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제36장 할 수 있어(3)
대화에 끼어든 사람은 운재였다.
준후의 의대 동기이자 응급의학과 1년 차 레지던트였다.
“운재야,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정도는 지키자.”
준후가 아이를 달래듯이 말했다.
운재의 화법이 너무 공격적이었다. 이는 형돈과 조현병 환자를 깡그리 무시하고 비하하는 태도였다.
“너희 과 동기가 죽을 뻔했다고. 그런 소리가 나오니?”
“나도 동기가 인질로 잡혀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아. 하지만 저 환자 한 명으로 다른 조현병 환자까지 일반화하면 안 돼.”
“하여간 일만 잘하지, 물러 터졌다니까.”
운재가 쯧쯧 혀를 찼다.
“내가 더 불쾌한 건 뭔지 알아? 아까 인질극 벌인 환자 말이다. 어차피 심신미약으로 풀려날 거라는 거다.”
“…….”
“그놈의 심신미약은 무슨 무적의 방패야.”
“그분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잠자코 있던 형돈이 대화에 참여했다. 형돈은 할 말이 무척 많아 보였다.
“하루 종일 환청과 환각이 들리는데, 무슨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약이라도 잘 쳐드시든가.”
“그쪽 선생님 생각처럼 조현병 치료는 간단하지 않아요. 약만 먹어서 해결될 거면 왜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겠어요.”
“…….”
“그런 논리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네가 게을러서 돈을 못 버니 열심히 돈 벌라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할 줄 알았어요.”
운재가 피식 웃으며 반박에 나섰다.
점점 격정적으로 변해가는 두 사람 간의 대화.
잠시 준후는 대화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다. 조현병과 더불어 치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질병이 안 그렇겠냐마는.
치매와 조현병은 특히 환자는 물론이고 가족과 친지, 주변 사람까지 말려 죽이는 질환이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에 큰 문제가 있다.
언제 어떤 사고를 터뜨릴지 모른다, 주변의 계속적이고 세심한 관심이 필요하다 등등.
만약 부모님이 치매나 조현병을 앓고 있다면 준후는 온전하게 의사 생활에 집중을 못 할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왜 이렇게 말이 거친 줄 압니까? 우리 집 아래 조현병 환자가 살 거든요?”
운재가 이를 갈며 말을 계속했다.
“근데 허구한 날 찾아와서 층간 소음이 난다고 지X을 떱니다. 오밤중에도 찾아와서 부모님을 괴롭힌다고요.”
“…….”
“그러니 제가 조현병 환자를 예쁘게 보겠어요?”
“고생하시는 건 애석하지만 얌전히 잘 치료받으시는 분도 많아요.”
“제 눈에 그런 사람들은 안 보이던데요?”
“잘 치료 중이니까요.”
“아휴. 됐습니다. 계속 떠들어봐야 입만 아프지. 준후 네 생각은 어때?”
운재가 준후를 바라보며 의견을 물었다.
“넌 역시 곧 죽어도 환자 편이냐?”
운재의 질문에 준후는 쉬이 답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당연히 형돈의 손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경수가 인질로 잡힌 사건도 있고 운재의 속내를 듣고 보니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가해자에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치자.
하지만 그렇다면 피해자는 어쩌란 말인가.
피해자의 고통은 대체 누가 책임져준단 말인가.
질문에 갈등하면서.
준후는 무림에서부터 이어져 온 정(正)과 사(邪)에 대해 생각했다.
무엇이 올바른 것이고.
무엇이 사악한 것인지를.
준후는 어느새 무림맹주 천태룡과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서 교관. 엄밀히 말하면 정과 사의 구분은 없다네.
-맹주님, 정파의 대들보로서 너무 위험한 발언 아닙니까?
-그래서 이렇게 은밀한 장소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 아닌가. 자네, 현경의 경지에 오르고 싶다고 했지?
