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제35장 첩첩산중(4)
4층 직원용 휴게실.
경수는 낡고 헤진 소파에 털썩 앉아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어구구구…… 죽겠다.”
앓는 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5시간짜리 뇌종양 수술 어시스트를 섰더니 관절과 뼈마디가 삐걱거렸다.
팔다리에는 힘이 없었고 머리는 멍했다.
“자, 받아.”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함께 수술을 했던 3년 차 희준이 경수에게 캔 커피를 건넸다.
경수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커피부터 마셨다. 희준은 경수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오늘 어시스트 훌륭했다. 교수님도 만족하신 눈치고.”
“다행이네요. 꼬투리 잡힐 일은 되도록 하고 싶지 않아서요.”
“칭찬하면 좋아해야지 다행이란 생각이 먼저 드니? 너도 캐릭터 한 번 독특하다.”
경수의 대답에 희준이 피식 웃었다.
“준후나 너나 올해 1년 차는 개성이 뚜렷해서 탈이야.”
“…….”
“준후 때문에 불편하지는 않고?”
경수가 준후로 화제를 돌렸다.
“제가 왜 준후 때문에 불편해야 하죠?”
“같은 1년 차고 스태프들이 너랑 준후를 알게 모르게 비교하잖아.”
“전 그런 거 신경 안 씁니다.”
경수는 딱 잘라 말했다.
동기가 말도 안 되는 활약으로 주목을 받으면 시기나 질투 또는 열등감을 느끼기 마련이지만.
경수는 그런 감정을 손톱만큼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준후를 불쌍하게 여겼다.
잘난 실력과 정의감 때문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잔뜩 고생하고 있었으니까.
경수는 자신이야말로 균형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일 처리는 깔끔하고.
동료와 적당히 선을 지키는 등등.
“뭐, 솔직히 그래 보이긴 해. 그런 면에서는 네가 나보다 낫네.”
“시호 선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런 셈이지.”
3년 차 레지던트는 시호와 희준 두 명이 있었다.
시호가 곽 교수의 컨택을 받아 세미나에 참석한 반면.
희준은 병동에 남았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시호가 의국 스태프들에게 더 인정받고 있다는 것.
“동기에게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 이거 사실 극복하기 힘든 거거든. 자괴감도 들고.”
“그럴 것 같습니다.”
경수는 대충 대답했다.
희준이 드러낸 속마음을 깊이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사적으로 엮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나저나 너도 조금 변한 거 알고 있어?”
“어떤 점에서죠?”
“아주 조금이지만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는 좀 더 사교적으로 변했단 말이지. 특히 준후랑 친해진 것 같던데?”
“사람 잘못 보신 거 아닙니까?”
“너야말로 인정하기 싫은 것 같은데?”
희준의 지적에 경수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확실히 올가을부터는 준후와 대화하는 일이 잦긴 했다.
경수가 준후에게 먼저 말을 건 적도 꽤 많았다.
준후의 활약과 곧은 마음씨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열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경수는 그 마음을 다시 닫기로 결심했다.
인간이란 본래 믿을 수 없는 족속이었다.
-엄마, 어디 가요?
-잠깐 나갔다 올 거야. 우리 경수, 집 잘 보고 있으렴.
-아빠랑 둘이 있기 싫어요. 무서워요.
-괜찮아. 엄마 금방 올 거야. 손가락 걸고 약속할게.
순간 트라우마로 남은 장면이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주먹을 경수는 가까스로 폈다.
“왜 그래? 갑자기 표정이 안 좋다?”
“피곤해서 그렇죠.”
경수는 대충 둘러대고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진동하는 콜폰을 꺼내 통화를 연결했다.
“네. 네.”
-…….
“지금 내려가겠습니다.”
“응급실 콜이니?”
경수가 통화를 끊자 희준이 물었다.
“네. 민경 선배가 걸었네요.”
“가뜩이나 세미나로 사람도 부족한데 오늘은 응급실 콜까지 많네. 먼저 가 봐라.”
“고생하세요.”
경수는 기계적으로 인사하고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잰걸음으로 도착한 응급실.
스테이션에 들러 환자의 정보와 환자가 있는 침상의 위치를 확인한 후 경수는 환자와 마주했다.
환자의 이름은 김민수.
30대 청년으로 구환(병원에 온 적이 있는 환자)이었다.
이전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 진료를 몇 차례 받았는데 그게 벌써 8개월 전이었다.
병명은 조현병.
환자의 응급실 방문 목적은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다친 머리의 외상 때문이었다.
“환자분 머리부터 살펴…….”
그러나 경수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자신을 향한 환자의 눈빛이 맹수처럼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경수는 불안함을 감추기 힘들었다. 환자가 곧 터질 활화산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너지? 내 머리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환자분을 지금 처음 보는데.”
