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197화 (197/424)

197화

제37장 무모(2)

혜진은 바보처럼 넋을 잃은 체 잘게 쪼개진 혈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독 간호사 및 PA로 5년간 근무하면서 처음 보는 광경이라서 그랬다.

혈종이 혈액 용해제를 투입하지 않았는데.

또는 초음파 분쇄기로 분해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조각나는 경우는 없었다.

기적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일까.

어쩌면 환자를 살리고 싶은 준후의 소원을 하늘이 들어준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음…… 근데…….

자세히 보니까 좀 이상해.

절단면이 너무 인위적이야. 어떻게 조각난 혈종의 크기가 다 똑같을 수 있지?

혜진이 주목한 것은 조각난 혈종의 형태와 크기였다.

자세히 관찰하니 총 8개의 혈종 조각은 전부 똑같은 형태와 똑같은 크기를 하고 있었다.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하기에는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요?”

“조각난 혈종이요. 물론 잘된 일이긴 한데…… 어쩐지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혜진이 의견을 전하자 준후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선생님이 의심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요. 비정상적인 일이 겹쳤다고 보는 게 좋겠습니다.”

“…….”

“두개골을 열지 않고 혈종을 조각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초능력자가 아니면 모를까.”

“혜진 쌤, 너무 예민하신 거 아닙니까? 그냥 편하게 받아들이세요.”

준후의 말에 서준이 지원사격을 했다.

그쯤에서는 혜진도 순순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래.

운 좋게 기적에 기적이 겹친 거겠지.

수술이 아닌 방식으로 혈종을 조각내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서준아. 환자 머리 다시 내려주고 만니톨(이뇨제) 투입이랑 과호흡 치료도 중단하고.”

“왜요?”

“뇌압이 정상이니까 뇌압 감소시키는 치료는 그만둬야지.”

“뇌압은 낮을수록 좋은 거 아닌가요? 기왕이면 0mmHg나 그 아래로 만드는 게 좋지 않나요?”

혜진이 묻고 싶은 것을 서준이 대신 물었다.

이에 준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뇌압이 너무 낮아도 문제가 돼. 두개뇌압 저하증이라고 있거든. 그러면 경막 하 출혈이 아니라 경막 외 출혈이 발생하고.”

“…….”

“잘못하면 소뇌가 대후두공 쪽으로 탈출할 수도 있어.”

“뇌압이 너무 낮아도 문제가 되네요. 저는 뇌압은 무조건 낮아야 하는 줄 알았어요.”

“뭐든지 균형이 중요한 법이지.”

준후의 설명은 깔끔했다.

수술 솜씨뿐만 아니라 의학 지식도 풍부하게 갖춘 것처럼 보였다.

이런 준후를 누가 1년 차라고 생각하겠는가.

준후를 향했던 혜진의 불신은 차차 맹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응급 환자를 수술하면서도.

본인의 주제를 넘는 환자를 수술하면서도 준후는 단 한 번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양손을 귀신처럼 사용해서 부서진 골편을 짧은 시간에 싹 주워내고.

수술을 관망하면서 스태프들에게 정확한 오더를 내리고 등등.

준후에게서 문득 교수의 모습이 겹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적어도 경막 하 혈종 수술에 관해서 준후는 완벽했다.

“슬슬 수술 재개할까요?”

“네. 선생님. 썩션 드릴게요.”

혜진이 건네 썩션으로 준후는 조각난 혈종들을 흡인하기 시작했다.

쎄에에엑!

쎄에에엑!

썩션이 빨아들이는 압력을 혈종은 버티지 못했다.

마치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먼지처럼.

혈종은 속절없이 썩션 팁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하나둘 사라지는 혈종들을 바라보며 혜진은 약간의 쾌감마저 느꼈다.

골칫거리는 해치우는 느낌이랄까.

동시에 인간의 몸이 참 섬세하면서 연약하다는 생각도 했다.

고작 엄지 크기의 혈종 때문에.

사람의 뇌가 망가져 뇌사나 식물인간 상태가 되곤 했기에.

썩션이 끝난 후 혜진은 보비(전기 소작기)를 건넸다.

준후가 보비로 출혈이 발생한 미세 혈관을 지지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환자 머리 위로 하얀 연기가 나풀거렸다. 달고나를 태우는 듯한 달콤한 냄새도 났다.

그로부터 30분 뒤 SDH 수술은 무사히 종료되었다.

