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199화 (199/424)

199화

제37장 무모(4)

“이제 오리발은 안 내밀기로 했나 봐?”

“다 알고 오셨으면 소용없으니까요. 그래서 이러는 의도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준후는 순순히 집도 사실을 밝혔다.

끝까지 거짓말을 해봤자 시호를 자극하는 일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당당한 편이 더 나았다.

저자세로 끌려다니는 건 준후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엄밀히 따지면 준후는 수술에 실패하고 이를 의도적으로 은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수술 절차상의 문제가 있어서.

논란이 될 만한 부분만 숨기는 것이었다.

진실이 까발려진다고 해서 큰 타격을 입을 확률은 낮았다.

“글쎄. 무슨 의도일까? 쉽게 알려주면 재미없지.”

“이번 사건으로 협박 같은 걸 하실 거라면 포기하세요. 저한테는 안 통하니까요.”

“내가 교수님이나 과장님께 일러바친다고 해도?”

“네.”

“우리 준후, 배짱 한 번 좋네. 하긴 배짱이 그렇게 좋으니까 레지던트 1년 차에 SDH 수술을 했지.”

시호가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깔깔깔 웃었다.

소름 끼치는 웃음이었다.

웃음이 터질 맥락이 전혀 없었기에.

터벅. 터벅.

준후와 몇 발자국 떨어져 있던 시호가 준후에게 다가왔다. 스스럼없이 준후의 어깨에 자신의 한 손을 얹었다.

대체 시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준후야.”

“네. 선배.”

“안심해. 고자질은 내 취향이 아니야. 고자질로 쾌감을 느끼는 건 저급한 놈들이지. 세상에는 더 고귀하고 강력한 쾌감이 많거든. 난 그런 쾌감을 추구하지.”

“고귀하고 강력한 쾌감이 구체적으로 뭐죠?”

“네가 느끼는 쾌감. 그리고 내가 느끼는 쾌감.”

“저랑 선배 사이에 교집합이 있다니 의외네요.”

“저번에 말했잖아. 너와 나는 서로의 그림자라고.”

시호의 말이 끈적하게 준후에게 달라붙었다.

준후는 그 불쾌함을 지우기 힘들었다.

가능하다면 시호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시호의 생각과 감정을 읽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정안도 안 통했었지?

확실히 시호 선배는 정상이 아니야. 정념(正念)을 거부하고 혐오했으니까.

“그럼 저를 놀리는 게 목적이었나 보죠?”

“그건 꽤 괜찮은 접근이었어.”

“저도 선배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는데요.”

“얼마든지 물어봐.”

“오늘 희준 선배에게 들었습니다. 2년 차에 뇌실 배액술에 실패해서 괴로워하셨던 적이 있다고.”

“희준이 녀석, 쓸데없는 소리를…….”

“그 환자, 웃는 모습이 예뻤는데 사고 후유증으로 찾아온 안면 마비 때문에 웃는 모습이 부자연스러워졌다고 하더군요.”

“…….”

“혹시 일부러 사고를 내셨습니까?”

준후는 말을 날카롭게 빚어 시호를 찔렀다.

당하고만 있을 준후가 아니었다.

시호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기만 할 준후가 아니었다.

무공이 됐든, 의술이 됐든, 화술이 됐든 준후는 항상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었다.

질문을 던지고 준후는 시호의 표정을 꼼꼼하게 살폈다.

감정의 동요가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

하지만 시호는 눈썹 한 번 까닥거리지 않았다.

“우리 준후, 소설을 너무 많이 봤네.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야.”

“둘이 뭘 그렇게 꽁냥꽁냥 해요?”

하필이면 막 당직실에서 나온 민경이 둘을 발견하고 대화에 껴들었다.

“별거 아니야. 오늘 대화 즐거웠다. 앞으로도 자주 이런 진지한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시호가 민경 쪽으로 향하면서 대화는 끝났다.

준후는 멀어지는 시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불길함이라는 단어에 사람 이름을 붙인다면 그건 아마 시호가 아닐까.

* * *

그 날 저녁 당직실.

준후는 스승 재현의 의학지식과 노하우와 정수가 담긴 뇌혈관 질환 자료를 읽고 있었다.

뇌혈관 질환은 뇌종양 질환에 비해 응급 수술이 많은 편이었다.

