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188화 (188/424)

188화

제35장 첩첩산중(3)

오전 6시, 신경외과 오전 컨퍼런스가 시작되었다.

과장과 교수, 펠로우, 레지던트들이 모두 참석하는 자리었기에 제법 북적거리는 분위기가 있었다.

진행은 치프 찬영이 맡았으며.

다른 스태프들은 의자에 앉아 정면에 놓인 빔 프로젝트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입원 환자 브리핑 전에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곽민석이 손을 들며 화제를 전환했다.

민석은 조 교수로 소아 및 성인의 뇌혈관 질환 전공이었다.

키가 크고 몸이 말라서 레지던트 사이에서는 수수깡이라 불리기도 했다.

“말해봐요.”

“오늘 강원도에서 참석하는 세미나 말입니다. 제가 추천한 인원이 많이 잘렸던데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민석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과장을 응시했다.

“교수별로 동행 인원을 2명씩 추천하는 걸로 되어 있지 않았나?”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명색이 뇌혈관 질환 세미나 아닙니까? 제가 관리하는 펠로우들이 한 명이라도 더 뽑히는 게 이치에 맞다고 봅니다.”

“으음…… 듣고 보니 일리가 없는 건 아니군. 신 교수.”

턱을 쓸어내리던 과장의 시선이 신동훈에게 향했다.

동훈은 3개월 전 서울 분원으로 온 뇌종양 질환 전공의 조 교수였다.

“네. 과장님.”

“참석 인원이 정해져 있잖아. 아무래도 신 교수 인원에서 한 명을 빼서 성 교수 쪽으로 줘야 할 것 같은데?”

“그건 곤란할 것 같습니다.”

“이유는?”

“제가 뽑은 친구들은 스케줄도 다 비워놨습니다. 그리고 이번 세미나가 어디 보통 세미나입니까? 내로라하는 신경외과 서전들이 다 모이는 장소지요. 설령 뇌혈관 전공이 아니더라도 배울 게 많을 겁니다.”

“신 교수님 양보 좀 해주세요.”

잠자코 있던 민석이 대화에 껴들었다.

“죄송하지만 안 되겠습니다.”

“하……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 겁니까?”

“제가 억지를 부리는 것처럼 말씀하시니 불쾌하군요. 전 제 권리를 행사할 뿐이거늘.”

“다음번에는 제가 양보하면 되잖아요.”

“이번이 더 중요하니까 그렇죠.”

동훈과 민석이 정면충돌하면서 회의실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스태프들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진짜 못 됐네.

사람이 어쩜 저럴 수가 있지?

개판이 된 컨퍼런스를 지켜보며 준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준후가 주목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과장이었다.

두 교수의 갈등을 봉합해야 할 과장은 그저 팔짱을 낀 채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입가에는 어느새 희미한 미소마저 떠올라 있었다.

준후의 예상에 따르면.

이 모든 갈등은 과장이 일부러 만들어낸 것이었다.

과장은 애초부터 민석과 동훈을 싸움 붙일 계획이었으리라.

“언제까지 저러고 있으려나. 계속 이러면 일정도 밀릴 텐데.”

곁에 있던 동기 경수가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금방 끝날 거야. 걱정 마.”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데?”

“이제 과장님이 나서서 중재할 거야. 본인 인원을 빼서 곽 교수님한테 넘긴다는 식으로.”

“네가 무당이라도 되냐?”

“무당이 아니어도 그 정도 예측은 할 수 있어. 이 사태의 근본을 이해하면.”

준후의 말은 곧 현실로 되었다.

“두 사람 다 그만 해요. 스태프들 보는 앞에서 이게 무슨 꼴불견입니까?”

과장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나섰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내 T.O를 곽 교수가 쓰세요. 그럼 문제없죠?”

“아니, 그럼 제가 너무 죄송해서…….”

“어쩔 수 없잖아요? 그래야 이 난리가 수습되는데. 회의 계속 진행합시다.”

과장이 나서면서 사태는 일단락 지어졌다.

입원 환자 브리핑도 속행되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평화였다.

민석과 동훈은 서로를 향해 찌릿한 눈빛을 쏘아내기 바빴다.

빈정이 상할 대로 상한 것이다.

“뭐야? 정말 네 말이 맞았네?”

