안 유지했던 친구 관계에서 이제는 준후의 단 하나뿐인 연인이 된 아영.
직접 고백하긴 했지만.
준후는 가끔 자신이 아영과 교제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영이 너도 응급실 환자 봤어?”
“응. 흉통 환자였어. 혹시나 기흉인가 싶어서 긴장했는데 역류성 식도염 환자더라고. 준후 너는 무슨 환자 봤는데?”
“화장실에서 실신한 노인 환자. 힘주다가 쓰러지셨더라.”
“의외로 경증이었네? 준후 너는 항상 응급환자만 진료 보는 줄 알았는데.”
“이런 날도 있어야 나도 한숨 돌리지 않겠어?”
아영과 잡담을 나누며 준후는 3층 직원용 휴게실을 찾았다.
응급실 진료가 생각보다 빨리 끝난 덕분에 10분에서 20분 정도 여유를 낼 수 있었다.
3층 직원용 휴게실은 텅 비어 있어 휑한 분위기를 풍겼다.
낡고 스크래치가 간 소파들이 ‘ㄷ’자로 놓여 있었고 출입구 쪽에 음료 자판기가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캔 커피를 뽑아서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내가 괜한 짓을 했나?”
“응? 갑자기 왜?”
“메신저 프로필 사진에 같이 찍은 사진을 올려놓고 연애하는 티를 팍팍 냈잖아. 주변에서 성가시게 안 굴어?”
“의국 선배들이 귀찮게 이것저것 묻긴 하더라.”
“아직도 그래?”
“응. 그래도 한 일주일 정도 지나면 그치지 않을까? 준후 너도 마찬가지지?”
“말도 마. 며칠 전에는 민경 선배가 범인 취조하듯이 굴더라고.”
주변의 뜨거운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준후도 미처 몰랐다.
준후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준후를 마주칠 때마다 아영 이야기를 꺼내곤 했으니까.
“그래도 난 이렇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어. 연애를 공개적으로 해야 책임감도 더 생기고 아영이 너한테 집적거리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
“다시 시간을 돌린다고 해도 나는 같은 판단을 했을 거야.”
“괜찮아요. 잘했어요. 우리 애기.”
아영이 놀리듯이 말하며 준후의 등을 토닥였다.
“사실 나도 속이 후련하던걸?”
“정말? 나 때문에 괜히 하는 말은 아니고?”
“당연히 정말이지. 내가 이런 날을 얼마나 꿈꿔왔는지 넌 모를 거야.”
말을 마친 아영이 준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자신에게 기대는 사람 있다는 것.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에 준후는 안정감을 느꼈다.
어쩌면 그동안 준후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사랑 때문에 의술에 소홀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단단한 버팀목으로 오히려 의술에 더 매진할 수 있음을 몰랐던 건지도 몰랐다.
“아영이 너 오늘 당직이지?”
“응. 그런데?”
“난 오프거든? 새벽쯤에 너희 당직실에 놀러 가도 돼?”
“공부하느라 바쁘지 않아?”
“이런 식으로도 짬짬이 데이트해야지. 얼굴 보기도 힘든데.”
준후는 나름 파격적인 제안을 했건만 아영의 반응은 의외로 좋지 않았다.
아영은 눈초리를 가느다랗게 하고 준후를 응시했다.
“준후. 너 설마…….”
“설마 뭐?”
“벌써부터 엉큼한 짓 하려고 하는 거 아니야? 사람들 없는 야밤이라고 막…….”
“저기요. 저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번지수 잘못 찾았거든요? 세상에 남자는 나만 빼고 다 늑대거든요?”
“아니거든요? 이제 준후 네가 제일 늑대거든요?”
두 사람은 꺄르륵 거리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아 참. 나 얼마 전에 준후 네 선배 봤다?”
“누군데?”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체구가 조그맣고 피부가 하얀 사람이었어.”
아영의 이야기를 듣고 준후는 단박에 시호를 떠올렸다.
이맛살을 찌푸렸다.
시호와 아영의 접촉이 달가울 리 없었다.
뭐랄까.
시호가 아영에게 마수를 뻗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시호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그 사람하고 아는 척하지 마.”
“왜? 좋은 사람 같던데? 말투도 싹싹하고 쾌활하고 웃는 모습도 보기 좋더라.”
“일일이 설명하긴 힘들데…… 그 사람하고는 무조건 상종하면 안 돼.”
“뭐야? 벌써 질투하는 거야?”
“질투하는 거 맞아. 그러니까 내 말 명심해.”
준후는 아영에게 한 번 더 신신당부를 했다. 시호와 친해지지 말라고.
지이이잉.
때마침 가운에 넣어둔 콜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하니 불길하게도 중환자실 콜이었다.
병동 콜이면 몰라도 중환자실 콜 중에 만만한 콜은 없었다.
-선생님. 혹시 어디세요?
“휴게실인데 이제 막 돌아가려던 참입니다.”
-지금 중환자실 와주실 수 있어요? 각성 수술받은 피아니스트 환자가…….
“바로 갈게요. 끊겠습니다.”
준후는 노티를 다 듣지도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명한에 관련된 일이라면 어차피 준후가 직접 관리해야 했다.
“응급 콜이야?”
“어. 아영이 너는 좀 더 쉬고 있어. 새벽에 보자.”
아영을 휴게실에 남겨두고 준후는 황급히 신경외과 중환자실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