외상이나 만성으로 인한 혈관 출혈과 파열이 환자의 상태를 급속도로 악화시키기 때문이었다.

뇌혈관 수술의 종류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존재했다.

코일을 사용한 뇌동맥류 코일 색전술.

좁거나 막힌 혈관을 뚫어주는 카테터 수술.

꼬여 버린 혈관을 정상화시키는 혈관 기형 수술 등등.

하지만 준후는 오늘따라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아까 시호와 나눴던 대화가 종종 떠올라 주의를 분산시켰다.

“당직도 아닌데 그만 들어가 봐. 피곤하지 않아?”

경수가 준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당직 근무는 경수였다.

“끄떡없어. 이 정도는.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준후는 싱겁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직이든, 아니든 준후는 늘 등대처럼 당직실을 밝혔다.

운기조식과 영양제 조합으로 얻은 체력과 집중력을 의학 지식 쌓는 데 불태웠다.

스승의 뇌종양 비급을 몇 개월 만에 독파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성실은 준후의 또 다른 미덕이었다.

“너야말로 쉬지 그래? 낮에 그 사건도 있었는데. 오늘 당직은 내가 설게.”

“이제 괜찮아.”

“괜찮은 척을 하는 건 아니고?”

“괜찮은 척을 해서 내가 얻는 이득이 뭔데?”

경수가 특유의 실용성을 추구하는 화법을 구사했다.

평소 같은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준후는 잠시 당직실을 나왔다.

스테이션에서 드레싱 카트를 챙겨 당직실로 돌아왔다.

“상처 소독 좀 하자.”

“그러든가.”

준후는 경수의 턱 아래에 붙은 거즈를 제거하고 실밥 주변을 소독했다.

준후가 공을 들인 만큼 봉합은 훌륭했다.

벌어진 상처를 당겨주는 장력이 탄탄했고 매듭도 단단해서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소독한 자리에 거즈를 덧대고 난 후, 준후는 물었다.

“낮에 하던 이야기 계속해도 돼?”

“무슨 이야기를 했었지?”

“네 성격에 대한 이야기.”

준후가 경수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화제를 꺼냈다.

-조금 깊은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데. 넌 왜 다른 사람을 그렇게 못 믿어?”

-…….

-사실 나한테만 쌀쌀맞게 구는 거 아니잖아. 선배들이나 후배들한테도 그러잖아. 무슨 이유가 있어?

-뭐, 기왕 판이 다 벌어졌으니 어쩔 수 없나? 사실 나는…….

준후는 경수와 나눴던 대화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대화 도중 SDH 환자가 응급실을 찾아 대화가 끊어졌던 것도.

“별것도 아닌데 꼭 뒷이야기를 들어야 속이 후련하겠냐?”

경수가 귀찮다는 듯 물었고.

준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궁금했다.

속 깊은 이야기를 듣고 나면 경수와 한 걸음 더 가까워질 테니까.

경수는 누가 뭐래도 준후의 하나뿐인 동기였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앞으로 평생 봐야 할 동료였다.

마음을 터놓은 동료가 일적으로 또 사적으로 얼마나 든든한지, 준후는 무림에서 뼈저리게 경험해 봤다.

“생명의 은인이 부탁을 하니 안 들어줄 수도 없고. 휴우.”

경수가 한숨 쉬며 말을 이었다.

“내 성격이 쌀쌀맞은 데는 물론 다 이유가 있어.”

“…….”

“뭐…… 그 과거로 내 성격을 규정짓는 게 반드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말 잘하네. 벌써부터 호기심이 샘솟는걸?”

“염병.”

경수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흔한 이야기야. 우리 아버지는 성격이 난폭해서 나와 어머니를 자주 때렸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건 아버지의 주먹질과 발길질, 술 냄새뿐이지.”

“…….”

“그래도 다 참았는데. 잘 참았는데…….”

경수는 입술을 깨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물었다고 생각한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있었다.

-엄마, 어디 가요?

-잠깐 나갔다 올 거야. 우리 경수, 집 잘 보고 있으렴.

-아빠랑 둘이 있기 싫어요. 무서워요.

-괜찮아. 엄마 금방 올 거야. 손가락 걸고 약속할게.

그날의 끔찍했던 기억이 다시 경수를 찾아오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날 버리고 집을 나갔어. 금방 돌아온다고 하셨는데 거짓말이었던 거지.”

