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제39장 충격(2)
준후의 지시에 규태는 준후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준후를 향해 손등을 내밀었다.
긴박했던 심폐소생술.
환자와의 치열한 책임 공방.
힘들었던 지난 순간들의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규태가 내민 오른손등에는 빨갛게 발적이 올라와 있었다. 알레르기성 두드러기가 광범위하게 번져 있었다.
심정지의 원인은…….
프로포폴 아나필락시스가 맞았던 것이다.
그리고 프로포폴 아나필락시스를 몰랐던 준후가 프로포폴 아나필락시스를 알아차렸다는 사실은 준후의 진단력이 한 단계 발돋움했다는 증거도 되었다.
탁!
준후의 어깨에 충격이 전해졌다.
고개를 돌리니 재욱이 방긋 웃고 있었다. 살길이 생겨 기쁜 모습이었다.
비록 타 과라고 해도 교수님의 형제에게 밉보였다간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몰랐으니까.
준후 역시 재욱에게 미소 짓고 다시 환자를 응시했다.
“손등이 따갑고 간지러우시죠?”
“네. 그러네요. 근데.”
환자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화제를 전환했다.
“대학병원이면 이런 일도 사전에 예방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물론 그랬으면 좋지만, 저희도 한계가 있습니다. 아나필락시스를 일으키는 원인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요.”
“…….”
“게다가 환자분처럼 프로포폴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분은 극히 드물고요.”
준후는 차분하게 규태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프로포폴 아나필락시스를 증명한 순간부터 상황의 주도권은 이미 준후의 손아귀에 있었다.
상황이 180도 뒤집힌 것이다.
규태를 주무르는 일은 무척 간단했다.
“우선 심정지가 발생해서 고통받으셨던 일에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많이 놀라셨을 겁니다. 검진을 받으러 왔다가 죽을 뻔하셨으니까요.”
“…….”
“하지만 저희 불찰에도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환자분의 아나필락시스를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죠.”
“뭐. 나도 오늘 처음 알긴 했어요.”
규태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앞으로 수술 또는 수면 검사를 받을 때는 의료진에게 프로포폴 아나필락시스가 있다는 걸 알려주셔야 합니다.”
“…….”
“그럼 비수면 검사를 하거나 프로포폴 대신 미다졸람이라는 마취제를 쓸 수 있거든요.”
“좋습니다. 이 정도 설명이면 나도 납득할 수 있어요.”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직히 심통이 많이 났어요. 아까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건강 검진받으러 왔다가 죽을 뻔했잖아요? 누구를 원망하면서 화내지라도 않으면 못 견딜 것 같더군요.”
규태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또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감사하고 또 죄송합니다.”
“아니요. 천만의 말씀을.”
준후는 겸손하게 대답하며 손을 내저었다.
환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화가 날 만한 입장이었다.
준후도 같은 입장이었다면 공격적으로 따졌을 것이다.
중간에 친형이 본원 교수라는 사실을 들먹인 건 치사했지만.
너무 흥분하면 그런 말실수도 할 수 있는 법이었다.
“선생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서준후라고 합니다.”
“생명의 은인인데 보답으로 필요하신 건 없습니까?”
“물질적으로 필요한 건 없습니다. 그리고 의료인은 환자분께 접대를 받으면 안 된다고 법으로 정해져 있거든요.”
“김영란법 말씀하시는 거죠? 근데 그건 정치인들이나 교사, 공무원한테만 적용되는 거 아닙니까?”
규태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학병원도 사립대학병원에 속해서 법의 적용을 받습니다. 교육계 쪽에 묶여 있달까요.”
“으음…… 골치 아프네요.”
“괜찮습니다. 환자분이 건강을 회복하신 것으로 저는 충분히 만족해요.”
준후를 규태를 바라보며 미소를 띠었다.
1퍼센트의 거짓도 담기지 않은 미소였다.
자신이 진료하고 자신이 치료한 환자가 건강해지는 것이 준후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자 보람이었다.
