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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201화 (201/424)

201화

제38장 첫 데이트(1)

신경외과 숙직실은 네 평 정도 되는 비좁은 공간이었다.

낡은 이층 침대는 각각 출입문 옆, 좌측 벽면, 우측 벽면에 놓여 있었다.

햇살이 들지 않는 창가 쪽에는 덩그러니 책상이 위치했으며 책상 옆에는 낡은 고물 캐비넷이 서 있었다.

크어어엉! 크어어엉!

고라니 울음처럼 기괴한, 희준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준후는 운기조식을 펼치는 중이었다.

가부좌를 틀었다가는 동료들 눈에 띌 위험이 있었으므로.

준후는 침대 1층에 누워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운기조식은 자세에 구애받지 않았다.

쓰으읍. 후우우.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

사소하고 평범한 호흡 속에 서씨세가의 가전 심법인 청명심법의 이치가 담겨 있었다.

-맑고 바른 기운으로 이름을 다스린다.

준후는 들숨으로 청정한 기운을 받아들이고 날숨으로 탁한 기분을 뱉어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에서 흐르듯.

진기가 주요 경맥을 돌다가 단전에 내려앉았다.

단전이 묵직했다.

무림에서 조화경의 경지에 다다랐고.

고등학교 때부터 꾸준히 운기조식을 했으며 또 몇 달 전부터 천산환을 복용한 덕분일까.

준후의 내공은 벌써 0.6갑자에 육박했다.

내공 성취가 무시무시했다.

1시간 동안의 운기조식을 마치고 준후가 눈을 떴다.

가만히 이층 침대에 바닥을 올려다보았다.

무공 성취에 있어서.

준후의 장기적인 목표는 현경에 이르는 것이었다. 환골탈태, 금강불괴, 만독불침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었다.

무공이 의술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자신의 경험으로 이미 증명했다.

즉, 현경이 된다면.

지금은 할 수 없는 더 기적적인 치료도 가능해질 것이다.

어쩌면 뇌사나 식물인간 치료도 가능할지 몰랐다.

문제는 현경의 경지에 오르는 일이 결코 녹록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준후가 무림 생활을 할 당시.

현경에 오른 고수는 딱 두 명이었다.

무림맹주, 검선 천태룡.

은거기인, 신응괴 강백통.

사파에서는 탈마의 경지에 이른 파천검 흑소룡.

무림을 통틀어 단 세 명만이 다다른 경지에 자신이 이름을 올릴 수 있을까.

솔직히 준후는 자신이 없었다.

무림이라면 이미 현경에 이른 고수에게 가르침을 청할 수도 있었겠지만.

현대에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오롯이 자신의 힘만으로 조화경을 뛰어넘어야 했다.

그래도 해내야겠지.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환자들을 생각하면.

각오를 다지는 준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준후는 단기 목표로 생각을 전환했다.

첫 번째 목표는 벌모세수였다.

벌모세수란 무공에 최적화된 육체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현재 준후의 몸에는 탁기가 많았고 근골과 신경도 상당히 비틀려 있었다.

현대인이다 보니.

또 어렸을 때는 무림을 기억하지 못했다 보니.

신체가 올바르게 여물지 못했던 것이다.

벌모세수에 성공한다면 준후의 처치와 수술, 수술 어시스트는 분명 정교해지리라.

준후는 각종 처치에 무공의 이치를 담고 있었으니까.

빠르면 올해 가을.

늦어도 올해 겨울 안에는 가능하겠어.

준후는 단전에 쌓은 내공을 헤아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모세수는 보통 가주 또는 장문인 급의 고수가 어린 후계자에게 펼쳐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난이도가 높고.

풍부한 내공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후는 혼자서도 벌모세수가 가능했다.

이미 타인에게 벌모세수를 해줄 수 있는 경지에 올랐으니까.

다만 당장 벌모세수가 불가능한 건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였다.

두 번째로 준후는 앞으로 익힐 무공에 대해 떠올렸다.

양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양수 호박 기술.

타인의 정신과 마음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정안(正眼).

이 두 가지 기술은 이미 완전히 터득해서 자신의 것으로 했다.

한동안은 무공 수련이 없었는데. (스승 재현의 의술 비급을 암기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슬슬 다음에 익힐 무공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검법은 무르익은 지 오래되었으니 검법이 아닌 다른 무공을 익히면 좋을 것 같은데…….

