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186화 (186/424)

186화

제35장 첩첩산중(1)

“선배, 도와주시는 거 아니었어요?”

호진은 울상을 지으며 준후에게 물었다.

구세주처럼 나타난 준후가 요추천자를 대신해 줄 것이라 기대했건만 이게 웬걸?

준후는 구경을 선언했다.

뭔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혹시 자신이 준후를 섭섭하게 만들었던 적이 있는지 생각이 깊어지기도 했다.

“믿기 힘들겠지만 이게 널 도와주는 거야.”

“네? 진심이세요? 저는 아직 요추천자를 할 준비가 안 됐는데요?”

“준비 없이 눈앞에 닥친 일을 할 때도 있는 법이지. 그리고 경수 말도 옳아.”

준후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요추천자, 할 줄 알아야 해. 계속 피해 다닐 수는 없어.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한다고.”

“저도 알지만 무서운 걸요.”

호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한 달 전 타 병원의 어떤 레지던트가 요추천자를 하던 중 6세 영아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소식이 이상하게 뇌리에 남아 호진의 불안함을 부추긴 것이다.

게다가 곁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는 호랑이 선배 경수도 큰 부담이었다.

술기에 실패했다가는 개 박살이 날 것 같았다.

“요추천자가 망설여지는 게 그 두 가지 때문이라는 거지?”

호진의 설명을 듣고 준후가 되물었다.

“네.”

“일단 영아 사망 사건은 특이 케이스야. 출혈이 있을 때, 뇌압이 높을 때는 요추천자를 하면 안 되는데 그 금기사항을 어겼던 거지.”

“…….”

“경수에 관한 거라면…… 이 기회에 차라리 멋지게 증명하고 싶지 않아? 네 실력을?”

“좋은 말씀해 주시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진정이 안 돼요.”

“호진아.”

“네. 선배.”

“너 ABGA(동맥혈 채혈)는 잘하니?”

“인턴 짬이 7개월 차인데 아직도 못하면 욕먹죠.”

“요추천자도 다를 것 없어. ABGA 같은 느낌으로 하면 돼.”

준후가 별안간 호진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호수처럼 파란 눈으로 호진의 눈을 바라보았다.

왜 선배 눈이 파란색이지?

……라고 의심하거나 궁금해할 겨를은 없었다. 뭔가 신의 계시를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강렬하게 밀려오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말했다.

왜 그렇게 움츠러들어 있냐고.

왜 그렇게 주눅 들어 있냐고.

본인이 본인을 믿어주지 않으면 대체 누가 본인을 믿어주겠냐고.

용기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마주 보는 것이라고도 했다.

미지의 목소리가 머리를 거쳐 가슴을 울리기 시작했다.

호진은 마음을 고쳐먹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까짓거 한 번 해보자.

잔뜩 쫄아 있는 건 내 성미에 안 맞잖아?

두려움에 지지 말고 두려움에 맞서보자.

생각과 감정이 바뀌니 태도도 바뀌었다.

“선배. 저 다시 해볼게요.”

“잘 생각했다.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호진이 먼저 병실로 복귀하고 그 뒤를 준후가 따랐다.

호진의 뒷모습을 준후는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공포에 떨고 있던 호진에게 준후는 정안(正顔)을 펼쳤다.

이제 정안을 완전히 터득했는지.

효과가 즉시 발휘되었다.

정안을 받기 전과 받은 후.

호진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던 것이다.

초조, 긴장, 불안, 분노 등등.

능력을 깎아 먹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준후는 정안으로 제거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정안의 신세를 자주 지게 될 것 같았다.

“경수 선배. 바로 천자하겠습니다.”

호진이 드레싱 카트에 놓여 있던 탐침을 다시 손에 쥐었다.

환자와 거리를 좁혔다.

“뭐야? 갑자기 없던 배짱이 솟아났어?”

경수가 트레이드 마크인 팔짱 낀 자세로 물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솔직히 네가 쫄아 있든, 자신감이 넘치든 나는 상관없어. 중요한 건 술기에 성공하는 거니까.”

“그럼 성공하면 되겠네요.”

“이놈 봐라. 방금까지만 해도 벌벌 떨더니 맹랑한 소리를 다 하네? 이것도 네 작품이냐?”

경수의 시선이 준후를 향했다.

준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경수와 준후의 주목을 받으며.

호진이 환자의 요추 3-4번 사이에 탐침을 꽂았다.

푸우우욱!

손 떨림 없고, 각도 좋고, 탐침이 전진하는 거리도 5센티미터로 좋았다.

잠시 후 탐침의 머리 부분에 이슬 같은 맑은 액체가 맺혔다.

