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제38장 첫 데이트(2)
오전 회진이 끝난 후.
과장 성덕은 컨퍼런스 룸 옆에 마련된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어제 손수 갈아두었던 원두를 여과지에 올려놓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모락모락 일어나는 증기.
진하고 구수하고 산미가 느껴지는 커피 향.
성덕은 만족한 미소를 띤 채 소파에 앉았다.
맞은편 소파에는 이미 동훈이 앉아 있었다.
“커피 향이 참 좋지? 해외 여행 나갔던 마누라가 사온 고급 커피라네.”
“확실히 비싼 값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자네도 교수인데 휴게실에서 캔 커피를 마시는 건 그만둬. 품위가 손상된단 말이지.”
직급에는 직급에 걸맞은 품위가 있다고 성덕은 생각했다.
레지던트는 레지던트답게.
펠로우는 펠로우답게.
교수는 교수답게.
마지막으로 과장은 과장답게.
직급에 따라 품위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굳이 승진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나저나 아까 생각만 하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군.”
성덕은 영만이 넘어질 뻔한 사건을 떠올리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만은 현직 신원대 교수이자.
성덕의 아들인 재훈이 전공하는 경제학과의 학과장이었다.
이번 치료를 잘해주면 아들의 출세 및 취업 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각별히 신경 쓰고 있던 환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만약 넘어졌다?
심지어 스태프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으리라.
“저도 순간 팔뚝에 닭살이 돋더군요. 회진 중이라 복도에 사람이 없었고. 스태프들과 거리도 멀었으니까요. 환자가 꼼짝없이 넘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준후 녀석. 모처럼 한 건 했어. 무슨 육상선수처럼 뛰어나가더니만 말이야.”
“준후,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오죽하면 제가 각성 수술 세컨드로 썼겠습니까?”
“하긴 파격적인 선택이긴 했지. 결과적으로 괜찮은 선택이었고.”
성덕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성덕도 각성 수술 당시.
준후의 어시스트를 인상 깊게 지켜보았다.
준후가 남다르다는 보고 또한 오래전부터 듣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마음이 약한 거 아닌가? 장기 입원 중인 환자 하나 못 쫓아내고 말이야. 쯧쯧쯧.”
“환자·보호자와 라포가(유대관계, 신뢰관계)가 깊어서겠죠. 그래서 나 교수님도 준후를 흡족해했을 거고요.”
성덕은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장으로 다가가 무늬가 화려한 잔에 드립 커피를 따라 내렸다.
쪼르르륵.
자리로 돌아온 성덕은 소파 가운데에 위치한 탁자에 커피잔 두 개를 내려놓았다.
“잘 마시겠습니다.”
“당연히 잘 마셔야지. 무려 내가 내린 커피인데.”
나름 농담을 하고 성덕은 다시 소파에 앉았다.
커피를 한 모금 음미했다.
“뭐, 식물인간 환자 퇴원 건은 나 교수님을 구한 건으로 무마해도 될 것 같긴 해. 그 환자, 가만히 둬도 오래 못 갈 것 같기도 하고.”
“잘 생각하셨습니다. 혹시 보호자가 앙심을 품고 언론에 접근하면 병원이 환자를 쫓아낸다는 여론이 만들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자네는 너무 노골적으로 준후 편을 들었던 거 아닌가?”
성덕이 호기심에 물었다.
성덕이 보기에는 동훈의 처사가 지나쳤다.
공개적인 회진 자리에서.
교수가 레지던트 편을 든다?
이는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본원에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제 편을 미리미리 만들어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입 1호가 준후라는 뜻인가.”
“네. 그렇습니다.”
“아무리 잠재력이 크다고 한들 고작 레지던트 1년 차인데. 실수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드나?”
“싹은 미리 알아봐야 하는 법이죠. 나중엔 늦습니다.”
“으음…… 자네가 벌써 눈독을 들일 정도라…….”
성덕은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성덕의 눈에는 차지 않았지만 확실히 준후는 쓸 만한 조각으로 보이긴 했다.
뭐랄까.
소모품으로는 안성맞춤이라고 해야 할까.