다른 보상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무림에서처럼 주변 사람들이 고통받거나 죽어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건 이제 신물이 나고 지긋지긋했다.
“정 그렇다면 친절 사원 카드를 적는 것 정도는 상관없겠죠? 선생님도 검진받으시다가 고생하셨는데.”
“그거야…….”
“어쨌든 감사했습니다. 그럼 이만.”
규태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침상을 빠져나갔다.
“이야, 서준후 한 건 했네.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깔끔하다잉?”
규태가 떠나자 재욱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선배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이야 네가 더 많이 했지. 그리고 너 아니었으면 아마 난 박살 났을 거다. 땡큐다. 땡큐.”
“얻어걸린 거죠, 뭐.”
“겸손하기는. 운이 아니라 관찰력과 판단력의 승리였는데. 아영이 기다리겠다. 빨리 가 봐.”
지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
번호를 확인하니 아영이었다.
준후는 서둘러 응급실을 뛰쳐나갔다.
* * *
친절 카드 작성과 진료비 수납을 마치고 규태는 병원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초가을의 햇살이 눈부셨다.
죽다 살아나서 그런지 햇살조차 남다르게 느껴졌다.
세상이 이렇게 밝았던가.
주변 풍경을 낯설고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규태는 휴대폰을 들고 통화를 연결했다.
긴 신호음 끝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형, 바빠?”
-수술방으로 가는 중이다. 길게 통화는 못 해.
통화 상대는 신원대 병원 수부외과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친형 성규식이었다.
“슬슬 점심시간인데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쉬고 싶다고 쉴 수 있는 직업이 아니지 외과의는. 건강 검진은 잘 받았고?
“말도 마. 죽다 살아났으니까.”
규태는 검진센터와 응급실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형에게 털어놓았다.
의사인 형이라면 자신이 겪었던 일을 온전히 이해해 줄 테니까.
-하…… 고생 많았구나. 지금은 좀 괜찮고?
“멀쩡해. 근데 프로포폴 아나필락시스라니. 나한테 그런 게 있을 줄은 몰랐는데.”
진단명을 듣던 당시를 떠올리며 규태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나도 너한테 처음 듣는데?
“엥? 형도 몰랐다고? 형 교수잖아.”
-의대 교수라고 다 아는 건 아니야. 그나저나 그 레지던트 관찰력이 꽤 좋았나 보구나. 그걸 알아챘다는 건 흉부 압박을 하면서도 네 몸을 세세하게 살폈다는 건데.
“외모부터 뭐랄까, 약간 꾀돌이 느낌이 나더라고.”
-그 친구 이름이 뭐라고 했지?
“서준후.”
-그 친구한테는 내가 따로 연락할게. 아, 미안한데 통화 끊어야겠다. 수술실 앞이야.
“넋두리 들어줘서 고마워. 형도 고생하고.”
통화를 끊고서 규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별건 아니다만 이걸로 준후에게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신원대 병원 지하 1층.
준후는 아영과 식당가에 있는 죽집을 찾았다. 검진 센터에서 받은 쿠폰으로 죽을 시켜 먹었다.
장시간의 공복 이후.
자극적인 음식을 먹으면 위장에 탈이 날 염려가 있었다.
“하여간 준후, 너도 대단하다. 쉬는 날에도 환자를 보고. 그것도 CPR에 프로포폴 아나필락시스 진단이라니.”
아영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봐도 좀 심한 것 같긴 해. 역시 난 환타인가 봐.”
“그걸 이제 알았어?”
“미안. 나 때문에 귀한 데이트 시간을 빼앗겨서.”
“장난친 거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근데 준후야.”
“응. 왜?”
“나 마취 풀릴 때 무슨 헛소리 안 했어? 이상한 소리 했을까 봐 불안한 거 있지.”
“전혀 안 했는데?”
준후는 시치미를 뚝 뗐다.
