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제37장 무모(3)
4층 직원용 휴게실.
준후는 희준과 소파에 나란히 앉아 캔 커피를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모처럼의 휴식이 커피보다 달콤했다.
가뜩이나 인원이 부족한 신경외과이거늘.
세미나로 의국 식구들이 자리를 비우자 숨 쉴 틈 없이 바빴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반나절이 지나 있었다.
“선배, 사과드릴게요.”
“갑자기 뭘?”
“아까 복도에서 했던 말, 너무 공격적이었던 것 같아서요.”
준후는 희준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고 쓰게 웃었다.
-저는 보신에 관심 없습니다. 똑같은 상황이 오면 똑같이 행동할 거예요. 설령 주변에서 게거품을 물고 반대한다고 해도.
자신의 가치관은 변함이 없었지만 표현 방식에는 살짝 문제가 있었다.
무엇보다 희준은 준후를 걱정해서 경막 하 출혈 수술을 말렸다.
그리고 그 판단은 상식적이었다.
1년 차가 SDH 수술에 성공할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지금까지 아무리 많은 활약을 했다고 해도 말이다.
또한 희준을 비롯한 스태프들은 준후가 내공과 무공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즉 스태프 입장에서는 준후를 말리는 게 최선이었던 것이다.
환자를 살리고 싶다는 생각에 내 생각만 했구나.
무림에서 했던 가장 큰 실수의 반복이네.
아버지의 원수 적일도.
녀석을 치러 갈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지.
적일도의 마굴을 발견하고.
무림맹의 추가 지원을 기다렸다면 동료들이 쓸데없이 피를 흘릴 필요가 없었는데…….
이번 사건으로 준후는 모처럼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았다.
뭐 하나에 꽂히면 물불 안 가리는 점 말이다.
“괜찮아. 마음가짐 자체는 본받을 만했어. 너무 무모해 보여서 그랬지.”
“기분 상하셨을 텐데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그만. 나 사과 싫어해. 기왕 줄 거면 바나나로 줘.”
희준이 농담으로 준후의 말을 받았다. 희준의 너그러운 마음씨가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난 환자만큼 너도 걱정이었다.”
“수술에 실패하면 문책당할까 봐요?”
“사실은 문책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걱정이었어.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 의외로 섬세해서 상처를 크게 받더라고. 시호도 그랬거든.”
“시호 선배는 왜요?”
갑자기 언급된 시호 이야기에 준후는 호기심을 느꼈다.
시호의 과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너랑 똑같은 케이스는 아닌데 시호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어. 환자에게 처치를 하다가 환자가 잘못됐었지.”
“자세히 들려주세요. 알고 싶어요.”
“뭐야? 갑자기 왜 눈이 초롱초롱해지고 난리야?”
“궁금하니까요.”
“같은 에이스라서 경쟁심 느끼니?”
“저는 선·후배랑 안 싸웁니다. 싸워야 할 대상은 외상이나 질환이죠.”
“왠지 그런 말 할 줄 알았다.”
희준이 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설명에 나섰다.
사건 자체는 무척 단순했다.
2년 차 시절.
시호가 수술방에서 뇌부종 환자에게 뇌실 배액술을 하다고 사고를 냈다고 했다.
천자(puncture, 찌름술)을 하다가 환자에게 경미한 뇌 손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난리도 아니었지. 작은 불이 큰불이 됐으니까. 당시 치프가 응급 수술로 전환하면서 어찌저찌 문제는 해결됐지만.”
“…….”
“그 충격으로 시호가 며칠 동안 시름시름 앓았어.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었지. 난 그때 시호가 외과의를 그만두는 줄 알았어.”
당시를 떠올리는 것이 고통스러운지.
희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제가 그때의 시호 선배처럼 될까 봐 걱정하셨다는 거네요.”
“쉽게 말하면 그래.”
“근데 전 잘 이해가 안 가요. 시호 선배가 뇌실 배액술에 실패했다니.”
준후는 해당 에피소드에 의심과 의문을 품었다.
인성과는 별개로.
시호의 처치 및 수술 솜씨는 준후가 경험한 레지던트 중 최상위였다.
시호도 준후처럼 양손을 나름 자유자재로 썼다.
손 떨림도 없다시피 했으며 의학 지식도 빠삭했다.
그런 시호가 뇌실 배액술에 실패했다고?
준후로서는 납득하기 힘들었다.
시호의 솜씨라면 뇌실 배액술 정도는 1년 차에 마스터했을 것이다.
“나도 그게 조금 의문이긴 해. 뇌실 배액술을 실패할 녀석이 아니었으니까.”
“…….”
“그래도 피곤하거나 집중력이 떨어지면 실수할 수도 있지.”
“환자나 보호자가 항의하지는 않았나요?”
“전혀. 동의서에 적혀 있는 부작용이기도 하고. 시호가 워낙 환자나 보호자와 친하게 지내서 별일 없이 넘어갔지.”
“환자는 완벽하게 치료됐고요?”
“안면에 살짝 마비가 왔어. 웃는 얼굴이 참 예쁜 환자였는데 웃는 모습이 조금 부자연스러워졌지.”
“…….”
“안타깝긴 하지만 그래도 선방해서 잘 치료했어.”
이야기를 다 듣고 준후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시호에 대한 편견 때문일까.
해당 사건에 시호의 검은 손이 작용한 것 같았다.
만약 해당 사건이 우연한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실수가 벌어진 거라면?