고난이도 수술을 맡기거나 정의로운 컨셉으로 미디어에 선전하기 좋은 타입이었다.
“그럼 잘 키워 봐. 나도 적당히 뒤는 봐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말씀만 들어도 든든하군요.”
“단, 준후가 본인의 가치를 앞으로도 계속 증명해낸다는 가정하에서 만이네.”
단서를 달고 성덕은 커피를 또 한 모금 마셨다.
커피잔 뒤에서 야릇한 미소를 숨겼다.
언제, 어디서라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두는 것.
그것이 성덕이 과장에 오른 비결이었다.
* * *
오전 회진이 끝나면서 스태프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다른 스태프들과 달리 준후는 숙직실 쪽으로 향했다.
오늘은 쉬는 날이었다.
‘그 데이트’를 할 때까지 시간이 남아서 컨퍼런스와 회진에 참여했을 뿐이었다.
볼일이 끝났으니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데이트 준비를 해야 했다.
“야, 인사도 안 하고 가냐?”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경수가 준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준후는 몸을 돌려 경수와 마주 섰다.
“인사야 옷 갈아입고 할 생각이었지.”
“회진 때 뭐냐? 무슨 번개처럼 튀어나가던데? 우사인 볼트인 줄 알았다?”
“어렸을 때 잠깐 육상을 배웠거든.”
준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하얀 거짓말을 했다.
하도 변명을 많이 해와서 그런지 이제는 동료들 앞에서 무공을 드러내도 뻔뻔하게 변명이 나왔다.
“그래도 너무 빠른 거 아닌가? 눈 깜빡할 사이에 환자 앞에 있던데.”
“안 그래도 내가 육상 그만둘 때 육상부 코치님이 피눈물을 흘리더라고.”
“……식물인간 환자 건 말인데.”
경수가 준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퇴원 유도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해 줘?”
“아냐. 내가 할게. 주치의가 나인데 내가 해야지.”
“네 심성으로는 말을 못 꺼낼 것 같아서 그런다.”
경수의 지적은 옳았다.
퇴원 유도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해서.
준후는 지금까지 보호자에게 한 마디도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보호자에게 매달 50만 원씩 개인적으로 병원비를 지원하고 있는 준후 아니던가(뉴튜브 수익금의 일부로).
그런 준후가 보호자에게 퇴원을 종용한다면 보호자가 받을 상처는 말도 못 할 것이다.
“과장님도 너무 하셔. 솔직히.”
준후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식물인간 환자라고 해도 입원 기간은 재량껏 정할 수 있단 말이야. 보통 1년, 길게는 2년까지도 받아주는데…… 8개월은 너무 짧아.”
“어쩌겠어. 돈독이 오를 대로 오른 사람인데.”
“난 나중에 과장되면 절대 저렇게는 안 될 거다.”
“근데 버틴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거 알지?”
경수가 다시 문제를 꼬집었다.
준후에게 마음을 열었다고는 해도 경수는 여전히 현실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것이 준후와 경수의 차이였다.
“보호자가 퇴원을 받아들이든, 아니든 일단 말은 꺼내야 해. 그래야 나중에 과장님이 몰아붙일 때 명분이 생길 거 아니야.”
“그거야 그렇지.”
“이번 일은 그냥 나한테 맡겨라. 내가 돌려서 잘 말할 테니까.”
“고맙기도 하고 솔깃하기도 하지만 내 입장은 변함없어. 결국 내가 말해야지.”
“그래? 만약 말할 거면 지금 해. 안 그러면 오늘 제대로 쉬지도 못할걸? 하루 종일 이 생각만 하게 될걸?”
“휴우. 그래야겠지?”
“따라와. 옆에서 봐줄 테니까.”
경수가 앞장서고 그 뒤를 준후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뒤따랐다.
그런데 때마침.
맞은편에서 치프 찬영이 다가오고 있었다. 찬영은 두 사람을 잠시 불러 세웠다.
“준후야.”
“네. 치프.”
“방금 과장님 실에 다녀오는 길인데 식물인간 환자 퇴원 건은 없던 걸로 하기로 했다.”
