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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187화 (187/424)

187화

제35장 첩첩산중(2)

새벽 2시.

신경외과 당직실은 쥐죽은 듯 고요했고 그 고요의 중심에 준후가 있었다.

준후는 창가 아래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펼치는 중이었다.

요지부동하지 않는 자세.

경건한 표정.

잡념 없이 호흡에만 몰입하는 정신력.

준후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외과의가 아니었다. 만물과 하나를 이룬 하나의 초월체였다.

대략 한 시간의 운기조식을 끝내고 준후는 눈을 떴다.

좋은 소식이 하나 있고.

나쁜 소식이 하나 있었다.

좋은 소식이라면 강남 한의원에서 구입한 천산환을 꾸준히 복용하면서 내공 보유량이 꽤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특별한 문제만 터지지 않으면.

내공이 부족해서 내공 관련 검사나 치료를 못 할 일은 없을 듯했다.

한번 해볼까.

준후는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업무를 보는 책상과 30센티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책상을 향해 오른팔을 뻗었다.

손바닥에 내공을 담아 흡(吸, 빨이들일 흡)자 결을 펼치자 벌어진 놀라운 일.

책상에 놓여 있던 볼펜 한 자루가 별안간 허공에 붕 떠올랐다.

준후의 손바닥을 향해 거침없이 날아들었다.

턱!

준후는 볼펜을 쥐고 흐뭇하게 웃었다.

방금 준후가 펼친 무공은 격공섭물이라고 불렸다. 내공으로 물체를 마음대로 조절하는 수법이었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염력쯤 될 것이다.

격공섭물은 난이도가 높은 무공은 아니었다.

필요한 건 단지 무지막지한 내공량이었다.

현대에서 격공섭물을 할 정도면.

준후의 내공은 무르익을 대로 익었다고 봐야 했다.

내공은 본래 다다익선이라 앞으로도 꾸준히 쌓기는 할 테지만.

참고로 내공이 많을수록 더 멀리서 더 크고 무거운 물건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었다.

아쉽네.

좋은 무공인데 쓸 수가 없어서.

손에 쥔 볼펜을 내려다보며 준후는 쓰게 웃었다.

격공섭물은 너무 눈에 띄는 무공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 눈에 띄어서도 안 되는 무공이었다.

다른 사람이 격공섭물을 보면 준후를 초능력자 취급할 테니까 말이다.

가령 총탄이나 부러진 칼의 파편, 심한 골절의 골편 등등.

이런 체 내에 박힌 이물질을 제거하기에 좋은 무공이 격공섭물이었으나 준후는 도저히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 마디로 격공섭물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나쁜 소식이라면 준후의 경지가 계속 제자리걸음이라는 점이었다.

삼류부터 일류 무사.

절정부터 초절정.

화경 – 현경 – 생사경.

무림에서는 무인들의 경지를 이렇게 세 단계로 나누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준후는 화경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화경이라 하면 무림의 20대 고수에 들어갈 수 있는 경지로.

구파 일방의 장로 또는 장문인 급에 해당되는 경지였다.

당연하게도 준후의 다음 목표는 현경이었다.

현경에 접어들면 만독불침, 반로환동을 겪으며 상당 부분 인간을 초월하게 된다.

또한 현경의 경지에 접어들면.

단전이 넓어지며 더 많은 내공을 보유할 수 있게 되는데.

준후는 현경에서 뇌사와 식물인간을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았다.

더 많은 내공.

더 섬세한 통제가 가능한 내공.

이것이라면 다 죽어가는, 다 죽은 뇌도 회복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현경은 역시 만만치 않네.

하긴 그 많은 무인 중에서도 단 3명만이 현경에 들었으니까.

무림맹주 천태룡.

준후의 스승이었던 괴짜 은거기인 강백통.

사파에서는 탈마 흑진천.

현경이 오르지 못할 나무처럼 보였지만 준후는 현경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

포기해야 할 것과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을.

준후에게 현경은 후자였다.

긴 시간 고통을 받더라도 준후는 끝내 현경이라는 경지를 거머쥐고 싶었다.

지금 고통받고 있는.

앞으로 고통받을 수많은 환자를 위해서.

* * *

응급실 콜도 없었고, 밀린 오더와 차트는 다 작성한 지 오래고, 일과 시작까지 2시간 가까이나 시간이 남았기에.