-무인(武人)이라면 누군들 그 고귀한 경지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정을 버리고 사도 버리게. 그럼 그 자리에 새로운 깨달음이 찾아올 걸세.
맹주의 가르침은 파격적이었다.
그래서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조현병으로 촉발된 사고방식을 정리하면서 새로운 경지에 다다를 단서를 얻을지도 모르겠다.
준후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네. 결론이 나면 그때 대답해 줄게.”
* * *
“말도 없이 먼저 와 있었어?”
신경외과 당직실에 복귀한 준후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먼저 사라졌던 경수는 당직실에 얌전히 있었다.
경수는 책상에 앉아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환자에게 인질로 잡혔으니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그냥 응급실에 있고 싶지 않았어.”
“잘 생각했다. 물이라도 한잔해.”
준후는 냉장고에서 꺼낸 생수병을 경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경수와 눈이 마주쳤을 때 정안을 사용했다.
많이 놀랐지?
하지만 괜찮아. 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설령 벌어진다고 해도 내가 반드시 널 지켜줄 거야.
누구도 널 해칠 수 없어.
그러니까 안심해.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이 눈동자에 머물렀고.
눈동자에 담긴 내공은 정념(正念)과 함께 경수를 향해 발산되었다.
한순간이지만 경수의 눈동자도 준후의 눈동자처럼 짙은 쪽빛을 띠었다.
“고맙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편해진 기분이야.”
경수가 준후가 내민 물병을 받아들고 물을 마셨다.
똑. 똑. 똑.
때마침 들려오는 노크 소리.
들어오라고 하자 스테이션 간호사 몇몇이 당직실로 들어왔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걱정돼서 와 봤어요.”
“저런, 턱을 다치셨네요. 많이 아프시죠?”
간호사들이 경수를 걱정했다.
응급실 소식을 듣고 위로를 해주기 위해 찾아온 모양이었다.
간호사의 애정 어린 질문들에 경수는 곧잘 대답을 했다
“서 선생님,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네요? 많이 힘들어하실 줄 알았는데.”
대화가 끝나고 당직실을 나가는 간호사 중 한 명이 준후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준후는 배웅 차 간호사들 곁에 있는 상황이었다.
“경수도 은근히 강철 멘탈이거든요. 너무 걱정 마세요.”
“그래도 어디 보통 큰일이 벌어졌어야죠. 저였으면 근무고 뭐고 바로 집에 갔을 것 같은데.”
“제가 잘 보살피면 문제없을 겁니다.”
“그럼 선생님만 믿을게요. 파이팅.”
간호사들이 떠난 후 준후는 다시 경수와 마주 앉았다.
근래 새롭게 터득한 정안의 위력은 강력했다.
방금 막 인질극을 겪고도 경수가 평정심을 유지하게 만들어줄 정도였으니까.
아마 앞으로도 정안에 신세질 일이 많아지리라.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정식으로 못했네. 고맙다. 네 덕분에 그 지옥에서 벗어났어.”
“뭐, 운이 좋았지. 환자가 갑자기 가위를 떨어뜨렸으니까.”
“고맙긴 한데 너무 위험하기도 했어. 너까지 다쳤으면 어쩔 뻔했는데?”
정안으로 마음 관리가 됐기 때문일까.
경수의 말투가 평소처럼 냉소적으로 변했다.
“네 걱정에 물불 안 가리게 되더라고.”
“이제는 제발 물불 좀 가려라. 다른 사람을 돕더라도 네 몸은 신경 써야지.”
“지금 배은망덕하게 생명의 은인을 몰아붙이는 거냐?”
“곧 죽어도 할 말은 해야겠으니까.”
“잘 났어. 정말.”
“당연하지. 너만큼은 아니어도 나도 꽤 잘난 편이거든.”
경수가 뜸을 들이다가 화제를 바꿨다. 준후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 솔직히 너 별로 안 좋아했다.”
“알아. 평소에도 티를 팍팍 냈잖아.”
