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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191화 (191/424)

191화

제36장 할 수 있어(1)

방송을 들은 순간, 준후는 귀를 의심했다.

코드 퍼플이란 외래, 응급실, 병동 등에서 환자나 보호자가 병원 스태프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할 때 발생하는 코드였다.

하지만 코드 퍼플이 실제로 발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병원 방문객이 많은 만큼.

진상 환자나 진상 보호자는 필연적으로 발생했다.

이로 인한 욕설, 위협, 폭력 등등은 덤이었다.

그들과의 다툼을 만약 방송으로 내보내야 한다면 코드 퍼플은 하루 종일 발생해야 할 것이다.

“나 수련하면서 코드 퍼플은 처음이야.”

“저도요. 제가 응급실에서 조폭들하고 시비 붙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방송은 안 했거든요.”

“대체 무슨 일이 터졌길래 그러지? 응급실 동기한테 전화해서 알아볼까?”

민경이 책상에 놓인 전화기 쪽으로 이동했다.

준후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번뜩 누군가를 떠올렸다.

바로 경수였다.

응급실 진료를 보러 갔던 경수의 복귀가 늦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코드 퍼플이 경수 때문에 발생한 건 아닐까?

생각이 그쯤 미치자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불안과 걱정이 피어올랐다.

“선배. 저 응급실 좀 다녀올게요.”

“불구경 다음이 싸움 구경이라지만 너무한 거 아니야? 세미나 때문에 사람도 없는데.”

“그런 거 아니에요. 경수가 휘말렸나 알아보려고요.”

“에이, 설마. 그렇게 재수가 없으려고. 진료 끝난 다음에 잠깐 쉬거나 중환자실 간 거 아닐까?”

“예감이 안 좋아서요.”

준후는 콜폰으로 경수에게 전화를 해봤지만 경수는 받지 않았다.

신호음만 지루하게 반복될 따름이었다.

그쯤에서는 민경도 응급실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아보고 있었다.

딸칵!

잠시 후 수화기를 내려놓는 민경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진짜네. 경수가 조현병 환자한테 인질로 잡혀 있대.”

“아무래도 응급실에 가야겠어요.”

“마음은 알겠는데 그냥 가만히 있어. 준후 네가 간다고 해서 달라질 거 없어.”

“있을지도 모르죠.”

민경과 말씨름하는 시간도 아까워서 준후는 곧장 당직실을 빠져나갔다.

* * *

비상구로 이동해 겅중겅중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무뚝뚝하고 사교성이 없었지만.

그런데도 경수는 준후의 하나뿐인 동기였다. 위험에 처한 동기를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동료를 잃는 건 무림에서도 충분히 하지 않았던가.

현대에서도 같은 비극이 반복되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허겁지겁 도착한 응급실은 어수선했다. 코드 퍼플로 업무가 마비되어 있었다.

스태프들과 환자·보호자들은 인질극이 벌어진 현장을 바라보며 다리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저쪽인가?’

시선을 따라 준후가 도착한 곳은 경증 환자를 진료하는 E구역이었다.

E구역 서쪽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응급실 스태프 몇 명과 무장한 가드들이 부채꼴로 포위망을 형성 중이었다.

“가까이 오시면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체구 좋은 가드 한 명이 두 팔로 준후의 접근을 저지했다.

“제 동기가 인질로 잡혀 있어요. 어떤 상황인지 알아는 봐야 할 것 아닙니까?”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물러서 계세요.”

“알아서 한다고 해봤자 가만히 서 있는 것밖에 더 있어요?”

“지금 환자를 자극하면 안 좋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가만히 계세요.”

가드와 일부러 실랑이하면서.

준후는 군중들 틈으로 난 공간을 통해 현장을 확인했다.

환자, 아니, 인질범은 벽에 등을 찰싹 붙이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경수의 허리를 끌어안았고 드레싱 가위를 쥔 다른 손을 경수의 목에 대고 있었다.

만약 인질범이 가위로 경수의 경동맥을 싹뚝 잘라낸다면?

상상이 그쯤 미치자 머리카락이 쭈뼛 솟아올랐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죠?”

