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제35장 첩첩산중(5)
덜컹!
4층 직원용 휴게실에 도착한 구현은 가장 먼저 달달한 캔 커피부터 뽑아 마셨다.
커피는 목구멍을 넘어갈 때부터 효과를 발휘하는 듯했다.
정신이 들고 사지에 활력이 생겼다.
착각이라도 행복했다.
아침 점심을 거르고 잇달아 두 개의 수술을 집도한 구현이었다.
오죽하면 수술 중간에 손발이 다 떨렸을까.
구현은 지친 몸을 소파에 던졌다.
아예 소파 하나를 다 차지하고 누워버렸다.
먼저 와 있던 타과 레지던트 몇몇이 구현을 힐끔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그저 퍼질러 눕고 싶었다.
하얀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구현은 문득 방금 끝낸 수술 장면이 떠올랐다.
특히 준후가 메스를 사용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은데.
성공하니까 할 말이 없네?
다들 나랑 비슷한 기분이었을까.
준후는 경동맥에 낀 죽상을 메스로 회 뜨듯이 떠버렸다.
칼날이 살짝만 깊게 들어가도 혈관이 찢어질 수 있는 위험천만한 기술을 사용했다.
그래서 당시의 구현은 공포 영화를 감상하듯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다른 스태프들도 준후가 실수하지 않게 쥐 죽은 듯이 침묵을 유지했다.
혈관의 테두리를 따라 원형으로 부드럽게 움직이는 손목.
잔 떨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손가락.
정교한 거리 조절과 힘 조절.
다시 돌이켜 생각해 봐도 예술이었다.
불안해하던 구현마저 어느 순간부터 준후의 손짓에 빠져 버렸다.
아무리 나라도 그런 건 못 따라 해.
아니, 교수님들도 못하겠지.
저런 괴물이 1년 차니까 다들 주목하는 거구나.
구현은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레지던트들과 교수들이 왜 수시로 준후 타령을 했는지.
“선배, 음식 사 왔습니다.”
“오냐.”
편의점 심부름을 시켰던 준후가 휴게실에 복귀했다. 준후 손에 들린 비닐 봉투가 음식으로 빵빵했다.
심부름시킨 카드를 돌려받고.
구현은 준후와 굶주린 배를 채웠다.
문득 컵라면과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졌다.
세미나에 참석한 인원들은 맛있는 걸 먹었을 텐데.
타 병원 교수님들과 인맥도 쌓았을 텐데.
꼬우면 실력을 더 키우는 수밖에 없었다.
교수들의 간택을 받을 만큼.
“서준후.”
“네. 선생님.”
“아까 했던 술기 위험했던 거 알지? 성공했으니까 망정이었지 실패했으면 너나 나나 이거였어.”
구현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알고 있습니다.”
“알면 앞으로 조심해라. 너무 나대지 말고. 나니까 그냥 넘어갔던 거야.”
구현은 준후에게 주의를 주었다.
솔직히 심술이 나서 그랬다.
언젠가 준후가 자신을 추월해 버릴까 봐 겁이 나서 그랬다.
가뜩이나 T.O가 부족한 신경외과 교수 자리를 까마득한 후배한테 뺏길 수는 없었다.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싹을 밟아줄 필요가 있었다.
“Post - O.P(수술 후 오더) 냈어?”
“네. 냈습니다.”
“구라치고 있네. 나랑 같이 수술실 나왔다가 바로 휴게실 가지 않았나?”
“편의점 가면서 입력했는데요?”
“그럼 휴대폰으로 오더를 냈다고?”
구현이 혀를 차며 물었다.
물론 요즘은 휴대폰으로 처방·진단 업무를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엑스레이나 CT, MRI 영상까지 확인 가능했다.
휴대폰에 휴대폰 전용 EMR(전자 처방 시스템)과 PACS(영상전달 시스템)가 깔려 있으니까.
문제는 휴대폰으로 오더를 내리기가 영 까다롭다는 점이었다.
“여기요, 직접 확인해 보세요.”
“……진짜네.”
준후가 내민 휴대폰을 확인한 구현은 할 말을 잃었다.
방금 수술을 끝낸 환자의 수술 후 오더가 입력되어 있었다.