뇌척수액이었다.

호진이 단번에 요추천자에 성공했다는 증거였다.

검사에 필요한 뇌척수액을 충분히 확보하면서 술기는 순조롭게 끝났다.

호진은 들뜬 표정이었고.

경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고 준후는 뿌듯한 표정이었다.

“감사합니다. 준후 선배. 이상하게 선배랑 대화를 나누고서 마음이 편해졌어요.”

병실을 나오며 호진이 말했다.

“다 네 능력이지.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 없어.”

“저는 물품 정리하고 다른 일 하러 가보겠습니다. 경수 선배님도 수고하셨습니다.”

호진이 드레싱 카트를 끌며 스테이션으로 이동했다.

“이거 또 그림 이상하게 만들어지네.”

“뭐가?”

“나만 악역이 된 것 같잖아.”

경수가 투덜거렸다.

“너 악역 맞아. 후배들 기도 못 펴게 하는. 그걸 이제 알았어?”

“환자 생명을 다뤄야 하는데 그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풀어줘야 하냐?”

“가끔은 당근도 주라, 이거지.”

“당근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당근은 너나 많이 먹어라.”

경수와 티격태격하며 준후는 당직실로 복귀했다.

* * *

밤 11시.

자정으로 향하고 있는 시각, 신경외과 병동은 고즈넉했다.

병동 복도와 병실의 불은 전부 소등되어 있었다. 달빛 대신 은은한 수면등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병실의 환자들과 보호자들은 대부분 꿈나라에 있었다.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숙직실에서 잠을 자거나 쉬었고 일부는 컨퍼런스 룸에서 나머지 공부를 했다.

당직 근무자인 준후는 당직실에 홀로 남아 있었다.

짜투리 시간에 찍어 놓은 동영상을 뉴튜브 채널에 업로드하고 있었다.

영상을 뽑아내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평소 공부하는 모습을 촬영하고.

최신 유행하는 댄스를 순식간에 암기해서 추면.

그게 다 콘텐츠였다.

두 종류의 동영상을 뉴튜브 사람들은 아직도 많이 사랑해주고 있었다.

현재 채널 구독자는 60만 명.

일주일에 4개 정도 업로드되는 영상들의 평균 조회수는 30만 회에 육박했다.

나름 알짜배기 채널이었다.

각 잡고 채널을 더 키워볼까?

피지컬을 사용하는 분야로 뻗어 나가면 할 게 많을 것 같은데.

피지컬 게임을 한다거나.

스포츠 쪽을 건드린다거나 등등.

욕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준후는 현 상태에 만족하기로 했다.

뉴튜부는 어디까지나 부업이었다.

준후의 야심과 포부는 전부 의술과 관련이 있었다.

동영상을 업로드하는 동안, 준후는 개인 메일을 확인했다.

스승 재현이 보낸 한 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

[자료 전달이 늦어서 미안하구나. 컨퍼런스 일정이 있어서 부산을 다녀왔거든. 대신 자료는 알차게 준비했단다. 궁금하거나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재현은 메일에 ‘뇌혈 질환 모음집’이라는 압축 파일을 첨부했다.

준후가 부탁한 자료였다.

뇌종양 다음으로 극복하고 싶은 질환이 뇌혈관 질환이었기 때문이다.

뇌종양과 달리 뇌혈관 질환은 응급환자가 많았다.

뇌혈관 질환까지 정복한다면.

준후는 뇌에 관련된 만성 질환과 급성 질환을 모두 섭렵하게 되리라.

첨부 파일을 다운받고.

압축 파일을 풀자 폴더에 대략 이백여 개의 문서 파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일의 이름부터가 심하게 길고 복잡했다.

-뇌동맥류 수술 케이스 1.

-두통 등의 증상이 있는 비(非)파열성 뇌동맥류, 발병 위치는 윌리스 환, 크기는 직경 7mm, 환자 나이 70세에 고혈압, 클립 결찰술, 수술 후 경과 양호.

-뇌동맥류 수술 케이스 2.

-두통 등의 증상이 있는 파열성 뇌동맥류, 발병 위치는 중대 뇌동맥, 직경 15mm, 환자 나이 40세, 혈관 내 수술, 수술 후 경과 사망.

…….

딸칵!

준후는 첫 번째 파일을 클릭해 보았다.

파일 안에는 수술 과정 요약.

수술을 하며 재현이 느낀 감상과 개선점.

응급 상황 발생 시의 대처 방법 등이 적혀 있었다.

즉, 각 파일에는 재현의 성공과 실패.

고뇌와 노력.

기쁨과 눈물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이다.