“15분 전쯤에 진료를 보던 환자가 카트에 있던 가위를 손에 쥐고 선생님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

“그 뒤로 계속 대치 상황이 이어지고 있고요.”

“후속 처치는 없습니까?”

“일단 경찰이 오는 중이고요.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도 응급실로 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가드의 설명을 듣고 준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경찰이 도착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

경찰도 가드처럼 무기력하게 현장을 지키고 있는 게 다일 것이다.

경찰이 인질범에게 접근하는 순간.

인질범은 경수를 희생양으로 삼을 테니까.

그럼 정신건강의학의가 도착한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준후는 그 부분도 회의적이었다.

누군가를 인질로 잡을 만큼 감정이 격한 인질범이었다. 그가 정신건강의학의의 대화 상담 치료를 순순히 받아들일지 의문이었다.

지지부진한 대치 상황 속에서.

지치고 짜증 난 인질범이 결국 자포자기식으로 경수를 해친다.

준후는 그 그림 외에 다른 그림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조현병 환자의 범죄율은 오히려 일반인보다 적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하지만 일단 범죄를 저지르면 중범죄일 확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너무 위험해 보여.

시간을 끌면 끌수록 상황이 악화될 것 같은데…….

준후는 입술을 깨물며 현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인질범이 든 가위가 경수의 경동맥을 수차례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인질범의 심리 상태도 무척 불안정해 보였다.

“이 씹X끼들. 너희도 이 의사 새끼랑 한패지? 그렇지? 다 날 잡으러 왔잖아.”

“…….”

“난 다 알고 있어. 너희들이 며칠 전부터 날 감시해 왔다는 걸. 빨리 대답해!”

“그런 적 없습니다.”

인질범의 성난 질문에 한 가드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지독한 놈들! 당연히 발뺌하겠지. 너희들은 그런 놈들이니까. 하지만 말이야. 이 의사 놈이 죽으면 어떨까?”

“…….”

“그럼 너희들도 더 이상 날 연구하거나 감시하지 못할 거야. 그렇지?”

인질범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조현병 환자라고 해서 다 저 사람처럼 난폭하고 주변에 해를 끼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 사람은 특히 문제가 있어 보였다.

피해망상이 심해도 너무 심했다.

어쩌면 자신이 무림에서 상대한 마인(魔人)들 중에는 천성이 악한 사람이 아니라 조현병을 앓고 있었던 사람도 있었겠구나.

준후는 문득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현대로 돌아오니 무림에서의 경험이 더 잘 보인다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지금부터는 준후의 활약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 난동은 해결할 사람은 준후뿐이었다.

“어허. 가까이 오지 마시라니까요.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를 들으신 겁니까? 경찰하고 정신과 선생님이 올 때까지 기다리시라고요.”

문답무용.

퍽!

준후는 손날로 번개처럼 가드의 뒷목을 가격했다.

허물어지는 가드를 끌어안은 뒤 준후는 가장 가까이 있는 침상에 가드를 눕혔다.

다들 인질극에 주목하고 있었기에 준후의 행동을 눈여겨 본 사람은 없었다.

설령 봤다고 해도.

준후의 손속이 워낙 빨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가드가 갑자기 쓰러지고 준후가 가드를 부축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으리라.

현장에 복귀한 준후는 다른 가드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최전선에 섰다.

“저…… 저 선생님 뭐야? 왜 저기에 있어? 누가 안 말렸어?”

“진태 자식은 뭐 하고 있었던 거야?”

“빨리 잡아 와. 괜히 환자만 자극하겠어.”

“선생님 나오세요. 그러다가 선생님까지 다칩니다.”

틈을 허용한 가드들이 뒤늦게 준후를 잡아 오려고 했지만 그 누구도 준후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오히려 겁먹은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기 바빴다.

준후가 내공을 투기(鬪氣)로 형상화해서 몸 바깥으로 뿜어냈기 때문이다.

“넌 또 뭐야?”

인질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준후를 응시했다.

“가운을 걸친 걸 보니 너도 날 연구하기 위해 온 연구원이군. 동료를 구하러 왔나?”

“진정하고 가위부터 내려놓으세요. 이렇게 해봐야 환자분에게 도움 될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건 네 생각이지.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

콰과과광!

