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제36장 할 수 있어(4)
응급실의 한 침상.
준후와 통화를 하면서 민경은 환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마에 잡힌 자글자글한 주름이 사라질 줄 몰랐다.
환자의 상태는 심각했다.
오토바이를 타던 중 신호 위반 차량에 치였는데 오는 길에 구급차에서 이미 CPR을 했다고 들었다.
각종 검사 결과.
어깨뼈 골절, 갈비뼈 골절, 옆구리의 심한 열상(찢어진 상처).
무엇보다 두개골의 함몰 골절과 SDH(subdural hemorrhage, 경막하 출혈) 소견이 심각했다.
그나마 환자가 풀 페이스 헬멧을 착용했기에 망정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환자는 이미 뇌사 또는 식물인간이 됐을지도 몰랐다.
준후의 소식을 기다리며.
민경은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환자가 위태로웠기에 침상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환자의 머리와 가슴에 감긴 피로 물든 붕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수액.
불안정한 수치와 심장 리듬을 보여주는 환자 감시 장치.
환자의 곁에서 서서 환자를 노심초사 지켜보는 보호자까지.
민경은 갈수록 초조해졌다.
시간은 결코 민경의 편이 아니었다.
-선배, 수술 스케줄 알아봤는데요.
“응. 그래서?”
- 지금 수술할 사람이 없는데요? 세미나 때문에 도저히 인원인 안 나와요.
준후의 설명에 민경은 낭패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왠지 이럴 것 같더라니…….
세미나로 의국 스태프 3분의 1이 빠졌다.
교수, 펠로우, 레지던트.
주요 스태프들의 씨가 말랐다.
현 사태는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럴 때마다 민경은 원망스러웠다.
타 과에 비해 스태프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신경외과의 현실이.
-보니까 선배도 30분 뒤에 수술 잡혀 있네요?
“맞아. 근데 내 스케줄이 비어 있어도 암울한 건 마찬가지야. 이 환자 집도하려면 레지던트 3년 차 이상이 필요하니까.”
-혹시 몰라서 외상외과도 전화해 봤거든요?
“그쪽도 안 된다고 하지?”
-네. 공사장에서 추락한 인부들 수술하느라 저희를 도와줄 여력이 안 된대요.
“사면초가네. 당장 수술 들어가도 모자랄 판국에.”
집도의가 없어서.
수술을 할 수 없다면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환자를 타 병원으로 전원시키는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뇌수술이 가능한 가장 가까운 병원이 40분 거리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송에만 40분.
그쪽 병원에서 수술 들어가는데 추가로 10-20분이 걸린다고 하면 환자는 도합 1시간 가까이 방치되고 만다.
환자가 1시간을 더 버틸까.
분명 불가능할 것이다.
브레인 CT로 확인한 혈종(피가 굳어서 딱딱하게 뭉친 것)은 퍽 거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지고 더 단단해질 것이다.
뇌탈출증이 발생하면서 환자의 뇌는 돌이킬 수 없는 영구적인 손상을 받을 것이다.
-선배,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건데요.
“뭔데?”
-이 환자 제가 집도할게요.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여요.
“서준후, 돌았어?”
민경이 앙칼지게 되물었다.
이게 한동안 얌전하다가 또 선 넘네?
“1년 차가 무슨 경막 하 출혈 수술을 한다고 난리야? 솔직히 네가 잘난 건 아는데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안 그러면 전원시키실 거잖아요.
“전원 말고는 답이 없으니까.”
-전원시키면 환자가 어떻게 될지도 아시잖아요.
준후의 지적에 민경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혀 침묵을 지켰다.
“야, 누구는 전원시키고 싶어서 시키는 줄 알아? 수술할 사람이 없는데 어쩌라고?”
-그래서 제가 수술을 한다는 겁니다.
잔뜩 흥분한 민경과 달리 준후의 목소리는 차분하기만 했다.
마치 본인이 수술하면 환자가 살아날 수 있다는 것처럼.
얘는 어떻게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이런 황당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걸까.
민경은 문득 준후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제가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이 지방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이 병원 저 병원을 떠돌다가 결국 수술을 못 받고 뇌사로 세상을 떠났죠.