준후는 몇 가지 무공을 후보군에 올려놓고 저울질을 했다.

결론은 조만간 날 것이다.

* * *

드르르륵.

당직실에 들어서자 준후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라면 냄새였다.

당직 근무자였던 경수가 후루룩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좋은 아침.”

“너도 좋은 아침.”

준후가 먼저 인사를 했고.

경수도 준후와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건넸다.

인질극 사건이 있었던 것도 벌써 사흘 전의 일이었다. 경수는 사건의 트라우마를 벌써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평소도 멘탈도 좋은 편이고.

준후가 정안도 자주 사용했으니 사건의 충격이 트라우마로 남을 확률은 낮을 것이다.

“아직 포트기 물 뜨거운데. 너도 한 사발 할래?”

“안 돼. 나 오늘 금식이야.”

“아…… 오늘이 그날이었구나? 모처럼 쉬는 날에 맛있는 걸 못 먹어서 어쩌냐?”

“그러려니 해야지.”

준후는 어깨를 으쓱하며 경수의 맞은편에 앉았다.

“당직 때 별일은 없었고?”

“다행히 없었지. 뇌진탕 환자랑 머리 살짝 찢어진 환자만 왔다 갔다.”

“병동 환자는?”

“이하동문. 내가 너처럼 환타인 줄 알아? 내가 당직이면 병동하고 응급실이 얼마나 조용한데.”

“아이고. 부럽습니다. 부러워요.”

준후가 익살을 떨자 경수가 피식 웃었다. 최근 들어 웃음이 많아진 경수였다.

잡담을 나누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6시 30분이 되었다.

슬슬 컨퍼런스 준비를 할 때가 되었다.

준후는 신경외과 인턴들을 도와 컨퍼런스를 준비했다.

컨퍼런스 룸을 청소하고.

병동 환자의 상태를 요약한 자료들을 인쇄하고.

빔 프로젝트를 세팅하고 등등.

엄밀히 말하면 준후가 할 일이 아니었지만 준후는 그저 했다.

오전 7시.

레지던트와 교수들이 컨퍼런스 룸에 한자리에 모였다.

입원 환자 관리.

수술 스케줄 교통정리.

케이스 발표가 이어졌지만 준후는 평소답지 않게 집중을 하지 못했다.

오늘이 쉬는 날이라서 그랬다.

쉬는 날인데도 컨퍼런스에 참여했던 건 ‘그 일’을 할 때까지 딱히 갈 곳도, 할 일도 없어서였고.

컨퍼런스가 끝나자 스태프들이 군대처럼 복도에 정렬했다.

터벅. 터벅.

오와 열을 맞춰 스태프들이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오전 회진이 시작된 것이다.

까탈스러운 과장이 또 무슨 꼬투리를 잡을지 몰라 레지던트들은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가식의 대가답게.

과장은 환자와 보호자 앞에서는 한없이 다정했다. 말은 사근사근했고 표정은 부드러웠다.

하지만 병실을 나오기 무섭게 레지던트들을 쪼아댔다.

검사를 좀 더 해라.

비급여 치료를 추가해라.

환자를 잘 구슬려서 영양제 치료도 병행해라 등등.

대부분 신경외과 수익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병원이 과별 수익률을 일일이 계산하고 이를 통해 과의 규모를 축소 및 확대하며, 이를 진급에도 반영한다는 사실은 이제는 비밀이랄 것도 못 됐다.

당연하게도 과장의 칼날은 준후에게도 향했다.

604호실을 나온 직후.

과장이 도끼눈을 뜬 채 준후를 호명했다.

그 이유를 알았기에 준후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스태프들 사이를 뚫고 과장 앞에 섰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서 선생.”

“네. 과장님.”

“민태웅 환자 퇴원은 아직 멀었어요? 분명 저번에 단단히 주의를 준 것 같은데…….”

과장이 민태웅을 콕 찍었다.

민태웅은 준후가 주치의를 맡은 식물인간 환자였다.

-서 선생. 앞으로 딱 한 달 줄게요. 한 달 안에 식물인간 환자 내보네요. 무조건.

얼마 전 과장이 빨리 퇴원시키라고 신신당부한 환자이기도 했다.

과장의 언질은 들은 이후로.

준후는 보호자에게 단 한 번도 퇴원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퇴원 이야기를 꺼내면.