보통 SDH 수술은 3시간 가까이 소요되지만, 이번 수술은 무려 1시간을 단축해 2시간 만에 끝났다.

두개골에 함몰 골절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눈부신 속도였다.

집도의가 준후였기 때문이다.

수술 종료 후.

수술 부위는 원상복구 되었으며.

두개골 성형술은 환자의 상태를 봐서 차후에 실시하기로 했고.

ICP(두개내압 감시 장치)는 유지했다.

“선배.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어요. 선생님.”

“다들 제가 못 미더웠을 텐데 끝까지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고생하셨어요.”

스태프간의 훈훈한 인사가 오갔다.

준후가 앞서서 수술방을 나섰고.

그 뒤를 혜진이.

혜진의 뒤는 환자의 침상을 끄는 서준이 뒤따랐다.

준후의 듬직한 뒷모습을 지켜보며 혜진은 생각했다.

만약 준후가 집도를 고집하지 않았다면.

환자를 결국 전원 보냈다면 어떻게 됐을까.

혈종의 크기를 감안했을 때.

환자는 뇌사나 식물인간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준후의 무모함이 환자를 살렸던 게 아닐까.

“제가 뭐랬어요? 수술 잘 끝날 거라고 했죠? 원래 수술은 걱정해도 준후 선배는 걱정하는 거 아니에요.”

뒤따르던 서준이 농담조로 한마디 했다.

“이렇게 실력 있는 선생님인 줄은 몰랐죠. 앞으로는 저도 서 선생님 걱정은 안 할 것 같네요.”

지이이잉.

혜진은 서준과 잡담을 나누며 4번 수술방을 떠나 수술실로 나왔다.

우려했던 4번 방의 저주는 없었다.

수술은 완벽했다.

“아 참. 두 사람한테 할 말이 있는데.”

어느새 수술 가운과 마스크, 수술모, 장갑을 벗은 준후가 뒤를 돌아보았다.

준후의 솜씨가 아닌 준후의 미모(?)에 혜진은 한 번 더 놀랐다.

준후가 의사인지, 배우인지 순간 혼란이 왔던 것이다.

초롱초롱한 눈망울.

오뚝한 코와 날렵한 턱선.

짙은 눈썹과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입술까지.

준후를 빤히 보고 있자니 어쩐지 볼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무…… 무슨 할 말이요? 수술도 잘 끝났는데.”

“대단한 건 아니고요. 수술 복장 벗고 편하게 이야기하죠. 잠깐이면 됩니다.”

준후가 빙긋 웃었다.

* * *

7번 수술방.

정규 수술이었던 척추 후궁 절제술을 마치고, 3년 차 희준은 부리나케 수술방을 나왔다.

지이이잉.

희준은 신경질적으로 수술 복장을 벗어 의료 폐기물 봉투에 버렸다.

수술하는 내내 희준의 신경을 긁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바로 준후가 집도를 맡게 되었다는 경막 하 혈종 수술이었다.

민경이 녀석도 문제야.

준후가 하고 싶다고 오냐오냐 받아주면 어쩌자는 거야.

뒷수습은 어떻게 하라고.

민경의 연락을 받던 당시.

희준은 이미 척추 후궁 절제술을 실시하던 중이었다. 환자의 허리 피부를 절개하던 중이었다.

만약 수술 중이 아니었다면.

희준은 준후를 때려서라도 집도를 막았을 것이다.

환자를 제 손으로 살리고 싶다는 절실함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제를 넘어선 안 됐다.

레지던트 1년 차가 집도를 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의국에 폭탄이 터진다.

병원 내부 징계는 확정이고.

설상가상으로 사건이 매스컴까지 흘러가면 그쯤에서는 그 누구도 이번 사건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즉 준후의 행동은 지나치게 무모하고 위험했다.

“하아…… X발. 벌써 X 된 거 아니야?”

희준은 수술방을 훑다가 끝내 욕지거리를 뱉었다.

4번 수술방 출입구 상단에 위치한 표시등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수술이 끝났다는 의미였다.

한창 진행 중이어야 할 수술이 끝났다는 것.

이는 두 가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환자가 테이블 데스를 했거나.

치료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중환자실로 옮겨졌거나.

“선생님, 4번 방 수술은 어떻게 됐어요?”

희준이 수술실에서 근무 중인 간호사에게 물었다.

“저 잠깐 자리를 비웠거든요. 잘 모르겠는데요.”