-check vital sign q 1h(활력징후) 한 시간마다 확인
-NPO, till next order(다음 오더까지 금식)
-ABR, head elevation 30도(환자의 절대적인 안정, 머리 30도 거상)
-check I/O, U/O q 1h(섭취 배설량 및 소변 배설량 1시간마다 확인)
-IMT, CBC, ABGA, CRP, ECG(경동맥 초음파를 비롯한 각종 검사)
…….
“이걸 휴대폰으로 다 입력했어?”
“네. 제가 손이 빨라서요.”
“대체 얼마나 빠르길래?”
“직접 보여드릴게요. 대충 이 정도입니다.”
휴대폰을 돌려받은 준후가 휴대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토도도독.
토도도독.
속도가 미쳤다.
손가락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심지어 구현이 컴퓨터 키보드를 쓰는 것보다 훨씬 빨라 보였다.
손이 저렇게 빠르니까 휴대폰으로 오더를 냈구나.
속도가 느리고 답답하고 불편해서 보통은 휴대폰으로 오더 입력 안 하는데…….
준후의 기강을 잡으려던 구현은 그저 쓰게 웃고 말았다. 기강을 잡힌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 * *
터벅. 터벅.
신경외과 병동으로 복귀하는 준후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방금 막 어시스트를 끝낸 경동맥 내막 절제술이 흡족했기 때문이다.
특히 죽상을 회 뜨듯이 떠버린 본인의 메스 솜씨가 뿌듯했다.
죽상을 회 뜬다는 발상 자체는 스승 재현의 것이었다.
기존 방식으로 죽상을 제거하면.
죽상 찌꺼기가 혈관을 타고 이동하다가 주요 혈관을 막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재현은 이론을 만들고도.
이를 실전에서 펼치지는 못했다.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가 워낙 컸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 이론을 준후가 오늘 직접 성공시켰다.
완벽하고 깔끔하게.
무림에서 검객이었던 덕분일까.
적어도 메스를 사용하는 처치라면 준후는 전 세계에 어떤 외과의도 자신을 따라오지 못할 거라고 자신했다.
앞으로도 검법이나 무공을 활용한 수술은 무궁무진하겠지.
빨리 집도의가 됐으면 좋겠다.
그럼 다른 사람 눈치 볼 필요 없이 내 식대로 수술할 수 있을 테니까.
달콤한 미래를 상상하며 도착한 당직실은 텅 비어 있었다.
민경이나 경수.
둘 중 한 명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당직 근무자는 낮이나 밤이나 응급콜을 대기하는 게 원칙이었다.
띠리리링~
때마침 울리는 전화기.
준후는 책상으로 이동해 전화를 받았다.
“네. 신경외과 당직실입니다.”
-선생님.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으세요? 벌써 세 번째인데.
익숙한 목소리의 짜증 섞인 목소리의 주인공은 병동 간호사 정예인이었다.
“저도 수술 어시스트 갔다가 방금 돌아왔어요. 그렇게 몰아붙이시면 억울합니다.”
-아…… 죄송해요. 통화가 계속 안 되길래.
“지금 세미나 때문에 인원이 부족하거든요. 오늘은 자주 이럴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607호실 서동현 환자 노티 좀 드리려고 전화 드렸어요.
“무슨 일인데요?”
-그게…….
예인의 설명이 이어졌다.
동현은 당장 내일 뇌동맥류를 예방하기 위한 코일 색전술이 예정된 환자였다.
문제는 환자가 두 시간 전부터 두통, 어지러움, 구토를 호소했다는 것이다.
혈압을 확인해 봤더니.
180mmHg/120mmHg으로 고혈압 소견을 보였다고 한다.
“가만 보자. 나이는 60대시고, 지병으로 고혈압이 있는 것도 아니네요?”
-네. 그래서 더 걱정이에요.
“으음…….”
준후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수술 전 혈압 관리는 필수인데 그 원인과 치료법이 확 떠오르지 않았다.
무언가 알 듯 말 듯.
안개에 휩싸인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지.’
파바바밧!
준후는 내공이 담긴 손가락으로 자신의 귀 뒤쪽을 점혈했다.
물결의 파동을 띤 내공이 머리를 통과해 해마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순간 스승의 비급 내용이 번뜩 떠올랐다.