“사람을 시켜서 내가 자전거에서 넘어지게 만들었잖아. 난 다 알아. 그렇지 않고서야 머리를 다칠 리가 없어.”
“오해하지 마시고 제 말을 차근차근…….”
“시치미 떼지 마! 난 다 안다고. 믿을 만한 정보원이 다 말해줬단 말이야.”
환자가 근처에 있던 드레싱 카트에서 가위를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돌격하듯 경수에게 달려들었다.
* * *
3번 수술방.
무영등 불빛이 환한 수술대 위에 환자가 옆으로 누워 있었다.
60대 환자의 병명은 TIA.
일과성 허혈 발작으로 세간에는 미니 뇌졸중으로 알려졌다.
내경동맥에 혈전 또는 콜레스테롤이 쌓여 혈관의 흐름을 막고.
이것이 마비, 발음 장애, 어지럼증, 감각 저하를 일으키는 질환이 TIA였다.
‘죽겠네, 진짜.’
집도의의자 펠로우 2년 차인 구현은 환자의 목 부분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수술의 난이도가 어려운 것도.
수술 중 돌발 변수가 터진 것도 아니었다.
구현이 고통스러운 건 그저 힘이 부쳐서였다. 아침과 점심도 거르고 잇달아 집도를 하고 있었다.
세미나로 인원이 부족하다 보니 갈려 나가고 있던 것이다.
수술 초반만 해도 버틸 만했는데 지금은 시야가 흐릿하고 팔이 파르르 떨렸다.
도저히 집도를 계속할 상황이 아니었다.
심지어 이다음에도 수술이 잡혀 있었으니 죽을 맛이었다.
“선생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
맞은편에 서 있던 준후가 물었다.
인원이 부족하고 수술 난이도도 그렇게 높지는 않았기에 준후가 퍼스트 어시스트를 서고 있었다.
“서준후.”
“네. 선생님.”
“네가 그렇게 일을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이 기회에 수술 좀 해볼래? 내가 컨디션이 워낙 안 좋아서 말이다.”
“경동맥 내막 절제술을 말입니까?”
“역시 무리려나?”
경동맥 내막 절제술은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운 묘한 수술이었다.
수술 과정 자체는 단순했다.
내경동맥을 세로로 가르고.
내경동맥 안에 있는 콜레스테롤 찌꺼기를 제거해 주면 되었다.
하지만 수술 부위가 내경동맥이라는 게 함정이었다.
자칫 실수라도 하면 혈관이 손상될 수 있었다.
“됐다. 못 들은 걸로 해라.”
“아뇨. 정말 하고 싶어서 여쭤본 겁니다. 저한테 맡겨주실 줄은 몰랐거든요.”
“부담스럽진 않겠어?”
“어차피 나중에 해야 할 수술인데요. 미리 해보는 게 좋죠.”
준후는 의외로 자신감을 내비쳤다.
저게 정말 자신감인지, 만용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구현은 준후에게 수술을 맡기기로 했다.
몸 상태가 꽝인 자신보다는 준후가 더 수술을 잘할 가능성이 있었다.
지켜보다가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직접 나서도 괜찮으리라.
“믿고 맡겨 볼 테니까 실망시키지 마.”
“네. 선생님.”
“그럼 일단 자리부터 바꾸자.”
“괜찮습니다. 저는 여기서 해도 돼요.”
“오른손잡이면 그 자리에서 수술하기 불편할 텐데?”
“그럼 왼손을 쓰면 됩니다.”
준후가 왼손에 들고 있던 수술 도구를 오른손으로, 오른손에 들고 있던 수술 도구를 왼손으로 옮겼다.
구현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혀를 찼다.
“설마 너 양손잡이니?”
“네.”
“그래도 자리 바꿔. 수술 부위가 다른 부위도 아니고 내경동맥이야. 어중간한 왼손으로는 감당 못 해.”
“왼손도 오른손만큼 사용합니다. 직접 보여드릴까요? 선생님, 드레싱 카트 위에 거즈 한 장 올려주실래요?”
“네.”
준후 옆에 있던 소독 간호사가 드레싱 카트 위에 거즈 한 장을 올렸다.
서걱!
준후는 반듯하게 세로로 거즈를 잘라냈다.
정말로 왼손과 오른손에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보통은 양손잡이라고 해도 주로 쓰는 손과 보조로 쓰는 손의 정밀함이 다르기 마련이거늘…….
준후는 양손의 수준이 같아 보였다.
“그…… 그래. 자리는 안 바꿔도 되겠다. 수술 과정은 따로 설명 안 해도 되겠지?”
“네. 선생님.”
“그럼 시작하자.”
구현은 항생제와 식염수를 섞은 액체가 들어 있는 분무기를 내경동맥에 뿌렸다.
칙! 칙! 칙!
혈관을 촉촉하게 만들어 혈관의 추가 손상을 막는 처치였다.
