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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200화 (200/424)

200화

제37장 무모(5)

경수는 의자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기지개를 펴보고, 목으로 원을 그리고, 허리를 폴더폰처럼 접었다 펴보기도 했다.

일시적인 것이겠지만.

만성으로 앓고 있던 통증들이 싹 가시면서 몸이 개운했다.

몸의 움직임도 훨씬 편해졌다.

선배들이 준후의 마사지를 받고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해왔거늘.

직접 받아 보니 그럴 만했다.

‘참 특이한 놈이란 말이지. 준후 녀석은.’

경수는 준후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준후는 잠시 볼 일이 있다며 당직실을 떠난 상태였다.

당직이 아닌데도 당직을 서는 아이. 당직을 서고도 피로를 모르는 아이.

선배들 이상의 의학 지식을 갖춘 아이.

메스로 달고나 부수는 연습을 하고 또 그걸 완벽하게 소화하는 아이.

환자밖에 모르는 아이.

준후는 의사가 갖춰야 할 인성과 재능을 이미 다 갖춘 아이였다.

경수는 죽었다 깨어나도.

아니, 환생을 몇 번 거듭한다고 해도 준후처럼 살 자신이 없었다.

오늘 인질극 사건만 해도 그랬다.

만약 자신이 준후였다면 준후를 구하기 위해 나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각별한 사이도 아니었고.

설령 각별하다고 해도.

위험한 상황에 몸을 내던질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경수는 준후를 통해 한 가지를 배웠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고.

준후라면 자신이 믿고 기대도 되겠다고.

준후의 정의와 선(善)은 위선이 아니라고.

드르르륵.

때마침 문이 열리고 민경이 당직실로 들어왔다.

“선배, 안 자요?”

“안 자는 게 아니라 못 자. 내일 케이스 발표 있거든.”

민경이 졸린 눈을 비비며 책장으로 이동했다. 필요한 전공 서적이 있는지 의학 서적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필요한 책을 손에 들고 경수와 마주 섰다.

“낮에 충격 많이 받았지? 지금은 좀 어때?”

“멀쩡합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이야기해. 참는 거 몸에 안 좋아. 몸이든, 마음이든 원래 참으면서 병 생기는 거야.”

민경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정 힘들면 당직 대신 서줄까?”

“아니요.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근데 선배.”

“왜?”

“그동안 틱틱거려서 죄송했습니다. 여러모로 신경 많이 써주셨는데 제가 늘 너무 차갑게 군 것 같네요.”

경수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준후에게 마음을 열자 보이는 것이 있었다.

자신이 세상을, 또 인간관계를 지나치게 좁고 폐쇄적으로 봤다는 사실을 말이다.

민경만 해도 경수를 잘 챙겨주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그런 민경을 경수는 남인 것처럼 대해 왔다.

“얼레? 평소 너답지 않게 왜 그래?”

“평소랑 다른 일이 있었으니까요. 그 사건 이후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차도남처럼 구는 것도 나름 네 매력이었는데. 아쉽네.”

민경의 농담에 경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근데 왜 앉아 있지 않고 서 있어?”

“준후한테 마사지 받고 잠깐 몸을 움직여봤는데 엄청 시원하네요.”

“쯧쯧쯧. 그러게 받으라고 할 때 받지. 난 준후랑 오프 날짜까지 바꿔가면서 마사지권을 샀는데.”

“확실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겠더라고요.”

“경쟁 상대가 한 명 늘었구나.”

“제가 선배보다 유리할 걸요? 당직실에 같이 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네. 수고하고 힘들거나 무슨 문제 생기면 바로 콜 해.”

“네. 선배.”

당직실 문을 향하는 민경을 바라보다가 경수는 퍼뜩 무언가를 떠올렸다.

“저기, 선배. 잠깐만요.”

“응? 왜?”

“이거 쓰실래요? 효과 좋은데.”

경수가 급하게 책상 서랍을 뒤져 민경에게 내민 것은 한방 파스였다.

경수가 평소 애용하는 것이었다.

민경이 경수와 경수가 내민 파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경수가 민경에게 마음을 열었고.