경수가 놀란 표정으로 준후를 응시했다. 준후는 대답 대신 무심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무림맹에서 각종 권모술수를 겪어본 준후였다.

이 정도 예측은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과장은 무림맹의 청룡단주 위지현과 비슷한 스타일이었다.

부하들끼리 경쟁을 붙이고.

또 일부러 이간질시키고.

거기서 얻는 달콤한 과실들을 챙기는 스타일이었다.

방금만 해도 과장은 본인의 T.O를 양보하면서 너그러운 사람의 이미지를 챙기지 않았던가.

동훈과 민석은 거기에 놀아난 것에 불과했다.

“서 선생.”

입원 환자 브리핑이 끝날 때쯤.

과장이 준후의 이름을 불렀다.

컨퍼런스라는 공식적인 자리라서 과장이 준후를 부르는 호칭이 정중했다.

“네. 과장님.”

“서 선생이 관리하는 환자 중에 식물인간 환자 있죠?”

“네. T.A(교통사고)로 8개월 전에 실려 온 민태웅 환자입니다.”

“보호자한테 좋게좋게 이야기해서 빨리 퇴원시켜요. 가뜩이나 병실 자리 모자라잖아요?”

“…….”

“병원이 모텔도 아니고. 언제까지 장기 숙박을 받아줘야겠어요? 집에서 간호하면서 방문 간호사나 부르라고 해요.”

과장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병원 수익 측면에서 식물인간 환자가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맞았다.

더 이상 할 검사나 처치가 없었으니까.

실제로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기도 했고.

하지만 모텔을 운운하는 태도가 준후의 심기를 건드렸다.

보호자가 면전에서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는가.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연명 치료 중단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습니다.”

“오. 그래? 서 선생이 오히려 나보다 낫네.”

“보호자분이 환자를 끝까지 지키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서 선생은 뭐라고 했어요?”

“그냥 알겠다고 했습니다.”

“에헤이,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졌구먼.”

과장이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서 선생. 앞으로 딱 한 달 줄게요. 한 달 안에 식물인간 환자 내보네요. 무조건.”

* * *

컨퍼런스가 끝나고 회진이 시작되었다.

환자·보호자와 대화를 나누는 과장은 천사가 따로 없었다.

자애로운 미소가 입에 걸렸고.

환자의 증상을 꼼꼼하게 물어보며 환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회진의 백미는 과장이 식물인간 보호자와 마주했을 때였다.

과장은 컨퍼런스 때 했던 말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식물인간 환자가 기적처럼 회복하기를 바란다며 보호자를 위로했다.

내막을 아는 준후는 구역질을 삼켜야 했다.

이런 위선자가 신경외과 과장이라는 사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회진이 끝나면서 스태프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아쉽네. 준후, 너도 세미나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스테이션 근처에 있던 준후의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고개를 돌리니 치프 찬영이 있었다.

“너무 서운해하지 마. 세미나 참석 인원이 실력으로 뽑힌 건 아니니까.”

“…….”

“특히 신 교수님은 너를 챙기고 싶어 하셨어. 하지만 1년 차는 일 때문에 데려갈 수가 없잖아?”

“괜찮아요. 저는 병동이 더 좋아요.”

“왜?”

“세미나 가면 환자를 못 보니까요.”

“오랜만에 바람도 쐬고 최신 학계 소식도 들으면 좋지 않아?”

“글쎄요. 별로 안 끌리는 데요?”

준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최신 학계 소식이라면 준후도 논문과 뉴스를 자주 접해서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세미나의 목적은 인맥 관리 측면이 더 컸다.

신경외과 서전들끼리 친목을 다지는 용도랄까.

준후는 인맥보다 실력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실력이 받쳐주면 사람들은 알아서 주변에 몰리기 마련이었다.

“하여간 환자랑 의술밖에 모르는 건 여전하네. 어쨌거나 오늘은 특히 조심해야 해.”

찬영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세미나 때문에 레지던트 3명, 교수님 4명, 펠로우 3명이 빠진단 말이지.”

“…….”

“응급환자라도 발생하면 분명 교통정리가 힘들 거야. 경추나 척추·요추 관련 환자면 정형외과에 SOS 청하고. 뇌 쪽이면 민경이랑 상의 잘하고.”