“알겠습니다.”

각종 불길한 상상을 하며 희준은 일단 수술실을 나왔다.

준후에게 전화를 하려는데.

마침 저 멀리서 준후가 보였다.

보호자로 보이는 인물들과 대화 중이었다.

희준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현장을 향했다.

준후는 어떻게 혼내고 보호자에게는 또 어떤 변명을 해야 할까.

그 생각만으로도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이분이 환자분을 집도하신 선생님입니다.”

희준을 알아본 준후가 보호자에게 희준을 소개시켰다.

순간 희준은 머리 뚜껑이 활짝 열렸다.

서준후, 이 자식.

그렇게 안 봤는데 수술에 실패해놓고 나를 방패로 삼는다고?

하지만 이어지는 보호자의 말에 희준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하진이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고 들었어요.”

“레지던트 선생님이라고 무시했는데 아무래도 제 생각이 짧았던 것 같군요. 사과드립니다.”

여자 보호자와 남자 보호자가 번갈아 희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아. 네.”

영문을 모르고 대답한 후, 희준은 준후를 응시했다. 준후의 눈빛과 태도에서 여유가 넘쳤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SDH 수술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미친!

1년 차가 SDH 수술을 성공적으로 집도했다고?

심지어 자신보다 늦게 수술을 들어갔는데도 빨리 끝냈다고?

안도감과 허탈함, 감탄 등의 감정이 휘몰아쳐 희준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뭔가 현실감이 잘 느껴지지 않기도 했다.

“휴게실 가실 거죠?”

“으…… 으응? 그래야지.”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환자분이 회복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보고도 자주 드리겠습니다.”

보호자를 안심시키고 준후가 먼저 걷기 시작했다.

희준은 뒤늦게 준후의 곁에 따라붙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수술 잘 끝난 거 맞아? 어영부영 보호자들 속이는 거 아니지?”

희준이 한 줌 남은 걱정을 담아 물었다.

“선배, 말씀이 심하시네요. 보호자들을 속이다니요. 그럼 제가 의사가 아니라 사기꾼이죠.”

“그럼 진짜 SDH 수술 성공한 거 맞아?”

“네.”

준후의 설명이 이어졌다.

수술 과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듣는 동안, 희준은 침음성을 흘리기 바빴다.

수술은 희준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환자에게 함몰 골절이 있었던 것이다.

준후가 수술할 수 있도록.

민경이 환자의 상태를 축소시켜서 전한 게 분명했다.

“서준후.”

“네. 선배.”

“이런 경우는 처음이니까 한 번은 넘어가는데 앞으로는 절대 이러지 마.”

“…….”

“결과가 좋았길래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진짜 다 죽었어.”

희준은 엄한 목소리로 준후를 계속 꾸짖었다.

“커리어 박살 나는 건 한순간이야. 안 그래도 병원 바닥 가뜩이나 좁은데…… 네 소문 퍼지면 어떤 병원도 널 안 받아줄 거야.”

“…….”

“또 과장님이 널 가만뒀겠니? 수술 실패했을 걸 상상하니까 내 수명이 몇 년은 줄어들 것 같네.”

애정 어린 잔소리를 마치고 희준은 준후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준후는 납득한 기색이 아니었다.

“선배. 그럼 저도 한 가지 물어볼게요.”

“뭘?”

“제가 수술에 실패했을 경우를 계속 가정하셨잖아요.”

“그랬지.”

“근데 왜 전원 보냈을 때는 가정을 안 하세요?”

“…….”

“환자를 전원 보냈으면 환자가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는 생각해 보셨어요?”

“그…… 그거야…….”

희준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준후의 질문이 희준의 허를 찔렀던 것이다.

준후가 수술을 하지 않았다면.

환자를 전원했다면.

환자는 지금쯤 뇌사나 식물인간이 됐으리라.

그리고 그 역시 비극 중 하나였다.

방금 마주했던 보호자들은 자식을 잃은 슬픔을 평생 안고 살아갔어야 할 것이다.

“저는 보신에 관심 없습니다. 똑같은 상황이 오면 똑같이 행동할 거예요. 설령 주변에서 게거품을 물고 반대한다고 해도.”

준후의 당찬 대답에 희준은 깨달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준후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음을.

준후는 단순히 의학 지식이 풍부하고 손놀림만 좋은 서전이 아니었음을.

환자를 향한 진심마저 다른 차원에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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