또 그 증표로 무언가를 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고마워. 잘 쓸게.”

* * *

그 날 새벽 1시, 컨퍼런스 룸.

시호와 민경은 원형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노트북으로 작업 중이었다.

두 사람 다 내일 케이스 발표가 있었다.

케이스 발표란 오전 컨퍼런스 시간에 본인이 공부한 환자의 질병 사례를 교수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이었다.

레지던트 평가에 속하는 영역인 데다가.

내용이 어설프면 교수들에게 집중포화를 당하기 때문에 열심히 준비해야 했다.

“하아아암.”

민경은 입을 가리고 조용하게 하품을 했다. 하품하는 모습을 시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피곤하지?”

“조금요.”

“조금이 아닐 텐데? 세미나 때문에 사람이 빠져서 많이 바빴잖아.”

시호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민경을 바라보았다.

민경이 좋아하는 미소였다.

병동 또는 병동에 드나드는 여성 스태프들은 대부분 준후를 좋아했는데.

민경은 준후보다 시호가 더 좋았다.

시호에게는 준후에게는 없는 유약미가 있었다.

약해 보여서 지켜주고 싶다고 할까.

물론 실제로 시호가 약한 사람인 건 아니었다.

시호는 강한 체력과 정신력의 소유자였으며 교수들이 눈여겨보고 있는 신경외과의 에이스였다.

“선배도 세미나 다녀와서 피곤하시잖아요.”

“피곤하긴.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 왔는데.”

“저는 오히려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더 피곤하더라고요. 좀이 쑤시는 느낌이에요.”

“민경이 너라면 그럴 수도 있겠네. 짠 한 번 할까?”

시호가 커피가 담긴 텀블러를 내밀었다.

민경도 텀블러를 들고.

시호가 내민 텀블러와 자신의 텀블러를 부딪친 후 커피를 한 모금 했다.

시호와 단둘이 데이트하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블랙 커피가 달달하게 느껴졌다.

“아 참, 당직실 달력 보니까 이번 주 금요일에 동그라미가 쳐졌더라? 무슨 일 있어?”

“아…… 그거요? 제가 준후랑 오프 날짜를 바꿨거든요.”

“준후가 금요일에 쉬어?”

“네. 아영이랑 데이트 약속을 맞췄나 봐요. 선배도 못하는 데이트나 하고 말이야. 군기가 빠졌어. 군기가.”

“그랬구나. 준후가 금요일에 쉬는구나.”

시호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이야기 드리긴 뭐한데 선배는 준후한테 질투 같은 거 안 느끼세요?”

“내가 왜?”

“원래 신경외과 에이스는 선배였잖아. 근데 준후가 무섭게 치고 올라오니까…….”

후배가 선배보다 잘나면.

선배는 후배가 껄끄럽고 고깝게 보이기 마련이었다.

처음엔 민경도 준후에게 그런 감정을 느꼈다.

지금이야 준후가 워낙 심성이 곱고 착한 걸 알았고 능력 차이가 워낙 심하게 나서 질투심을 버렸지만.

“나보다 잘난 사람이 있으면 차라리 고맙지. 그 사람을 통해 보고 배울 게 있으니까.”

“와, 역시 선배는 대인배세요.”

“대인배씩이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시호가 떠난 후.

민경은 다시 케이스 스터디에 몰두했다. 그런데 10분이 지나도 시호가 돌아오지 않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배가 많이 아픈 걸까.

드르르륵.

민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컨퍼런스 룸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서 복도 쪽을 살폈다.

마침 시호가 한 병실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화장실에 간다던 시호가 정작 병실에서 나오니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민경은 별일 아니겠거니 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시호는 1년 차 때부터 병동 라운딩에 솔선수범이었으니까.

* * *

같은 시각.

준후는 흉부외과 당직실에 잠입해 있었다. 아영과 마주 앉아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준후가 당직일 때는 아영이 신경외과 당직실에.

아영이 당직일 때는 준후가 흉부외과 당직실에 가는 것이 이제는 자연스러운 데이트 코스가 되어버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일주일에 한 번도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것이다.