“네. 치프.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저녁에 보자.”

병동을 떠나는 찬영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준후는 가까운 병실을 찾았다.

식물인간 환자가 있는 병실이었다.

식물인간 환자는 창가 쪽 병실에 누워 있었다. 오늘도 주황빛 아침 햇살을 영양분으로 삼고 있었다.

보호자는 잠시 화장실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준후는 주변을 살핀 후 환자의 목 왼쪽 부분에 손을 올렸다.

내공 미주 신경 자극술을 펼쳤다.

손바닥에서 뻗어 나가는 내공이 물결 형태의 파동을 띠었다.

내공의 파동에 닿는 순간 미주 신경이 파르르 떨렸다.

보이지 않았지만 준후는 느낄 수 있었다.

“역시 특이 케이스였던 건가?”

10분간의 자극 후.

준후는 씁쓸하게 웃으며 환자의 목에서 손을 뗐다.

근 두 달 동안 시시때때로 환자에게 내공 미주 신경 자극술을 펼쳤지만 차도가 없었다.

미주 신경을 자극해 식물인간 환자를 회복시켰다는 프랑스 연구진의 결과는 우연 같았다.

“또 오셨네요. 선생님?”

식물인간 환자의 보호자가 침상으로 다가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5분 전 회진에 이어.

준후가 또 병실을 찾으니 의아했던 것이다.

-서 선생. 앞으로 딱 한 달 줄게요. 한 달 안에 식물인간 환자 내보네요. 무조건.

과장의 지시가 떠오르면서 준후는 가슴 한 켠이 쓰라렸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보호자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지 알았기 때문이다.

“보호자분.”

“네. 선생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환자분 얼굴을 가까이서 뵙고 싶어서 찾아왔던 것뿐이에요.”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정말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과장님은 참 친절한 분인 것 같아요. 아까 회진 돌 때 살짝 감동받았지 뭐예요? 저희 남편을 아직까지 그렇게 위해주시는 줄은 몰랐는데.”

“대단한 분이죠. 여러모로.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준후는 무거운 걸음으로 병실을 빠져나왔다.

이번 일만큼은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 * *

당직실로 돌아온 준후는 바쁘게 오더를 입력했다.

아침 식사를 못 했기에.

메스 연습하면서 남은 달고나 조각으로 대충 허기를 채웠다.

와삭! 와삭!

입안에서 부서지는 달고나.

그것들이 과장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너 그거 알아?”

옆자리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경수가 운을 띄웠다.

“뭔데?”

“어제 제원대 병원 응급실에서 흉기 난동이 있었다던데? 의사 여럿이 다쳤댄다.”

“누가 그 지랄을 했대?”

“보호자가 환자 치료를 대충한다고 난리를 쳤나 봐.”

“하여간 인성 하고는.”

준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병원은 사람을 치료하는 장소지만 의외로 범죄와도 연관이 많은 장소였다.

살인, 강도, 폭력, 사기 등등.

준후 역시 응급실 인턴 시절 조폭들과 크게 한 판 붙은 적이 있었다.

“넌 환자 진료 보면서 곤란했던 적 없어?”

준후가 경수에게 물었다.

“아직까지는. 그래도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지. 몇 년 전에는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이 피습당하는 사건도 있었고.”

“…….”

“그런 일이 나한테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 너한테 문제가 생기면 형님이 다 해결해 준다.”

“퍽이나 그러시겠다.”

경수가 팔짱을 낀 채 특유의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악해. 위험하면 자기 목숨부터 챙기기 마련이지.”

“아닌 사람도 있어. 사람을 너무 일반화하는 거 아니야?”

“그게 일반적인 반응이니까. 너라고 정말 다를 것 같아?”

“난 달라.”

“말로는 다르다고 하겠지. 그리고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야. 정치인이 국민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공허한 소리라고.”

경수가 모처럼 인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드러냈다.

경수는 왜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됐을까.

준후는 문득 그 점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을 것이 뻔했기에 묻지는 않았다.

“됐다.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말이 씨가 될라.”

경수가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깊어가는 침묵.

타다다닥.

타다다닥.

준후와 경수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당직실을 가득 채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까맣게 몰랐다.

우려했던 일이 곧 하나도 빠짐없이 닥쳐올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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