뜻밖의 소식에 준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왜요?”
“준후 네가 오늘 나 교수님 쓰러지는 걸 막았잖아. 거기에 감명을 받으신 것 같아.”
“…….”
“환자 상태를 좀 더 지켜보자고 하시더라고.”
“잘됐네요. 안 그래도 부담이 컸는데.”
준후는 그제야 한시름을 덜었다.
아직 하늘은 준후와 환자의 편인 것 같았다.
* * *
그 날 오전 8시 40분.
준후는 모처럼 평상복 차림으로 병원 본관 1층 로비에 서 있었다.
로비는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바쁘게 출근하는 스태프들.
진료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병원을 찾은 환자와 보호자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의사가 되면서 준후는 새삼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다.
세상에는 크고 작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병들고 세상을 떠나는 데는 나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주 단순한 진리였지만.
이를 잘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의외로 별로 없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건강한 사람은 평생 건강할 것처럼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는 순리이거늘.
나는 언제, 어떻게 죽게 될까.
준후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우울한 질문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꿰뚫는 질문이었다.
무림에서 이미 죽음을 경험했던 준후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질문이기도 했다.
“아침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왔구나. 당연히 아영이 네 생각이지.”
준후는 어느새 곁에 다가온 아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준후의 립 서비스(?)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영이 빙긋 웃었다.
“그럼 데이트 준비는 끝나셨습니까?”
“네. 물론이죠.”
“그럼 갑시다.”
준후는 아영과 건물 본관을 나왔다.
초가을의 선선한 공기가 살갗을 스쳤다. 하늘은 높고 푸르렀으며 아침 햇살은 포근했다.
건물 창밖으로만 보던 풍경과 직접 마주하는 풍경은 그 질부터가 달랐다.
꾸르르륵.
인파를 헤치며 나아가는데 불쑥 배곯는 소리가 퍼졌다.
아영의 뱃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배고프지?”
“응. 죽을 것 같아. 목도 마르고 몸에 힘도 없어.”
“그러게 평범한 데이트를 하자니까. 그랬으면 지금쯤 맛있는 빵을 배불리 먹었을 텐데.”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거든요?”
“아영이 네가 그런 말 하면 하나도 신빙성이 없거든?”
준후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저 멀리 보이는 별관 검진센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늘 오전 데이트는 다름 아닌 건강검진이었다.
아영이 첫 데이트로 검진 데이트를 제안했던 것이다.
건강은 건강할 때 챙겨야 한다나, 뭐라나.
준후는 검진 데이트가 내키지 않았지만 아영이 원했으므로 따랐다.
앞으로도 아영이 원하는 것이라면 다 들어줄 생각이었다.
아영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준후, 너는 배 안 고파?”
“딱히?”
“하긴 예전부터 많이 먹는 편은 아니었지.”
“음식을 많이 먹으면 몸이 둔해지고 정신도 무뎌지니까.”
“앞으로는 안 돼. 가뜩이나 피곤한 외과의인데 잘 챙겨 먹어야지. 내가 책임지고 준후, 너 돼지로 만들어줄게.”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잡담을 나누며 도착한 별관 2층 건강검진 센터.
검진 센터는 세련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인테리어와 가구 배치에 신경을 쓴 기색이 역력했다.
먼저 온 검진자들도 꽤 많았는데.
일부는 이미 검진 가운을 걸쳤고, 일부는 접수 대기 중이었다.
대학병원은 진료뿐만 아니라 검진에도 많은 사람이 몰렸다.
준후와 아영도 그나마 직원이라서 취소된 예약 자리에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번호표를 뽑고 대기했다.
“22번 고객님.”
준후가 먼저 호명이 되었다.
접수대에 앉은 준후는 어깨에 메고 있던 크로스백에서 설문지와 검체물을 꺼내 수납 직원에게 건넸다.
무공으로 면밀히 몸 상태를 살피고 있었지만 혹시나 파악하지 못한 질병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현대 의학은 무공만큼이나 위대했으니까 말이다.
에이, 그래도 설마 별일은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