인질범의 발길질에 인질범 옆에 있던 드레싱 카트가 쓰러졌다. 카트 위에 있던 처치 도구들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러고도 분이 덜 풀렸는지.

인질범은 거친 손길로 연신 허공에 가위질을 해댔다.

그럴 때마다 인질로 잡힌 경수의 얼굴은 퍼렇게 질렸다.

경수를 어떻게 구해야 할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정안이었지만 정안은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일단 환자와 아이컨택을 할 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설령 아이컨택이 가능한들.

조현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정안이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정안은 내공으로 증폭한 정념(正念)을 발산해서 상대의 심리를 올바르게 이끄는 무공인데.

피해망상을 앓고 있는 인질범이 정념에 반응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가장 좋은 건 보법으로 접근해서.

인질범을 단숨에 제압하는 것이었지만 인질범이 드레싱 카트를 발로 차면서 바닥에 장해물이 널브러져 있었다.

장해물을 잘못 밟아서 넘어지면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고 장해물을 피해서 접근하자니 속도가 둔해질 것 같았고.

“힘들게 머리 굴릴 필요 없어. 어차피 이놈도 죽고 너도 죽을 거야.”

“뒷감당은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뒷감당? 그딴 건 필요 없어. 난 너희들의 감시만 피할 수 있으면 그만이야. 설마 감옥에서도 나를 감시할 수는 없겠지?”

스으으윽.

인질범이 기어코 일을 저질렀다.

가윗날로 경수의 턱 아랫부분을 슬쩍 그은 것이다.

벌어진 상처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이러다가 정말 사람이 죽겠어요! 어떻게 뭐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겨…… 경찰은 멀었어요?”

인질범의 돌발 행동으로 현장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상황을 관망하던 가드와 스태프들의 얼굴에 낭패라는 기색이 서렸다.

환자가 안정되기를 기다리고.

경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정신건강의학의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사태는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지고 있었다.

한편 진퇴양난인 상황에서.

준후는 가까스로 돌파구를 발견했다.

인질범의 손아귀에서 경수를 안전하게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었다.

이번에도 해답은 무공이었다.

* * *

딱. 딱. 딱. 딱.

경수는 자신도 모르게 윗니와 아랫니를 부딪쳤다.

가윗날이 아래턱을 스친 순간 화끈한 통증이 일어났다.

하지만 통증보다 두려움이 더 깊었다.

이제 인질범이 언제고 자신을 해칠 수 있겠다는 절망감이 밀려왔다.

주변에 사람이 이렇게 많아도 무기력하구나.

아무도 날 구해줄 수 없구나.

마지막으로 발버둥이라도 쳐봐야 하나?

반항을 하려다가 경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반쯤 벌어진 환자의 가위가 자신의 경동맥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이 상태에서 저항하면 혈관이 잘려나갈 것 같았다.

목에서 피가 솟구칠 상상을 하니 갑자기 오금이 저려 왔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어졌다.

공포에 떨던 경수의 시선이 문득 준후에게 머물렀다.

가드와 스태프들이 잔뜩 겁에 질린 반면 준후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근데 저 녀석은 대체 왜 저러고 있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거야?

아니면 심장이 두 개인 거야?

인질범이 경수를 해친다면 다음 타겟은 누가 뭐래도 준후였다.

그런데도 준후는 현장 최전선에서 인질범을 마주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자기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행동이었다.

“가. 가라고. 썩 꺼지라고. 너까지 뒈지고 싶어?”

경수는 인질범을 자극하기 않기 위해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준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저 머저리 새끼.

낄 때 안 낄 때도 구분할 줄 모르나?

지가 이 상황에서 뭘 할 수 있다고.

“넌 닥치고 있어. 뭘 잘했다고 입을 놀려?”

인질범이 격해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 다 지긋지긋해. 내 손으로 끝장낼 거야. 감시가 없는 세상으로 갈 거라고.”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경수는 자포자기한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금 그대로. 움직이지 마.

순간 착각인지 몰라도 준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린 것 같았다.

동시에 벌어진 놀라운 기적.

“아아아악!”

쨍그랑!

인질범이 별안간 비명을 지르며 손에 쥐고 있던 가위를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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