“일단 환자가 지금 맞는 수액에 nicardipine IV(정맥)로 5㎍ 천천히 주입해 주시고요. 트라마돌 1T도 경구로 복용시키세요.”
-…….
“혈압을 지금보다 20은 더 내려야 하거든요? 혈압도 1시간에 한 번씩 체크해 주시고요.”
-근데 환자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죠?
“제가 봤을 때는 고혈압 응급증 같네요.”
-고혈압 응급증이요?
“네. 뇌동맥류 때문에 급성으로 중추신경 장애가 와서 생기는 고혈압이에요. 보통은 약물 처방으로 잡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마시고요.”
-처방 입력하면 바로 처치할게요. 감사합니다.
“네. 선생님도 수고하세요.”
준후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처방을 내린 다음 한숨을 돌렸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서 치이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 세미나 때문에 인원이 부족해서 생긴 현상이었다.
신경외과가 이 정도면 흉부외과는 대체 얼마나 힘든 거지?
심지어 흉부외과는 1년 차가 아영이밖에 없는데.
준후는 문득 아영을 떠올렸다.
오늘 당직 근무를 서는 아영에게 찾아갈 스케줄과 당장 며칠 뒤로 다가온 데이트 약속도 떠올렸다.
연애를 시작한 후로.
준후는 때때로 자연스럽게 아영을 생각했다.
사람에게 사람이 스며든다는 것.
사람에게 사랑이 스며든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드르르륵.
때마침 당직실 문이 열리며 민경이 안으로 들어왔다.
“선배, 어디 갔다 오셨어요? 자리 비우시면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나도 아는데 어쩔 수가 없었어.”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이유가 뭔지 여쭤보는 거예요.”
“넌 몰라도 돼. 평생 알 수도 없고.”
민경이 부끄러워하며 준후 옆 책상에 앉았는데.
그 반응에서 준후는 말 못 할 이유를 눈치챘다. 민경은 마법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방금 고혈압성 응급증 오더 냈다며?”
“선배가 그건 어떻게 아세요?”
“스테이션 지나가는데 간호사가 물어보더라. 준후, 네가 내린 처방이 맞냐고. 확인해 보니까 맞아서 맞다고 했어.”
민경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오더 한번 똑 부러지더라. 딱히 가르쳐 준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제 짬밥이면 그 정도는 알아서 척척 해야죠.”
“얼씨구. 누가 들으면 최소 3년 차는 되는 줄 알겠네.”
“그건 그렇고 선배.”
준후는 살가운 미소를 띠며 민경의 등 뒤로 다가갔다.
민경의 어깨를 살살 주물러주었다.
평소에도 추궁과혈 마사지를 자주해 주었기에 민경은 딱히 준후의 스킨십에 거부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뭐야? 그 의뭉스러운 표정은? 뭐 부탁할 거 있어?”
“귀신이시네. 이번 주 금요일에 선배 오프잖아요.”
“그렇지.”
“저랑 오프 바꿔주시면 안 돼요? 저 그날 아영이랑 데이트 약속이 잡혀서요.”
준후는 힐끔 달력을 쳐다보며 부탁했다.
“으…… 갑자기 염장 지르네.”
“선배의 바다같이 넓은 마음에 소금 몇 꼬집 들어간다고 변화나 있겠어요?”
“이럴 때만 청산유수지.”
“바꿔주실 거죠?”
“마사지권, 10장 정도 끊어주면.”
“10장이 뭡니까? 20장은 끊어 드릴게요.”
“오케이. 콜!”
민경이 흔쾌히 준후의 제안을 수락했다.
민경에게 5분 가까이 마사지를 해주고 준후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경수는 어디 갔어요?”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아까부터 경수가 보이지 않아 찜찜했다.
이 시간에는 수술 스케줄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한 15분 전쯤에 응급실 내려갔어. 후딱 진료하면 끝나는 환자인데 의외로 오래 걸리네?”
-방송실에서 알려드립니다. 응급실에서 코드 퍼플 발생. 코드 퍼플 발생. 스태프들과 환자분들은 응급실 방문을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처럼 병원 전체 방송이 퍼졌다.
이를 듣고 준후와 민경은 부엉이처럼 동그래진 눈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얼빠진 목소리로 동시에 외쳤다.
“코드 퍼플?”
“코드 퍼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