무림으로 따지면 이는 초일류 비급이었다. 모든 무림인이 탐낼 만했다.

절대 고수가 자신이 익힌 무공의 과정을 상세하게 풀어놓았는데 거기에 눈이 돌아가지 않으면 그게 이상할 테니까 말이다.

첫 번째 문서를 훑는 동안.

준후는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고작 문서 하나를 봤을 뿐인데 실제로 수술을 참관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스승의 자료는 그만큼 흡입력이 있었고 꼼꼼했다.

언제 봐도 감탄만 나온단 말이지.

집도만 해도 피곤하셨을 텐데 이렇게 자료를 남기시다니…….

한두 개도 아니고 본인이 집도한 모든 수술을 말이야.

문서를 다 읽고 준후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이 자료들을 완벽하게 습득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녹여낸다면 준후가 세계 최고의 신경외과의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위대한 과학자 뉴턴이 한 말이었는데 준후는 뉴턴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스승 재현의 어깨에 올랐기에 준후는 더 멀리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되리라.

재현과의 인연.

자신을 향한 재현의 관심과 애정이 준후는 한없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은 준후가 눈부시게 성장하는 것뿐임이 분명했다.

파바바밧.

준후는 내공이 담긴 검지로 머리를 점혈해 나갔다.

사고를 관장하는 전전두엽.

언어 정보를 해석하는 브로카·베르니케 영역.

장기 기억을 저장하는 해마 등을 자극했다.

스승의 자료를 온전히 흡수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려던 찰나.

드르르륵.

당직실 문이 열렸다.

김빠진 기분으로 고개를 돌리니 시호가 당직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선배, 안 주무세요?”

“출출해서 그런가? 잠이 안 오네. 컵라면이나 하나 먹고 자려고.”

시호가 예의 방긋 웃으며 말했다.

동료나 간호사들은 저런 시호의 미소를 천사의 미소라고 했지만 준후는 동의할 수 없었다.

왜 사람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을까.

시호가 순진한 양의 탈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시호가 컵라면 포장을 뜯고 포트기에 물을 올리는 모습을 준후는 빤히 지켜보았다.

“라면 먹는 게 그렇게 신기할 일인가?”

준후의 시선을 느낀 시호가 한마디 했다.

“그냥 눈이 가서요.”

“싱거운 대답이네.”

“선배. 낮에 아영이 만나셨어요?”

“흉부외과 병동에 컨설턴트 갔다가 우연히 마주쳤지. 참하고 예쁘더라. 너랑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시호가 준후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넌 뭐 하고 있었어?”

“밀린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요즘은 논문을 찾아보고 있어요.”

“1년 차에 논문이라…… 역시 차기 에이스는 남달라. 경수는 교재 보기도 바쁜 것 같던데.”

“운 좋게 어렸을 때 속독하는 요령을 익혔거든요.”

준후는 어깨를 으쓱하고 시호와 눈을 마주쳤다.

곧바로 정안을 사용했다.

환자와 동료들을 진심으로 대하세요. 주변 사람들을 조종하려 들지 말고 기만하려고 들지도 마세요.

위선의 가면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나중에 다 업보로 돌아오니.

그때 후회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개심하세요.

그게 당신을 위한 길입니다.

평소 시호하게 직접 하지 못하고 가슴에만 담아주었던 생각과 감정을 준후는 정안에 몽땅 쏟아부었다.

정안이 발동하면서.

정안이 성공하면서.

시호의 눈도 준후의 눈동자처럼 짙은 푸른색을 띠었다.

그럼 이제 시호도 갱생을 하는 건가?

준후는 살짝 기대감에 부풀었다.

“선배,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왜인지는 몰라도 아주 별로인데? 내가 가장 역겨워하는 스타일의 생각과 감정이 스쳐 지나갔어.”

“그게 뭔데요?”

“말해주기는 곤란해. 지극히 개인적인 거니까.”

시호가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고.

준후는 충격을 받았다.

정안이 성공했지만 시호에게 별 효과가 없었다는 것도 충격이었고.

준후가 발산한 선(善)을 역겹다고 표현한 것도 충격이었다.

시호는 준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적이었다.

아니,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지.

“준후야. 그거 아니?”

“뭐를요?”

“너랑 나는 아주 많이 닮아 있어.”

“글쎄요. 전혀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동의도 못 하겠고요.”

“그걸 못 알아본다면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내가 너보다 위인지도 모르겠네.”

시호의 입가에 모처럼 섬뜩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난 너의 그림자야. 네가 뒤를 돌아보면 그 자리에 항상 내가 있단 말이지.”

시호의 말은 의미심장하면서도 불길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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