보호자가 큰 충격을 받고 상실할까 봐서 그랬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근데 왜 아직도 환자가 병실에 붙어 있어요? 내 말이 말 같지 않아요?”

“아닙니다.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을 보고 있었습니다.”

“타이밍은 개뿔. 저 자리에 다른 환자를 받으면 병동 수익률이 얼마나 나올지 계산해 봤어요?”

“과장님, 고정하시죠. 서 선생도 다 생각이 있을 겁니다.”

신동훈 교수가 나서서 준후의 편을 들었다.

신동훈은 준후가 어시스트를 했던 피아니스트 명한의 각성 수술을 집도했던 조 교수였다.

“식사를 다 한 손님한테 식당에서 나가달라는데. 그게 생각이 필요한 일이에요?”

“뭐, 그렇게까지 비유하실 것까지야…….”

“서 선생. 마음이 그렇게 약해서 외과의 하겠어? 인간관계를 끊을 때는 말이야 메스를 사용하듯이 칼 같아야 한다고.”

“명심하겠습니다.”

준후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할 말이야 많았지만 과장에게 대드는 그림은 좋지 않았다.

그것도 스태프들이 다 모여서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는.

과장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말이다.

폭풍 잔소리가 끝난 후, 회진이 재개되었다.

스태프들이 복도를 가로지르는데.

15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쯤에서.

한 환자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환자는 손으로 벽을 짚은 채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환자의 뒷모습만 보고도 준후는 환자를 알아보았다.

이름은 나영만.

현직 대학 교수로 나이는 60세.

이틀 전 뇌동맥류 수술 코일 색전술을 받은 환자였다.

역시 준후가 맡은 환자 중 한 명이었다.

“쯧쯧쯧. 환자가 회진 시간에 화장실이나 가고. 인턴, 환자 관리 똑바로 못해?”

“죄…… 죄송합니다.”

“하여간 요즘 것들은 빠져 가지고.”

과장이 인턴을 비난하던 그때.

파바바밧!

준후는 보법을 밟아가며 환자를 향해 달려나갔다.

그 여파로 근처에 있던 의사들의 기운이 희미하게 펄럭거렸다.

휘리리릭.

준후기 지나간 자리에 희미한 잔상마저 남았다.

속도라면 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능지풍파를 펼친 것이다.

보법을 밟던 준후는 이형환위의 수법까지 응용했다.

빙그르르.

질풍처럼 달리던 준후는 반원을 그리며 요술을 부리듯 환자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지던 환자를 끌어안았다.

준후는 환자가 위태롭다는 걸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고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

“…….”

순간 적막이 감도는 병동 복도.

준후가 15미터의 거리를 단번에 줄여 뿅 하고 환자 앞에 나타나자 놀란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만약 준후가 나서지 않았다면 환자는 그대로 앞으로 쓰러져 큰 부상을 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오롯이 환자 관리를 못 한 병동의 책임으로 돌아갔을 테다.

타다다닥.

뒤늦게 정신을 차린 스태프들이 환자 곁으로 몰려들었다.

“아니, 서 교수님 아니셨습니까? 회진 시간에 대체 왜 돌아다니셨습니까?”

과장이 깍듯한 말투로 영만에게 물었다.

영만을 신원대 신경외과로 데려온 사람이 바로 과장이었다.

“소변이 급해서 염치불구하고 나왔습니다. 근데 소변을 보고 나오는데 갑자기 어지러워서.”

“저런…… 소변을 볼 때 힘을 주면서 뇌압이 일시적으로 상승한 모양이군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영만이 자신을 부축해 준 준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서 선생이 교수님께 잘해주는지 모르겠군요.”

“잘하다마다요. 하루에도 두세 번씩 병실에 찾아와서 상태를 묻고 늙은이의 쓸데없는 이야기도 잘 들어준답니다.”

“…….”

“아주 고마운 사람이에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제가 그래서 선생을 교수님께 붙였죠.”

과장이 뿌듯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준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서 선생. 방금 아주 멋졌어요. 무슨 무협지에 나오는 캐릭터 같던데? 번개처럼 움직여서 교수님을 부축하고 말이야.”

“…….”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요.”

방금까지만 해도 식물인간 환자 퇴원 건으로 준후를 압박하던 과장은 없었다.

과장은 어느새 준후의 팬을 자처했다.

손바닥 뒤집듯.

말과 행동을 뒤집는 과장을 지켜보며 준후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하…….

진심 한 대 쥐어박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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