“시기나 질투 같은 건 아니었어. 애초에 실력에 관한 부분이라면 널 따라잡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건 다른 선배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
“그보다 난 네가 위선자라고 생각했어.”
“위선자?”
뜻밖의 단어에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동안 경수가 열등감 때문에 자신을 싫어한다고 철석같이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고?
“그래. 위선자. 나는 순수한 의도로 사람을 돕는다는 말을 믿지 않아. 뭐랄까, 선행도 비즈니스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거든.”
“…….”
“그래서 너를 볼 때마다 구역질이 났어. 너는 항상 환자를 위한다는 말을 달고 살잖아?”
“그거야 그렇지. 실제 마음가짐도 그렇고.”
준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경수의 말처럼 선행을 비즈니스처럼 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준후는 절대 아니었다.
준후가 외과의가 된 것은 무림에서 생활할 당시 다치고 죽어가는 동료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뼈저린 무력감을 느껴서였다.
그 무력감을 현대에서는 떨쳐버리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준후의 과거를 모르는 경수라면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제3자의 관점에서 봤을 때.
준후의 환자·보호자 사랑은 충분히 지나치고 과장되어 보일 수 있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냐?”
“변함없어. 단지 예외가 생겼을 뿐이지. 서준후라는 예외가.”
“나만 특별 대접을 해주시겠다? 이거 영광이네.”
“넌 특별한 게 맞으니까. 내가 너였으면 인질극에 껴들지 않았을 거야. 애초에 현장에도 없었겠지.”
“…….”
“근데 넌 나를 구하기 위해 네 몸을 던졌어. 평소 너한테 틱틱거리기만 했던 나를 위해서. 돌이켜보니까 솔직히 좀 감동이더라.”
경수가 준후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진심을 드러내는 게 쑥스러웠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준후는 경수가 자신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위험천만했던 인질극이 의외로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안 그래도 하나뿐인 동기와 사이가 좋지 않아 불편했는데 준후는 일이 잘 풀렸다 싶었다.
준후가 제아무리 무공과 내공을 보유했더라도.
응급 질환.
고난이도의 수술.
환자 관리 등을 혼자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래서 믿음직하고 실력 있는 동료의 존재가 필수였는데 경수가 드디어 동료로 성큼 다가와 주었다.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경수는 준후가 알고 또 경험한 레지던트 1년 차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특히 경수 특유의 냉소적인 성격은 환자에게 너무 뜨거운 준후의 단점을 보완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좋았어.
기왕 이렇게 된 거 한 걸음 더 나아가 볼까.
준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 말 못 하는 거 빼고 다 말해줄게.”
“미리 철벽 치는 거?”
“그럴지도?”
“조금 깊은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데. 넌 왜 다른 사람을 그렇게 못 믿어?”
“…….”
“사실 나한테만 쌀쌀맞게 구는 거 아니잖아. 선배들이나 후배들한테도 그러잖아. 무슨 이유가 있어?”
준후는 알고 싶었다.
경수가 주변 사람을 차갑게 대하며 자꾸 거리를 두려고 하는 이유를.
즉, 경수의 뿌리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뭐, 기왕 판이 다 벌어졌으니 어쩔 수 없나? 사실 나는…….”
경수가 속마음을 고백하기 직전.
띠리리링.
응급실 전화기가 눈치 없이 울어댔다.
하필 이 중요한 순간에…….
준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네. 신경외과 당직실입니다.”
-준후니?
민경의 목소리였다.
“네, 선배. 지금 어디세요?”
-응급실. 네가 올라갈 때 갈렸나 봐. 경수 상태는 좀 어때?
“생각보다 멀쩡합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턱을 다쳤다고 하던데?
“제가 잘 봉합해서 그것도 문제없어요.”
-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근데 또 일이 터졌어. 오늘 일진 진짜 엉망이네.
민경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응급 수술 스케줄 잡아 봐.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