“…….”
-저보고 그 꼴을 또 보라고요? 저는 절대 그렇게 못 합니다.
“건강 팔찌를 선물로 준 사람 이야기지?”
-네.
준후가 신경외과를 택했던 사연을 떠올리면서 민경은 준후의 마음을 이해했다.
준후에게 T.A(교통사고) 환자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네 심정은 알겠는데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
“네가 수술을 하게 되면 일단 수련 지침을 어기는 거고. 나도 동반해서 책임을 져야 하고.”
-…….
“만약 환자가 수술 중에 목숨이라도 잃게 된다면 병원까지 줄줄이 엮여서 소송에 걸릴 수도 있어. 너무 위험한 도박이라고.”
-아뇨. 전혀 위험하지 않아요. 도박도 아니고요.
“응? 뭐라고?”
-전 반드시 수술에 성공할 겁니다. 이런 날을 대비해서 오래전부터 잠을 줄여가며 수련했으니까요.
“…….”
-선배, 제가 집도하게 해주세요. 그게 환자를 위한 최선의 길입니다.
준후의 비장한 부탁에 민경은 다시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환자를 전원시키면 책임은 피할 수 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안정적인 선택이었다. 단 이 경우, 환자의 회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준후에게 집도를 맡기면 상황이 조금 더 복잡해진다.
준후가 집도에 성공할 경우.
최선의 시나리오가 완성된다.
환자는 무사히 회복될 것이고 결과가 좋으므로 어떻게든 사건을 무마할 수도 있었다.
단, 준후가 집도에 실패하면 그 뒷감당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민경과 준후는 아마 뉴스의 사건 사고란에 얼굴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기사 제목은 도를 넘은 레지던트쯤 될까나…….
“민경아, 정말 허락하려는 거 아니지?”
민경이 갈팡질팡하는데 곁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2년 차 승호가 있었다.
언제부턴가 민경이 통화하는 내용을 엿들은 모양이었다.
“미친 짓 하지 말고 빨리 전원부터 시켜. 서준후, 잘 났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SDH 수술은 오버야.”
“…….”
“어줍지 않게 정의감 부렸다가 피똥 싼다? 제발, 현실적으로 생각하라고.”
승호의 조언에 민경은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후.”
-네. 선배.
“당장 수술 스케줄 잡아. 집도의는 너야. 일단 네가 1시간 먼저 수술 들어가고 나중에 희준 선배가 합류하는 걸로 타협 보자.”
-감사합니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보호자는 내가 어떻게든 설득해 볼게.”
할 말을 마친 민경이 통화를 끊었다. 이에 승호가 놀란 부엉이 눈으로 민경을 바라보았다.
“너, 제정신이야? 1년 차한테 집도를 맡긴다고?”
“당연히 제정신 아니지. 제정신이면 허락했겠어? 어쨌거나 이 일은 너랑 나만 알고 있는 거다? 비밀 지켜.”
승호를 입단속 시킨 후 민경은 잠깐 떨어져 있던 침상 쪽으로 이동했다.
자신의 판단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6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 * *
선배가 큰 결심을 했구나.
이젠 내가 그 결심에 보답할 차례야.
준후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레지던트에게는 엄연한 수련 지침이 있었다. 그 수련 지침을 넘는 행동을 하면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응급실에 있는 SDH 환자의 경우.
3년 차부터 집도가 가능했다.
3년 차부터 개두술, 두부 외상 수술, 응급 뇌 감압 수술 등이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즉, 지금 준후는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다.
외과의의 본질이 응급 환자를 수술해 목숨을 구하는 것이라면.
준후는 몇 번이라도 선을 넘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 준후의 실력은 일반 레지던트의 상식을 한참 뛰어넘는 수준이었고 말이다.
준후는 바쁘게 다시 통화에 나섰다.
수술실에 연락해 수술방을 잡고.
신경외과 인턴을 수술방에 보내고.
마취과에 연락해 마취의도 섭외했다.
“너 또 무슨 일을 벌이고 있구나?”
준후를 지켜보던 경수가 물었다.