“아…….”

“나는 손꼽아서 어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어. 그런데 부질없는 기다림이었더라. 어머니가 가출하면서 아버지는 더 난폭해졌고 난 더 많이 얻어맞았어.”

“…….”

“어머니는 나를 버렸던 거야. 뭐, 솔직히 이해 못 할 건 아니었어. 나도 아버지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니까.”

“…….”

“하지만 어머니를 날 데려갔어야 해. 최소한 거짓말은 하지 말았어야 해.”

천장을 향했던 경수의 시선이 다시 준후에게 머물렀다.

감수성이 풍부한지.

준후는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소라면 동정하지 말라고 한 마디 쏘아붙였겠지만 오늘은 그런 준후의 모습이 고마운 경수였다.

준후가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는 것 같아서.

경수는 이후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요약해서 전해주었다.

어머니는 그 후로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고.

아버지는 경수가 의대에 합격할 즈음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쉽게 말해서 난 사람을 믿는 것도 싫고 사람한테 버림받는 것도 싫어. 그래서 모두에게 거리를 뒀던 거야. 이만하면 아까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됐나?”

“미안. 괜히 아픈 상처를 들쑤셔서.”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내가 말하기 싫었으면 애초에 안 해도 될 이야기였으니까.”

“…….”

“가족 이야기를 다른 사람한테 털어놓는 건 처음인데. 의외로 속이 후련하네.”

“용기 내줘서 고맙다.”

“진짜 용기는 내가 아니라 네가 냈지. 날 구하려고 인질범한테 달려들었는데.”

경수가 뜸을 들이다가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그렇게 사람을 못 구해서 안달인데? 주변에서 문제가 터지면 다 네 일인 것처럼 굴잖아.”

“나도 다 이유가 있지.”

준후는 차분하게 대답을 이어갔다.

무림에서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기에 사연을 완전히 각색했다.

어린 시절.

다중 충돌 교통사고를 겪었다고.

그때 눈앞에서 아프고 죽어가는 사람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고.

지어낸 이야기였지만 그 본질만큼은 진실과 다를 바 없었다.

준후를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감정은 무기력이었다.

주변에서 아프고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기력감 말이다.

“너도 트라우마가 있었구나. 난 네가 단순히 정의감이 센 줄 알았는데.”

“정의처럼 거창한 건 모르겠어. 문제가 터졌을 때 그저 방관자처럼 있는 게 싫을 뿐이야.”

속내를 주고받고서 준후는 경수와 한 걸음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분명 경수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근데 나 부탁 하나 해도 되냐?”

“뭔데?”

“괜찮으면 마시지 좀 해주라.”

뜻밖의 부탁에 준후는 실소를 머금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다른 사람들이 네 마사지를 받고 시원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길래. 나도 한 번 받아 볼까 싶어서.”

“손이 닳는 것도 아니고 못 해줄 이유가 없지.”

준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수의 등 뒤에 자리를 잡았다.

경수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한다는 사실에 준후는 깊은 의미를 두었다.

경수가 마음을 열었다는 증거랄까.

“몸에 힘 빼고 가만히 계세요.”

“오케이.”

뚜두둑.

뚜두둑.

심상치 않은 소리가 당직실에 울려 퍼졌다.

준후는 경수의 굳어 있던 목 관절부터 풀어주었다.

이어서 내공을 담은 엄지로 목에 위치한 주요 신경과 근육, 혈 자리를 문질렀고.

손가락 중간에 있는 마디뼈로.

해당 자리들을 타격하기도 했다.

마사지에 추궁과혈의 수법을 곁들인 것이다.

목을 시작으로 준후는 경수의 어깨와 두피에도 추궁 과혈 마사지를 펼쳤다.

마사지 종료 후.

경수를 마주하고 앉으니 경수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뭔가 황홀한 경험을 한 듯한 표정이었다.

눈은 게슴츠레하고 입은 벌어져 있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준후의 추궁과혈 마사지는 재활치료보다 효과가 더 뛰어나고 빨랐다.

처음 받으면 뿅 가는 게 정상이었다.

“기분이 어때?”

준후의 질문에 정신을 차린 경수가 가까스로 대답했다.

“미친, 왜 이걸 이제 받았지? 레지던트 8개월을 손해 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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