이어서 혈관 겸자로 내경동맥의 위아래를 잠갔다.
딸칵!
딸칵!
이는 혈관을 갈랐을 때 출혈이 계속되는 것을 막아주는 처치였다.
“15번 주세요.”
“네. 선생님.”
소독 간호사에게 받은 메스를 왼손에 쥐고 준후는 지그시 내경동맥을 내려다보았다.
스승의 비급으로 뇌혈관 질환을 공부한 지 어언 두 달째.
생각보다 일찍 실력을 시험해 볼 기회가 찾아왔다.
두려움, 떨림, 초조.
그런 감정들은 준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무림에서 준후는 전장에서 수도 없이 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경험했다.
즉, 죽음과 죽음의 위기에 이미 면역이 된 상태였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지금의 준후를 만들어 준 숨은 공신이기도 했다.
준후가 아무리 피지컬이 좋아도.
새가슴이었다면 외과의가 되지 못했을 테니까.
“경동맥 내막 절제술, 시작하겠습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메스가 내경동맥으로 진격했다.
무영등 빛을 반사하면서 번뜩이는 광채를 내뿜는 메스.
혈관을 세로로 가르는 준후 손목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스테이크를 써는 것처럼 사소해 보이기도 했다.
월풍검법 제4초식, 풍운월로.
쾌속과 정교함에 이치를 두고 상대의 머리를 수직으로 내리긋는 검법이 메스를 통해 펼쳐지고 있었다.
서걱!
준후가 절묘하게 힘 조절을 하면서.
손목의 미동을 잡으니.
혈관이 스르륵 반으로 갈라졌다.
절개창은 완벽한 수직이었으며 길이는 정확히 3센티미터에 수렴했다.
“썩션한다.”
치이이익.
혈관이 갈라지면서 꿀렁꿀렁 새어 나오는 피를 구현이 빨아들였다.
구현은 썩션을 마치고 견인기로 절개창을 좌우로 벌렸다.
“절개창 한번 깔끔하네. 혹시나 혈관을 통째로 갈라 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저는 준후 선생님 손이 워낙 빨라서 절개하는 것도 제대로 못 봤어요.”
“저도요. 손목만 까닥거리시는 줄.”
구현과 소독 간호사 두 명은 준후를 칭찬하기 바빴는데.
준후는 그저 머쓱할 따름이었다.
이 정도로 감탄하기에는 준후가 앞으로 보여줄 것이 너무 많았다.
“눈으로 직접 보니까 죽상(콜레스테롤 등이 뭉친 덩어리)이 훨씬 많이 쌓인 것처럼 보이네요.”
“그러게 말이다. 혈관 내막이 아주 누렇네, 누래. 협착률이 75퍼센트라더니 아주 난리도 아니야.”
“바로 죽상 제거하겠습니다.”
“근데 왜 메스는 아직도 들고 있지?”
구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혈관 내막에 달라붙은 죽상은.
니들홀더와 포셉을 사용해서 포장지를 벗기듯이 세심하게 박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준후 손에는 여전히 메스가 들려 있었다.
“저는 메스로 박리를 해보려고요.”
“메스로? 어떻게?”
“회를 뜨듯이 죽상을 떠보려고요. 그러면 죽상 부스러기가 떨어져서 색전증이 발생하는 것도 막을 수 있으니까요.”
“너 돌았니? 세상에 죽상을 회처럼 뜨는 서전이 어디 있어?”
구현은 어이가 없어서 팔짝 뛰었다. 지금까지 부드러웠던 목소리도 거칠어졌다.
이론상으로 따지면 준후의 처치가 최상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의 영역이었다.
메스를 사용하다가 혈관벽이 손상되면 돌이킬 수 없었다.
빈대를 잡으려다가 초가삼간을 태우는 꼴이었다.
“염병 떨지 말고 손에서 메스 내려놔.”
“딱 한 번, 시도만 해보면 안 될까요? 안 되겠다 싶으면 바로 접겠습니다.”
“이거 완전 돌아이 아니야?”
구현은 씩씩거리다가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진짜 딱 한 번이다. 두 번은 없어.”
“감사합니다, 선생님.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선생님. 말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걸 허락하시면 어떻게 해요?”
구현 곁에 있던 소독 간호사가 노파심에 구현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솔직히 궁금하긴 하잖아요. 진짜로 할 수 있을지.”
“호기심의 대가는 끔찍할 수도 있어요.”
“걱정하시는 건 아는데 그 정도 수습할 능력은 있습니다. 계속 방치할 것도 아닌데요.”
구현이 소독 간호사를 달랬다.
잠시 후 준후가 가로로 눕힌 메스를 혈관으로 가져다 댔다.
스태프 전원이 숨죽이며 준후를 지켜보는 가운데.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천만한 상황.
아무리 생각해도 실패가 당연한 상황.
그러나 이론으로만 생각했던 실제로 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