준후는 개인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의 시작은 의학지식을 쌓는 것부터였다.

준후는 스승 재현이 보내준 뇌혈관 관련 자료를 유심히 살폈다.

공부하기 전.

내공 뇌신경 점혈법을 펼쳤더니 내용들이 쏙쏙 머리에 박혔다. 머릿속에서 차곡차곡 정리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준후에게 필요한 건.

피지컬보다는 지식과 경험 쪽이었다.

그래서 스승의 자료는 준후가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는 효자손과 같았다.

준후는 한참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휴. 이제 좀 알 것 같네.”

두 달간의 빡센 공부를 통해.

스승의 자료를 한 바퀴 다 돌렸다.

물론 자료 한 번 봤다고 뇌혈관 질환을 마스터할 수는 없었지만 그 원리는 충분히 터득했다.

전반적인 치료법.

환자 상태별 맞춤 치료법.

각종 응급 상황에 대한 대처법 등등.

현경은 제자리걸음이더라도.

의술에 관해서라면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준후였다.

머리 공부를 끝내고 준후는 손 공부를 준비했다.

서랍을 열어 CSR(중앙 공급실)에서 받아온 수련 도구를 책상에 펼쳐 놓았다.

준비 도구는 스칼펠(칼대)과 블레이드(칼날)였다.

사람들이 메스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칼대에 칼날을 끼운 상태를 말했다.

스칼펠과 블레이드는 용도에 따라 번호가 붙여져 있었는데,

오늘 준후가 사용할 것은 7번 스칼펠과 15번 메스였다.

둘 다 미세 수술을 할 때 사용하는 도구들이었다.

[슬슬 메스 연습도 해보는 게 좋겠구나. 내가 예전에 재미있는 방식으로 수련했는데 준후 네게도 도움이 될 거란다.]

사흘 전 스승이 준후에게 보낸 문자였다.

확실히 기발하시긴 하단 말이지.

나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생각은 못 했을 텐데.

준후는 피식 웃으며 오늘 수련에 필요한 마지막 재료를 꺼냈다.

바로 각종 달고나 뭉치였다.

오프인 의대 동기에게 특별히 구해달라고 한 물건이었다.

메스로 달고나를 깔끔하게 도려내는 것.

그것이 스승의 특별한 메스 수련법이었던 것이다.

딸칵!

준후는 칼대에 칼날을 끼웠다.

퍼즐 조각이 서로 들어맞듯 칼날이 칼대에 딱 들어맞았다.

완성된 메스를 손에 쥐고.

준후는 삼각형이 새겨진 달고나의 테두리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뽀각.

작업을 너무 쉽게 봤을까.

중간에 삼각형의 한 변이 반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생각보다 쉽지 않을걸? 사실 메스보다 이쑤시개를 쓰는 편이 훨씬 쉽단다. 메스는 힘 조절도 어렵고 더 정교한 컨트롤이 필요하니까.]

이래서 수련이구나 싶었던 준후는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방심해서 실패했을 뿐.

진심을 다한다면 이 정도는 껌이었다.

준후는 전직 검객이었으니까.

사실 봉합보다 메스를 사용하는 것이 더 능숙하고 더 자신 있었으니까.

쾌도난마.

준후는 송풍검법 제1초식의 이치를 담아 두 번째 달고나의 테두리를 베어냈다.

송풍검법은 직선적인 검법이자 쾌검의 이치를 품고 있었다.

삼각형 달고나를 잘라내기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스으으윽- 스으으윽- 스으으윽-

메스를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삼각형의 한 변이 잘려 나갔다.

준후는 순식간에 달고나의 삼각형만 남겼다.

콰직!

입에 넣은 달고나의 삼각형 조각이 달고 바삭했다.

탄력이 붙은 준후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달고나 메스 수련을 이어나갔다.

별 모양 달고나.

우산 모양 달고나.

거미 모양 달고나.

오징어 모양 달고나.

용 모양 달고나.

헬로 키X 모양 달고나 등등.

달고나 틀의 모양이 갈수록 정교해졌지만 준후의 손놀림 역시 갈수록 정교해졌다.

검법의 이치를 적용한 후부터 준후는 단 한 번도 달고나를 부숴 먹지 않았다.

이미 검아일체의 경지에 오른 준후였다.

진검이 아닌 메스를 사용하더라도 그 예민한 감각은 어디 가지 않았다.