준후는 고개를 끄덕이고 민경과 나눈 통화를 요약해서 경수에게 전했다.
“전원이 아니라 집도라니…… 너도 그렇고 민경 선배도 진짜 어지간하다.”
“네 눈에는 한심해 보이지?”
“한심해 보였겠지. 예전이라면.”
“그게 무슨 뜻인데?”
“아까 응급실에서 네 도움을 받았더니 네가 조금 다르게 보여서 말이야.”
경수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세상에는 꽤 괜찮은 오지랖도 있는 것 같다. 지금 네가 하는 것처럼.”
“이야, 너한테 좋은 소리 들으려면 앞으로 자주 구해줘야겠다?”
“그런 끔찍한 농담은 사절이야.”
경수의 웃음기 섞인 대답에 준후도 피식 웃었다.
확실히 인질극이 끝나고 정안을 사용한 후.
경수는 준후에게 마음을 연 것처럼 보였다.
경수의 말대로.
예전의 경수라면 입에 거품을 물고 지금 준후가 하는 행동을 반대했을 테니까.
“당직실은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넌 마음 놓고 수술하고 와라. 단, 실패하면 가만 안 둔다.”
“당연하지.”
준후는 곧장 4층 수술방으로 향했다.
잰걸음을 하면서 오른손목에 찬 건강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세상을 떠난.
아니, 하늘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성호의 유품을.
형, 정말 속상해.
똑같은 비극이,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어.
내가 나서지 않았으면.
환자는 전원을 갔을 거고 전원 간 병원에서 뇌사나 식물인간 판정을 받았겠지?
그런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내가 어떻게 해서든 끊어볼게.
이 지긋지긋한 악순환의 고리를.
속으로 각오를 다지는 것과 동시에 준후는 SDH의 수술 과정을 곱씹었다.
주변의 우려와 달리.
준후는 수술에 자신이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수술 어시스트를 들어가며 집도의의 처치 및 수술법을 초식화해서 저장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준후는 SDH 환자에게 다른 의사들은 따라 할 수 없는 특별한 치료를 실시할 예정이었다.
‘그 치료법’이라면 환자의 경과는 단 10분 만에 극적으로 호전되리라.
“왔어?”
수술실에 도착하자 입구에 서 있던 민경이 준후를 맞았다.
“네. 선배. 어려운 결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여간 후배가 너무 잘나도 문제라니까. 너 아니었으면 환자 전원 보내고 나도 잠깐 쉬고 있었을 텐데.”
“…….”
“농담이야. 사실 나도 환자를 치료하고 싶긴 했어. 깜냥이 안 돼서 포기하려고 했던 거지.”
“…….”
“20대 후반의 창창한 나이에 뇌사나 식물인간은 너무 가혹하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수술은 반드시 성공할게요. 걱정 마세요.”
“암, 당연히 그렇게 나와야지.”
“근데 선배. 동의서는 어떻게 받으셨어요?”
준후가 동의서로 화제를 돌렸다.
레지던트 1년 차가 집도를 하는데 보호자가 순순히 동의서에 사인을 한다?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잘 설득했지.”
“구체적으로 어떻게요?”
“일단 전원을 가면 수술 시간이 지연돼서 환자가 위험하다고 말씀드렸고. 1년 차가 기본적인 처치를 하면 나중에 3년 차가 들어와서 진짜 수술을 한다고 했어.”
“…….”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
“역시 민경 선배. 수완이 좋으시네요.”
준후는 엄지를 척 내밀었다.
민경이 적당한 요령을 부리지 않았다면 아마 수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곧 준후가 성공할 수술에 민경의 지분도 절반은 있는 셈이었다.
“오늘 저녁에 제가 맛있는 거 쏘겠습니다.”
“음식은 됐고. 앞으로 내 앞에서 발가락 양말만 보이지 마. 알았지?”
“두말하면 잔소리죠.”
준후가 먼저 주먹을 내밀었고.
민경이 준후의 주먹에 민경의 주먹을 맞대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준후는 의과의의 전쟁터인 수술실 안으로 입장했다.
4번 수술방에서 진행되는 경막 하 출혈 수술의 집도의는 레지던트 1년 차 서준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