데이트 시간은 보통 1시간에서 2시간 정도였다.

그 이상은 업무에 지장이 갈 수도 있었다.

연애를 하고 또 데이트를 하면서 준후는 아영과 일상적인 대화를 즐기기 시작했다.

하루 중에 있었던 시시콜콜한 생각과 감정들을 공유해나갔다.

전에 없던 변화였다.

예전의 준후는 의술과 환자밖에 몰랐으니까.

그 밖에 것들은 겉절이나 깍두기 취급을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준후는 알았다.

하루를 쌓아 올리는 경험은 대부분 사소한 것들임을.

그 사소한 것들이 자신이 만들어간다는 것을.

“근데 그 이야기는 아직까지 쏙 빼놓고 있네?”

“무슨 이야기?”

“낮에 인질극 있었잖아. 동기 구한다고 인질범한테 달려들었다면서?”

마주 앉은 아영이 기어이 그 화제를 꺼냈다.

무공을 익힌 준후 입장에서는 아주 당연하고 안전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아영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애인이 불구덩이에 뛰어든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미안.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안해할 필요 없어. 반대로 잘했다고 칭찬해 주려고 꺼낸 이야기인데?”

“어? 진짜?”

“응.”

아영의 반응이 뜻밖이라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준후 너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랬겠지. 난 그렇게 믿어.”

“…….”

“그리고 준후 네가 그렇게 나서서 나도 도움을 받았잖아. 그러니까 뭐라고 할 순 없어.”

아영이 불쑥 학창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고3 수능 당일.

아영은 과호흡증으로 실신할 뻔했고 준후가 비닐 봉투를 이용해 아영을 구해준 사건을 말이다.

“크게 혼쭐 날 줄 알았는데 이게 이렇게 되네?”

“내 마음씨가 어디 보통 넓어야지. 이제 좀 감이 와?”

“아이고. 그럼요. 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가씨밖에 없습니다.”

준후가 너스레를 떨자 아영이 꺄르륵 웃었다. 손에 들고 있던 크림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준후야.”

“어. 왜?”

“언젠가 네가 위험하거나 도움이 필요할 땐 내가 꼭 곁에서 지켜줄게.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갑자기 너무 비장해지는 거 아니야?”

“그건 아는데 꼭 해주고 싶은 말이었어.”

“목숨을 바친다거나 하는 그런 말은 하지 마. 불길하게.”

준후는 휘휘 고개를 저었다.

성호를 잃은 것도 모자라 아영까지 잃게 된다고 생각하면 준후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때는 정말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너무 오버했나?”

“심각할 정도로. 근데 데이트는 꼭 거기서 해야 해?”

준후는 흉부외과 당직실 벽에 걸린 달력을 보며 물었다.

이틀 뒤 금요일.

아영과 데이트 약속이 있었는데 문제는 데이트 장소였다.

좋은 장소가 많고 많거늘 하필 그곳이 데이트 장소라니…….

“꼭 거기서 해야 해. 나름 의미도 있지 않아?”

“난 잘 모르겠어.”

“괜찮아. 몰라도 알 게 될 테니까.”

아영에게 진 죄(?)가 많았던 준후는 고개만 끄덕였다.

아영이 하고 싶다면 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못 해준 게 너무 많았으니까 말이다.

“그럼 오후 데이트 스케줄은 내가 짤게.”

“정말? 믿고 맡겨도 돼?”

“당면이지.”

“으…… 썰렁한 개그. 벌써부터 불안해진다.”

아영이 진저리를 치고는 다시 크림빵을 베어 물었다. 빵순이답게 아영이는 당직 때도 야식으로 빵만을 고집했다.

“입에 크림 묻었다.”

“이게 요즘 유행하는 연새 우유 생크림 빵이거든. 하루에 두 개는 먹는 것 같은데. 크림이 잔뜩 들어 있어서 입에 자주 묻더라.”

“내가 닦아줄게.”

준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에 놓여 있던 티슈 곽에서 티슈 한 장을 꺼낸 후 아영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티슈로 아영의 입가를 닦아주는 척하면서…….

냅다 아영과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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