생각이 그쯤 미치자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남의 아픈 손가락 이야기는 그만하자. 이건 예의가 아니다.”
“네. 선배.”
“어쨌거나 SDH 수술은 내가 집도한 걸로 처리할 거야. 같이 수술했던 사람들 입단속 시켜.”
“안 그래도 수술방 나온 직후에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해놨어요.”
“일 처리 한 번 빠르네. 슬슬 일어날까?”
준후는 희준과 휴게실을 떠났다.
희준은 다음 수술 스케줄이 있어서 수술실을 찾았고.
준후는 신경외과 병동으로 향했다.
코드 퍼플이 떴던, 경수가 휘말렸던 인질극.
갑작스러운 SDH 환자 응급 수술.
연달아 터졌던 굵직굵직한 사건이 마무리되면서 준후도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제야 주변 풍경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6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 타고 있던 준후는 물끄러미 로비를 내려다보았다.
로비의 풍경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환자, 보호자, 스태프들로 붐볐다.
풍경만 놓고 보면 병원이 아니라 대형 쇼핑몰 같은 활기찬 분위기를 띠었다.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자신이 가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는 걸까.
문득 선문답 같은 질문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질문의 끝에 현경에 다다를 수 있는 열쇠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터벅. 터벅.
6층에 도착한 후 준후는 곧게 뻗은 복도를 걸었다.
걸으면서 손목에 찬 건강 팔찌를 매만졌다.
형. 나 오늘 교통사고 환자 집도했어. 첫 집도였는데 긴장도 안 되고 오히려 의욕이 넘치더라.
난 천생 외과의 체질인가 봐.
내가 집도를 안 했으면 그 환자도 형처럼 뇌사나 식물인간에 빠졌을지 몰라.
수술 가능한 병원을 전전하다가 말이지.
형을 구하지 못한 건 두고두고 고통스럽지만…… 최소한 제2의 형, 제3의 형이 나타나지 않게 노력할 게.
난 앞으로 더 많은 내공을 얻고.
더 많은 무공을 익히고.
더 많은 의학지식과 경험을 쌓아서.
더 많은 사람을 살릴 거야.
내가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봐 줘.
각오를 다진 준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복도 창가에서 흘러드는 눈부신 햇살은 준후의 뒤를 쫓느라 바빴다.
* * *
그 날 저녁 9시.
모처럼 레지던트 전원이 당직실에 모여 야식을 먹고 있었다.
야식 메뉴는 닭강정.
강원도로 세미나를 다녀온 레지던트들이 사온 특식이었다.
매콤달콤한 양념.
바삭하기보다는 쫀득한 튀김.
부드러운 속살이 어우러진 게 괜히 지역 명물이 아니었다.
준후가 전해 듣기로 세미나는 지루했다고 했다.
세미나 전에는 테이블을 돌면서 타 병원 교수님들에게 눈도장을 찍었고.
세미나는 일방적으로 듣기만 했으며.
세미나 후에도 2시간 정도 뒤풀이를 가졌다고 했다.
적어도 이번 세미나는 학술 대회라기보다는 인맥 파티의 느낌이 더 강해 보였다.
스승님도 참석한 자리라고 들었는데 갔으면 뵐 수 있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 세미나에 못 간 게 조금 아쉬운 준후였다.
닭강정을 먹는 동안.
경수가 당한 인질극도 화제로 떠올랐다. 세미나에 참석한 레지던트들은 경수를 위로하기 바빴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쏟아지는 걱정에 경수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단순히 그런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담담해 보였다.
경수도 멘탈이 좋은 편이고.
준후가 적재적소에 정안을 사용한 덕분도 있었을 것이다.
야식 시간이 끝나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복도로 나온 준후가 시호를 마주쳤다.
시호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오늘도 활약이 눈부셨던데? 동기를 인질범한테서 구하다니. 보통은 그렇게 행동 못 할 텐데.”
“제가 보통 사람보다 간이 커서 그런가 봐요.”
“근데 그것보다 더 큰 사건도 있지 않았나?”
“무슨 말씀이세요?”
“SDH 환자 집도했잖아. 잡아뗄 거야?”
시호의 지적에 준후는 적잖이 당황했다.
준후의 집도를 아는 사람은 희준, 민경, 인턴인 서준, 소독 간호사 혜진뿐이었다.
그리고 네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준후의 집도를 알리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넷 중 누군가가 실수로 말을 흘린 걸까?
“1년 차가 무슨 SDH 집도를 하겠어요. 말도 안 되죠.”
준후는 휘휘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시호는 유도신문을 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런 얄팍한 수작에 넘어갈 준후가 아니었다.
“준후야, 날 너무 우습게 보지 마.”
“한 번도 그런 적 없습니다.”
“SDH 환자 수술이 오후 1시에 시작됐어. 그런데 그 시간대에 수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단 말이지.”
“…….”
“희준이, 민경이 다 수술 중이었고 경수는 인질극 때문에 정신이 없었을 테고.”
“…….”
“그럼 남은 사람은 너밖에 없네? 네가 아니면 혹시 귀신이 수술했나?”
말을 마친 시호가 음흉하게 웃었다.
설마 수술 시간과 스태프들까지 분석을 했을 줄이야.
준후는 한 방 먹은 불쾌함을 지우기 힘들었다.
아니, 애초에 이 인간은 왜 이렇게 나한테 관심이 많은 거야?
복잡한 감정 속에 준후는 시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