드르르륵.

“아침부터 뭐 하냐?”

“좋은 아침.”

당직실 문이 열리며 경수와 시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제야 준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모처럼 검(메스)을 쥐고 신나게 놀았더니(?) 두 사람의 기척을 읽지 못했던 것이다.

“메스 연습하고 있었지.”

“하다 하다 이젠 달고나로 수련하냐? 너도 징하다 징해.”

“의외로 도움이 많이 돼. 너도 한 번 해보던가.”

“이런 애들 장난 같은 게 수련이라고? 됐다, 됐어.”

“넌 삼각형도 제대로 못 자를걸?”

“그 도발 받아주지.”

준후가 자리를 비켜주자 그 자리에 경수가 앉았다.

경수는 준후가 쓰던 메스를 들고 삼각형 달고나의 테두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뽀각.

아랫변을 자를 때 참사가 벌어졌다. 아랫변이 반으로 갈라진 것이다.

“이거 은근히 승부욕 자극하네.”

“쉽지 않을 거라고 했지?”

“날이 무뎌서 그래. 날만 바꾸면 금방이야.”

경수는 칼날을 바꾸고 재차 달고나 작업에 들어갔다.

빈말은 아니었는지 삼각형은 무난히 정복했다.

다만 별 모양 달고나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경수는 별 모양 달고나를 서너 개 정도 말아 먹더니 백기를 들었다.

“이거 다 네가 했어?”

경수가 문득 준후가 완성한 달고나를 보고 혀를 둘렀다.

경수는 고작 별 모양으로 허덕거렸는데.

준후는 아주 다양하고 정교한 캐릭터 달고나까지 다 성공시켰던 것이다.

“그럼 귀신이 했겠냐?”

“이제 보니 네가 귀신이네. 달고나 베는 귀신.”

“나도 해봐도 되지?”

잠자코 있던 시호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물론이죠.”

“아주 재미있어 보여. 나도 메스 좋아하거든.”

두 번째 바통 터치가 이어졌고.

준후는 시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시호의 실력이 궁금했다.

촉망받는 에이스답게 시호의 메스는 정밀했다. 손 떨림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힘 조절도 탁월했다.

작업 도중 손목을 살짝 비틀어.

테두리 바깥 부분을 떼어내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삼각형 달고나에 이어.

별 모양 달고나에 우산 모양 달고나까지 시호는 격파해나갔다.

다만 캐릭터 모양의 달고나만큼은 정복하지 못했다.

성격만큼이나 메스 사용하는 것도 범상치 않네. 적어도 메스에 관해서라면 웬만한 교수님에게도 밀리지 않겠어.

준후는 시호의 메스 솜씨에 크게 감탄했다.

준후야 전직 검객이었으니 둘째 치고 시호는 이미 3년 차를 훌쩍 뛰어넘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그래서 더 불안한 것은.

불쑥 치고 들어오는 불길한 상상을 준후는 떨쳐냈다. ‘그 상상’이 너무 도를 지나친 것 같아서.

“나름 분발했는데 준후 너는 못 따라가겠네.”

시호가 못 내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시호의 두 눈은 준후가 깔끔하게 잘라낸 캐릭터 달고나에 머물러 있었다.

“선배도 엄청 잘하셨는데요?”

“잘해야지. 그동안 노력한 게 있으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셨는데요?”

준후의 질문에 시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건 비밀. 덕분에 아침부터 정신이 확 깼다. 뭔가 의욕도 생기고.”

“준후 얘는 워낙 괴물이라 선배가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나저나 캐릭터 달고나까지 성공했을 줄은 몰랐는데.”

경수는 준후가 잘라낸 헬로키X 달고나를 손에 쥐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윤곽선이 또렷한 게.

꼭 종이를 자른 것처럼 보였다.

나는 직선인 테두리도 자르기도 힘든데 준후는 어떻게 이런 곡선까지 소화했을까.

이런 게 바로 재능의 영역일까.

경수는 손에 쥐고 있던 달고나를 입에 넣고 아작아작 깨물었다.

“서준후, 너는 어디 나가서 달고나하지 마라.”

“왜?”

“그걸 정말 몰라서 물어?”

경수가 달고나를 하나 더 입에 넣으며 대답했다.

“너 하나 때문에 전국에 있는 달고나 사장님 다 문 닫을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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