-준후야. 사랑해. 사랑해. 내가 더 잘할게.
아영의 헛소리(?)를 똑똑히 기억했지만 준후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아쉽긴 했다.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남겨두었으면 두고두고 꺼내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어라? 헤실헤실 웃는 거 보니까 뭐가 있는 것 같은데?”
“없어. 아무것도.”
“거짓말하면 혼난다?”
“아니라니까. 그냥 데이트 코스 생각하면서 웃었던 거야.”
“으음…… 수상해.”
식사를 마친 후 준후는 아영과 본관 건물을 나왔다.
하늘은 높고 푸르렀으며 햇살은 따사로웠다.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살갗을 쓸어주고 지나갔다.
데이트하기 좋은 날씨였다.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중.
곁에 서 걷던 아영이 갑자기 준후에게 팔짱을 끼었다.
“나 오래전부터 이런 거 하고 싶었어.”
“그럼 질릴 때까지 해야지.”
“그건 불가능해. 평생 안 질릴 거거든.”
빙그레 웃는 아영의 미소가 눈부셨다. 순간 준후는 자신에게 하나의 태양이 더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첫 번째 데이트 코스는 명동에서 시작되었다.
방학 기간이라서 그런지 평일 낮이었는데도 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젊은 청년들과 외국인 관광객으로 거리는 북적거렸다.
상점에서 틀어놓은 대중가요는 경쾌하고 흥겨웠다.
거리를 걷다가 두 사람은 타로점을 보는 가게를 찾았다.
아영이 보고 싶다고 했다.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만났네. 영혼의 반쪽 같은 느낌이랄까.”
점술사가 펼쳐놓은 카드 중 러브 카드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서로 다투거나 위기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아요. 근데 남자분 같은 경우에는…….”
“준후가 왜요?”
“말년에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될 것 같아요. 이 카드를 봐요. 수레바퀴하고 거꾸로 매달린 남자가 나왔죠?”
점술사가 휠 오프 포츈과 더 행맨 카드를 가리켰다.
“뭔가 상식을 벗어난 운명적이고 크나큰 변화를 겪게 될 것 같아요.”
“그게 좋은 건가요?”
준후의 운세에 오히려 더 적극적인 아영이었다.
“그거야 본인이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죠.”
점술사가 준후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준후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거렸다.
준후는 운세나 역술을 믿지 않았다.
그것이 바넘 효과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바넘 효과란 모호하고 일반적인 말을 한 개인만의 특징인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효과였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다.
-당신은 주체적인 사람이지만 때때로 주변 사람의 조언을 받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범위가 넓은 말이었다.
그러니 신기해하거나 대단하게 여길 필요가 전혀 없었다.
“내가 괜한 소리 한다고 생각하고 있죠? 하지만 꼭 귀담아 들어둬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점술사는 펼쳐놓은 카드들을 정리하고 섞더니 다시 카드 두 장을 뽑았다.
놀랍게도 휠 오프 포츈과 더 행맨 카드가 한 번 더 나왔다.
이번에는 준후도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속임수의 기색을 전혀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림에서 단련된 준후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을 텐데…….
“저기 죄송한데 카드 한 번 더 뽑아주실래요?”
준후는 그제야 점술사에게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그때는 점술사가 준후에게 관심을 거두었다.
“두 사람은 운명이 맺어준 연인이에요. 사랑은 시공간을 초월할 테니 서로가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점술가의 예언과 같은 말로 타로 카드 점은 끝났다.
“신기하다. 뭔가 족집게 같아. 분위기도 장난 아니었어. 그치?”
점집을 나오며 아영이 신난 아이처럼 떠들었다.
“어? 응.”
준후를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등 뒤를 힐끔거렸다.
점점 작아지는 가판 점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시공간을 초월한다라…….
설마 내가 무림에서 왔다는 걸 어느 정도 눈치챈 건가?
절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의혹이 가시지 않았기에 준후는 나중에 점집을 다시 찾아보기로 했다.